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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의 걸작 Feb 27. 2024

몰락의 두려움, 혹은 영향에 대한 불안

초현실주의와 잔혹연극, 해럴드 블룸과 버지니아 울프를 관류하는 메시지


1. 고난의 시대와 현실의 불안


마지막으로 좋은 소식을 들은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는 것이야 누구에게나 어렵겠지마는 평범한 사람이 되기에도 힘든 시절이다. 사람들은 평균이라도 되라고들 하는데, 모든 분야에서 평균에 위치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 또한 없다. 방송과 신문에서는 매일 비슷한 주제가 반복된다. 새로운 갈등이 일면을 장식하고, 구석에는 취업난과 치솟는 집값, 추락하는 출산율에 대한 짤막한 우려가 실려 있다. 삶의 여유가 사라져서 그런가, 사회에 만연한 배금주의와 서열화, 키치는 이제 우려스러울 정도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때로는 과장하여 늘어놓은 작금의 문제로 말미암아 현실과 욕망이 충돌하는 상황이 연출되곤 한다.


2. 상처받은 영혼과 초현실주의


초현실주의는 현실과 욕망이 충돌할 때, 욕망에 맞추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기에 언제까지나 꿈을 쫓을 수는 없는 일이다.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꿈을 포기하고, 그렇게 포기한 꿈은 치유되지 못하는 아픔으로 남는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그러한 어른들을 바라보며 욕망을 보존하는 한편 세상에 변화를 가져오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렇게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선언>을 집필한다.


저명한 정신분석학자들은 의식이 무의식의 발현을 억제한다고 주장한다. 한편으로 초현실주의가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은 무의식을 포괄하며, 이는 기존의 글쓰기로는 포착되지 않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은 현실의 사고체계에 억눌린, 세계의 본질을 현시하는 새로운 관념을 자동기술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이러한 믿음 아래 초현실주의는 저자의 무의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자동기술법을 전면에 내세운다. 의식의 흐름이 작가의 통제 아래 소설 속 인물의 사고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자동기술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가감없이 써내려가는 것이 특징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자동기술을 통해 잠재하는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역동적인 인간상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조심스러운 점은, 이러한 방법으로 얻어낸 인식은 부연 설명, 구체화, 형상화의 힘을 빌려야지만 온전한 인식으로 얻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초현실주의 텍스트는 상당히 난해하며, 평범한 사람에게 도달하지 못한다. 결국 새로운 인식을 얻기 위해서는 자동기술 텍스트의 파편적 인식을 기존의 인식체계로 받아들여야 하는 바, 현실의 담론과 거리를 두는 초현실주의가 그러한 일을 할 수는 없다.


실제로 다수의 초현실주의 텍스트는 우리에게 혼란을 가져온다. 일각에서는 하나라도 얻어 걸리기를 바라며 말장난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글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마땅한 주제를 도출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따른다. 글이 어렵기에 쓰는 사람의 의도와 무관하게 독자들은 텍스트의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기존의 해석 체계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자동기술법이 신비평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해석체계를 강요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초현실주의 텍스트는 의도적으로 현실과의 단절을 지향하지만, 자동기술 아래에서 의식과 무의식은 분리될 수 없다.


3. 아르토의 잔혹연극


실제로 초현실주의 운동은 구성원 간의 갈등과 초현실주의 텍스트의 난해함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초현실주의는 어린 시절의 꿈을 좌절시키는 현실에 대항하고, 대안적인 사회를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초현실주의 운동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변화를 모색하는 여러 담론들이 뒤이어 제기되었다. 이들이 문제시하는 상황은 동일하다. 누구나 가지는 어린 시절의 담대한 포부가 현실의 제약 앞에서 좌절되는 상황, 대안으로 고른 꿈이 기대한 행복을 주지 못하는 상황, 지금 '나'에게서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을 더는 찾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그것이다. 이들이 보기에 현실은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으며, 인간은 그 영향에 맞서 싸우거나 포기하며 성공적이거나 실패한 삶을 살게 된다. 일단 경제활동을 시작하면, 한번이라도 실패하거나 길을 잃어버리게 되면 커다란 꿈을 계속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1) 단 한번이라도 (그것이 누구의 것이든) 현실을 직시한다면 우리의 눈 또한 낮아지기 마련이다.


현실은 무대 위 연극처럼 환상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아니기에 살아가는 인간은 언제나 몰락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 몰락의 가능성은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아가게끔 하는 한편, 우리를 더욱 성숙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한다. 언제든지 몰락할 수 있다는 인간의 공포를 자극하는 비극은 역사적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비극은 개인을 파멸로 이끄는 현실적 상황을 제시하고, 크고 작은 엇나감이 본디 선한 인물을 비참한 최후로 몰아가는 과정을 극적으로 연출한다. 많은 비극은 현실의 문제에 직면한 인물이 내리는 선택이 파멸의 원인이 되는 기본적인 서사구조를 공유한다. 이 글에서 언급되는 수많은 이론가들은 '영향'이라는 단어로 개인을 좌절시키는 '현실의 제약'을 은유하며, 영향의 본질을 '몰락의 가능성'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서사구조와 골자를 공유한다. 우리는 이들이 동일한 문제에 대해 제기하는 서로 다른 의견들을 살펴보며 우리를 좌절시키는 현실에 대처하는 바람직한 방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젊은 시절 초현실주의자로서 열렬히 활동한 프랑스의 극작가 앙토냉 아르토는 초현실주의와의 결별 이후 삶의 본질은 잔혹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잔혹연극'을 탄생시킨다. 그의 연극은 극단적인 장면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며 언어의 역사 이래로 무뎌진 우리의 감각을 다시 자극한다. 기표가 기의와 분리되는 상황, 문화와 예술이 괴리되는 상황, 삶이 그 토대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아르토는 현실을 초월하여 순수함을 되찾고자 한다. 오랜 시간 병마와 싸우고, 혼신의 노력으로 만든 연극이 실패로 돌아가며 고통받던 그는 잔혹한 현실 너머에 닿을 수 있다는 믿음을 고수하며 <연극과 그 이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살아야 하며, 우리를 살게끔 하는 것과 우리를 살아가도록 하는 무엇인가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삶의 모든 문제와 좌절 앞에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분명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삶을 포기하지 못하며, 아르토 또한 그저 살기 위하여 대안적인 세계를 제시한다. 동시에 그의 잔혹연극은 페스트가 유행하던 중세 유럽처럼, 삶에 잠재한 잔혹성을 환기하며 관객에게 정신의 타락 가능성을 시사한다. 아르토 이전의 일부 예술가들은 이러한 두려움을 인식하면서도 애써 거리를 두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였다. 반면 아르토의 연극은 두려움을 극적으로 연출하며 관객들이 잔혹을 직시하게 한다. 이러한 가혹한 처사의 목적은 관객으로 하여금 삶을 등지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삶에 대한 열정을 일깨우는 연극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것이다(이단비, 2018). 이러한 맥락에서 아르토의 잔혹연극은 비극과 맞닿아 있다.


. . .혹자는 아르토의 연극을 비극의 연극적 과잉으로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비극이 최소한의 거리에서 그러나 유리 너머로 바다를 바라본다면 잔혹극은 그 유리를 깨버리고 바다 속으로 뛰어들려고 한다.

Laurens De Vos, Cruelty and Desire in the Modern Theater: Antonin Artaud, Sarah Kane, and Samuel Beckett, 이단비 역


4. 블룸과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


비극을 추동하는 힘은 ‘영향’과 그에 수반하는 몰락의 공포이다. 비극은 영향이 인물을 막다른 곳으로 이끄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현실의 은유이다. 그런 현실과 대비되는 것으로 예술을 위치시킬 때, 그 배경에는 예술의 지위를 낭만화하는 의식이 있다. 예술을 현실의 가치와는 무관한 것으로 바라보는 유미주의의 입장이 그러하다. 이러한 의견이 타당할 지라도 예술가는 현실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선대 예술가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셰익스피어는 말로의 영향에서 벗어나기까지 오랜 시간을 노력했고, 워즈워스는 밀턴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데 어려움을 보인다. 한편으로, 좋은 작품은 독창적인 철학과 기발한 표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좋은 작품을 통하여 후대 시인은 감성을 개발하지만, 세계의 한계에 도전하여 새로운 지평을 끊임없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예술가의 목표이기에 후대 시인은 발견되지 않은 세계를 보여주어야 하는 숙명을 지닌다.


이 여정은 선구자 시의 영향에 상당 부분 제약을 받는다. 2) 영국의 문학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그의 저서 <영향에 대한 불안>에서 예술가가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시인은 선구자 시를 읽으며 자신만의 감성을 형성한다(클리나맨, 또는 시적 오독). 그는 독창적인 시를 쓰고자 하지만 선구자 시와는 다른 ‘나만의 시’를 상정하는 한 그는 시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테세라, 또는 완성과 대조). 결국 그는 적극적으로 선구자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하며(케노시스, 또는 반복운동에 대한 방어기제), 이내 선구자를 초월하고자 한다(악마화, 또는 반-숭고). 하지만 그는 곧 처절한 발악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정화하며 자신을 관류하는 영향을 비워내며(아스케시스, 또는 자기 정화), 이내 모든 영향에 본인을 열어젖히며 독창적인 작품을 완성시킨다(아포프라테스, 또는 죽은 자의 귀환).


블룸이 설명하듯, 예술가는 선대 예술가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들의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때론 그들을 모방하려 하지만 자신만의 작품을 쓰고자 할 때 이 영감은 장애가 된다. 의도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대조하거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이어지지만, 성공적인 예술가로 거듭나기 위하여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비워내는 과정이다. 우리가 글을 쓸 때, 멋있는 글귀를 베끼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어려운 말들로 문장을 억지로 늘리는 시간도 있다. 하지만 좋은 글을 쓰게 되는 것은 결국 있어보이는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말만을 간결하게 쓰는 시점에서다. 한때 우리를 사로잡은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지만, '나'의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성장한다.


영향은 현실을 은유하기에 블룸의 이론은 현실의 제약에도 유사하게 적용된다. 평범한 사람에게 세상은 분명 쉽지 않으며, 가만히 앉아서는 무엇을 이룰 수 없다. 한편으로 우리 주변에는 꿈을 관철하여 자신의 목표에 도달한 사람이 있고, 어린 나이에 유명세를 얻은 연예인과 소셜미디어로 자신의 재력을 뽐내는 온갖 사람들이 있다. 때론 그들을 선망하거나 자신이 넘볼 수조차 없는 삶을 직시하며 비탄에 빠질 수도 있다. 높은 취업의 벽을 올려다보며 지레 겁을 먹고 다른 일을 기웃거릴 수도 있다. 하지만 성공은 남들과의 비교, 모방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도피를 통해 얻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본인이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의 조화로 얻어지는 것이 성공이며, 본인의 의지가 있어야 진정한 행복이고, 성공과 행복의 기준은 모두에게 다르다. 중요한 것은 마찬가지로 아스케시스의 과정이다.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은 상당한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블룸이 인용하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속 단락은 ‘영향’의 마력을 여실없이 보여준다. 3)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준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향을 받은 자는 자신 본래의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 본래의 감정으로 불타지도 않지요. 그의 미덕은 그의 현실이 아니고, 그의 죄가 있다면, 그 죄도 빌린 것이지요. 그는 다른 누군가의 음악의 메아리가 되고, 자신을 위해 쓰이지 않은 역할을 맡은 배우가 되는 겁니다.” 우리 주변에 영향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혀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끝내 절필을 택하는 이들을 보면 ‘영향’을 처음부터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고립과 개방을 통해 영향으로부터 독자적인 무언가를 산출해내야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앙토냉 아르토를 돌아보면, 그의 연극은 잔혹을 직시하며 인간의 마음을 뒤흔드는 잔혹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관객은 세계의 본질에 접근하게 되며,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엿볼 수가 있다. 이는 연극이 회피를 선택했다면 얻을 수 없는 깨달음일 것이다.


5. 초현실주의와 <파도>


문학에서의 초현실주의가 ‘영향에 대한 불안’을 공유하는 아르토, 블룸과 구분되는 지점은 바로 영향을 대하는 태도에서다. 초현실주의와 자동기술법은 현실의 관념을 거부하는 케노시스에 천착한다. 여기에는 아포프라테스의 단계가, 자신을 영향에 개방하는 최후의 절차가 상정되지 않는다. 영향을 거부하고 의식적으로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내려 한다면 어떻게 걸작이 탄생할 수가 있을까. 예술을 통해 ‘알려진 세계’의 끝에서 미지의 세계를 찾아내고자 해도 역부족일 터인데 어찌하여 세계의 중심에서 저 끝까지 홀로 나아갈 수가 있겠는가. 초현실주의의 강령인 욕망에 맞추어 변화하는 사회 자체가 ‘영향’에 의해 움직이는 욕망을 전제하기에 이 지점에서 초현실주의는 내적 모순에 직면한다.


아도르노는 초현실주의를 비판하며 초현실주의가 진리에 대한 집착으로 행복의 모습을 희생시켰다는 점에 주목한다. 예술은 물론 진리를 전달할 수 있으며, 진리를 전달하는 예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예술을 철학과 구분짓는 것은 감성이며, 다수의 작품은 지금도 심미적인 가치에 봉사한다. 초현실주의는 진리라는 결과를 위하여 예술함의 과정을 등한시하였다. 하지만 현실을 바꾸고자 한다면 현실의 변화라는 결과에 머리를 싸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현실을 탐구해야 한다. 현실을 바꾸어야 한다고 목소리만 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이끄는 요소들에 몰두해야 한다. 이것이 초현실주의의 한계이며 해럴드 블룸의 이론에서 성공한 예술가들이 수행하는 과정이다. 현실의 문제를 직면하고, 우리를 끊임없이 좌절하게 만드는 영향에 몸을 던질 때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듯 세상의 법칙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을 보며 우리는 좌절한다. 그럼에도 내일의 해는 뜨고, 내일은 또 다른 하루가 펼쳐진다. 누구에게 세상은 지나치게 평등해 보이며, 또 다른 누구에게 세상은 과도하게 불합리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국 각자의 궤도에 안착한다. 쌓아놓은 모래성을 무너뜨리던 어제의 파도는 오늘 강이 건네는 모래를 해변으로 실어 온다. 그것이 "파도"라는 제목을 통해 울프가 은유하고자 했던 삶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인간은 세계 앞에 무력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저항한다. 이러한 과정이 있었기에 인류는 진보를 거듭할 수 있었다. 현실의 영향으로부터 몸을 피하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4) 그것이 울프의 메시지이다.


그러고는 내 안에서도 파도가 일어선다. 부풀어오르고 등을 구부린다. 나는 다시 한 번 새로운 욕망을, 기수가 처음에 박차를 가하고는 뒤로 잡아끄는 자존심이 강한 말같이 내 밑에서 용솟음치는 어떤 것을 느낀다. 지금 내가 타고 있는 너, 우리가 이 보도를 발길질하며 서 있을 때 어떤 적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것을 느끼는가? 그것은 죽음이다. 죽음이 적이다. 내가 창을 공격태세로 꼬나잡고 젋은 사람처럼, 인도에서 말을 타고 달렸을 때의 퍼서벌처럼 나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죽음에 맞서서 말을 타고 돌진한다. 말에 박차를 가한다. 정복당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고, 너를 향해 내 몸을 던지노라, 오오 죽음이여!


영향은 미지의 우주를 밝히는 가장 먼 등불이다.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는 것은, 앎의 끝에서 결과를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도약하는 것이다. 눈이 멀어 이미 왔던 길을 맴돌 수도, 어둠에 잠식되어 모든 힘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노력을 멈출 수 없는 것은, 저 먼 곳에 삶이라는 궁극적인 목표가 있는 까닭에서다. 영향이 생각을 제한하는 것은 사실이다. 앎이 부족할수록 더욱 그러한 듯싶다. 하지만 좋은 작품은 여운을 남기고, 순간의 감정은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문학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세상에서 영향은 우리에게 선택지를 마련해준다. 개인적으로, 욕망에 맞추어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것은 언제나 영향이었다. 영향이 욕망을 만드는 까닭에서다. 여러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문학이 세상을 반영한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문학 속 영향'으로 '현실의 제약'을 은유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초현실주의의 취지에 공감하면서, 커다란 포부로 가득찬 어린 시절을 씁쓸하게 돌아보면서도, 오늘이 어제와 다를 바 없이 너무도 평안하게 돌아가는 까닭은 삶이 그곳에, 영향의 심연에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참고


1) 레오나르도 다빈치, "단 한 번이라도 하늘을 날아 보았다면 대지를 거니는 눈은 창공을 향할 것이다. 그곳에 머무른 적이 있기에, 그곳에 돌아가길 염원하기에." (Una volta che abbiate conosciuto il volo, camminerete sulla terra guardando il cielo, perché là siete stati e là desidererete tornare.)


2) 해럴드 블룸의 <영향에 대한 불안>에서 시인은 선구자 시를 극복하기 위하여 다음의 단계를 거친다.

클리나맨: 시적 오독, 오류. 선구자 시가 움직이는 방향에서 이탈하는 것.

테세라: 완성, 대조. 시인은 선천적 시의 선천적 용어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의미를 갖게끔, 선조자 시와 대조적인 시를 창조함.

케노시스: 반복운동에 대한 방어기제. 스스로를 비우며 선구자의 영향을 제거하는 단계.

악마화: 반-숭고. 선천적 시에 담겨있으나 선구자를 초월하는 영역으로 후대 시인은 도달하고자 한다. 선천적 시의 독창성을 제거하고자 의도적으로 자신의 시를 선구자 시와 관계 맺는 단계.

아스케시스: 자기정화. 축소하는 수정운동으로, 타자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상상적 재능의 일부를 포기하는 단계.

아포프라테스: 죽은 자의 귀환. 자기 시를 선구자 작품에 개방하며, 역설적으로 이 단계에서 후대 시는 선구자 시와는 구별되는 독창적인 작품으로 완성됨.


3) "Because to influence a person is to give him one’s own soul. He does not think his natural thoughts, or burn with his natural passions. His virtues are not real to him. His sins, if there are such things as sins, are borrowed. He becomes an echo of someone else’s music, an actor of a part that has not been written for him."


4) "And in me too the wave rises. It swells; it arches its back. I am aware once more of a new desire, something rising beneath me like the proud horse whose rider first spurs and then pulls him back. What enemy do we now perceive advancing against us, you whom I ride now, as we stand pawing this stretch of pavement? It is death. Death is the enemy. It is death against whom I ride with my spear couched and my hair flying back like a young man's, like Percival's, when he galloped in India. I strike spurs into my horse. Against you I will fling myself, unvanquished and unyielding, O 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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