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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의 걸작 Nov 22. 2024

Look Back In Anger : 연극 리뷰

런던 ‘알메이다’ 극장의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관람기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는 현대 영국 연극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브레히트와 아르토가 유럽 연극의 지평을 변화시키는 동안 영국 연극은 오랜 기간 조지 버나드 쇼의 사실주의 연극에 머물렀다. 연극은 변하지 못했고, 대외적으로는 미국을 중심으로 국제정세가 재편되며 영국은 낙후되고 있었다. 1960년대의 청년들은 도태된 사회를 바라보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기성세대에 불만을 품는다. 존 오스본의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는 당대 청년층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연극으로, 다수의 ‘앵그리 영 맨’을 양산하였다. 이들이 문화계를 지배하며 영국의 뉴웨이브 운동이 시작되었다.


해당 연극이 발표된 이래 영국의 사회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적 지배력은 더욱 막강해졌고, 마가렛 대처 총리의 대규모 재정지출 삭감은 여러 신생 극단의 폐업을 야기하였다. 현대 영국 연극을 견인하던 극단 ‘씨어터 워크샵’의 폐단은 이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이후 RSC와 피터 브룩, 컴플리씨테와 포스드 엔터테인먼트를 비롯한 여러 이들의 노력으로 연극계는 회복에 성공하였지만 이때의 상처가 아직은 선명하다. 최근 영국의 경제는 더욱이 나빠지고 있으며, 각기각색의 집단이 파업과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 여전히 영국의 청년층은 변화를 열망하고 있으며 이러한 배경에서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는 언제나고 유효하다.


연극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지미와 지미의 아내 앨리슨, 지미의 친구 클리프는 같은 집에 살고 있다. 연극의 배경은 일요일. 매일이 동일한 삶의 반복, 그렇게 새로운 주가 시작되고 시간이 흐르고 청춘은 소진된다. 앨리슨은 옷을 다리고, 지미는 차를 내려달라고 불평하고, 신문을 읽는 클리프는 앨리슨을 두둔한다. 지미는 삶에 대한 불평을 쏟아내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지미는 앨리슨에게 과격한 말을 쏟아낸다, 마치 그가 화를 내기를 바라듯. 셋은 싸우고 화해를 반복한다. 그러던 중 앨리슨의 친구 헬레나가 이들의 집에 들어오면서 앨리슨은 아버지의 집으로 도피한다. 클리프는 새로운 삶을 찾아 집을 떠나며, 집에 남은 헬레나와 지미는 사랑을 나눈다. 그러던 중 앨리슨이 비에 젖은 채로 집에 들어오고, 죄책감을 느낀 헬레나가 집을 떠난다. 지미와 앨리슨이 서로를 연민하며 작품은 끝을 맺는다.


이번에 관람한 작품은 2024년 11월 19일 런던의 ‘알메이다 극장’에서 공연되었고, Atri Banerjee가 연출을 담당하였다. 무대에는 아무런 구조물도 설치되지 않았다. 바닥의 두 겹의 원이 무대 장치의 전부였다. 중심부의 원은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오며, 테두리의 원은 회전한다. 무대 구성에서 피터 브룩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저서 <빈 공간>에서 기존의 관습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연극 관행을 비판한 그는 현대의 관객과 소통하는 무대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는 때론 고전적인 장식들로 가득 채운 무대보다 빈 공간이 더욱 강한 울림을 주곤 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강렬한 제목과 모호한 설명으로 인하여 브룩의 ‘빈 공간’ 개념은 오랫동안 오해의 대상이 되었다. 이 즈음 무대를 비우기만 하면 브룩이 말하는 온갖 연극적 효과를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실망스러운 연극이 여럿 만들어졌다. 알메이다 극장의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는 그 본질에 입각하여 빈 공간을 구현하였는데,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면 메시지를 가릴 수 있는 장치들을 제거하는 것이 단연 이상적이기 때문이다.


Look Back In Anger, Almeida Theatre

극단은 빈 공간을 바닥을 구성하는 두 겹의 원형 장치와 사운드를 통해 채운다. 막이 시작할 때, 국면이 전환될 때, 막이 끝날 때 앰비언트한 음악이 재생된다. 귀를 찌르는 듯한 음악은 무대를 비추는 단 하나의 흰색 조명과 어우러져 동영상을 되감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실재하는 신체성의 무대에서 이러한 효과를 구현할 수 있음은 매우 놀랍다. 음악이 나오면 배우는 무대를 정리하는 직원으로 변한다. 의상을 교체하고 무대에 널브러진 소품을 정리한다. 막이 시작할 때도 회전하는 원형 무대에 의자를 배치하는 것은 배우이며, 돌아가는 의자와 달리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인물들이 하나되어 흥미를 배가한다.


그럼에도 자칫 연극이 관객의 의문을 해결하지 못하고 어설프게 마무리될 수도 있었다.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는 분명한 사회적 메시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런 메시지를 설파하는 인물인 ‘지미’의 괴팍함을 관객이 곧이곧대로 따라가기는 어려운 까닭에서다.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나, 주의 인물들의 화를 돋구어 진실된 반응을 요구하는 그의 의중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아내를 학대하는 지미의 행동을 온전히 공감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결국 대본의 모호함을 해소하는 것은 현장의 몫이고, 텍스트로 드러나지 않는 미묘함을 통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시켜야 한다.


텍스트로 접한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지미의 괴팍한 성격이다. 앨리슨은 의지나 고집이 없는 몰개성적 인물처럼 다가오는데, 극단은 이런 앨리슨의 주체적인 모습을 부각한다. 무대에서 앨리슨은 우유부단하고 생각을 하지 못해 지미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지미의 상처에 공감하기에 그를 떠나지 않는 것으로 묘사된다. 앨리슨이 자신과 지미의 처지를 고백하는 장면은 기대했던 것보다 더욱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책을 읽으며 해결되지 않던 의문은 “왜 지미를 싫어하거나 떠난 사람들이 다시 그에게로 돌아오는가?”,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의중과 별개로 왜 지미는 과격할 정도로 주변 인물들을 몰아붙이는가?”, “지미와 앨리슨의 마지막 재회에서 재현되는 ‘곰과 다람쥐 놀이’의 의미는 무엇인가”였는데, 무대화를 통해 극단은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였다.


특히 지미의 입체적인 모습, 상처받은 자아를 강조하는 것이 유효했다. 지미가 열 살의 나이에 사랑하는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할 때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슬퍼하는 척, 지미를 위로하는 척하지만 서서히 죽어가는 아버지의 곁을 열 시간 남짓 지킨 사람은 지미밖에 없었다. 그의 폭력적인 언어에 가려진 속마음을 연극은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옛 친구 휴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지미가 진심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은 묘사에 설득력을 더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한 지미는 사람들의 진실되지 않은 마음을 간파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인물들이 마음에 없는 말을 건넬 때 지미가 격노하는 것 또한 이때의 경험에 연유한다. 결국 지미의 히스테리는 현대인, 관객의 가식적인 태도를 지적하는 의도에서 고안된 것으로 보인다. 어른이 되며 우리는 가장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원하는 것을 모두 관철해서는 아니 되며 남들과 두루 어울리기 위해서 개개인의 날카로움은 다듬어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른이 되며 남들의 의견을 수용하고, 자신의 생각인 양 그것을 말하곤 한다. 웃기지도 않는 일에 ‘ㅋㅋㅋ’를 남발하고 내심 동의하지 않는 의견에 호응하는 체한다. 그렇게 우리는 모나지 않은 인간으로 거듭나는데 그럼으로써 기존의 체제는 더욱 공고해진다. 저항의 가능성이 거세된 탓에서다.


그렇기에 지미가 앨리슨을 향해 “She(앨리슨의 어머니를 지칭) is ought to be dead"라고 말할 때 그는 앨리슨이 젠체하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목소리를 내기를 촉구하는 것이다. 앨리슨이 대꾸하지 않자 지미는 노골적으로 화를 내라고 하는데 여기서 그의 의도는 분명하다. 이 대목은 지미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핵심적인 장면으로, 이것을 제외하고 지미에 대해 말해서는 아니 된다. 지미를 일방적인 악인으로 몰아가려는 해석이 있다면 그것은 이 대목을 완전히 놓쳐버린 탓이다. 연극은 관객이 막다른 길로 빠지지 않도록 해당 장면을 강조한다.


이 모든 것은 현실의 변화를 촉구하는 작품의 메시지와 지미의 분노를 설득력있게 연결하기 위한 것으로, 공연은 인물들의 내밀한 사정을 상기시킴으로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극 중에서 앨리슨은 지미를 모든 것이 똑같아서 고통받는 사람으로 묘사하는데, 인생의 주요 관문을 지난 어른에게 새로움은 많지 않다. 결혼과 취업 이후의 삶은 대체로 일과 휴식의 반복에 불과한 탓이다. 어딘가에 정착한 어른은 생활 방식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미는 상대를 위협하는 레퍼토리를 통해 새로운 갈등을 조장하며 일상의 무기력함, 청춘의 소진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칠 뿐이다. 모든 것이 똑같이 반복되고, 일요일은 매주 반복되며 새로운 주로 이어지고, 우리를 구속하는 삶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속에서라도 발버둥치는 것이 곧 현실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가정을 사회의 축소판으로 묘사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현실의 변화를 위해 불화를 주도하는 행위는 (이를테면 시위) 가정에서 안분지족하는 인물들을 비난하는 지미의 행위와 다르지 않다.


객관적으로 지미의 행동을 긍정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차치하고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가 60년대 청년층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들도 지미의 과격함에 우리와 동일하게 반응하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미가 당대의 젊은이들을 결집시킬 수 있었던 까닭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미를 누구보다 앞서서 비난하던 헬레나가 그를 사랑하게 된 이유, 앨리슨이 지미를 떠났다가 이내 돌아온 이유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지미는 사회의 맹목적인 관습을 거부하는 인물로, 자신의 아내와 클리프가 애정행각을 벌이는 것을 용인하거나, 앨리슨과 결혼한 상태에서 헬레나와 사랑을 나누는 부류이다. 한편 그는 누구보다 진실한 감정에 충실한 사람으로, 앨리슨이 다리미를 엎어 화상을 입었을 때나 앨리슨이 그의 다그침 끝에 컵을 깼을 때, 헬레나가 그의 뺨을 때렸을 때, 돌아온 앨리슨이 유산을 고백할 때 진심으로 공감하는 면모를 보여준다. 진실된 마음의 측면에서 인물들은 지미의 본심을 이해하며 점점 그에 동조한다. 이는 작품의 끝에 다가갈수록 드러나는 지미의 상처받은 자아에 극중인물들이 공감하며 이해가 더해지는 덕이다. 작품의 끝에서 앨리슨과 지미가 서로를 연민하며 ‘곰과 다람쥐 놀이’를 재현하는 것은 앨리슨이 지미의 사고에 완벽히 동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이번에 무대에 오른 연극은 마치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의 해설본 같았다. 책으로만 접했을 때 어렴풋이 이해했던 것들의 빈자리를 채우는 소중한 기회였다. 책을 읽을 때 각각의 인물은 뚜렷하게 평면적이었다. 지미는 마냥 공격적이었고, 앨리슨은 생각이 없는 기계 같았다. 인물의 성격과 관계에 대한 이해가 따라오지 않아 주요 사건을 연결하는 데 애를 먹었다. 반면, 알메이다 극장에서의 연극은 인물을 입체적으로 구현하며 관객이 등장인물 개기인의 내밀한 사연에 주목하도록 하였다. 덕분에 온갖 리뷰와 논문에서 말하던 것들의 참뜻이 명확하게 다가왔다. 다만 연극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설명해주려는 노력이 작품의 잔혹성, 과격성, 야만성을 희석하는 안타까운 결과로 이어졌음을 지적해야겠다. 아르토가 잔혹연극을 주창하고 브룩이 해프닝을 강조한 까닭은 이들이 순간적인 스파크를 촉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고를 거치지 않은 강렬한 감정을, 이를테면 분노, 슬픔, 경멸, 혐오 따위를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사라진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는 분명 반쪽짜리 연극이다. 오랜 기간 기성세대의 축출과 사회의 변화를 울부짖던 연극이 그 역동성을 잃어버렸다면, 연극이 바라는 미래는 이미 우리의 과거가 된 지 오래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그대로라면 연극이 바뀌어서는 아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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