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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음악 평론

FLASH! 잔나비와 "사운드 오브 뮤직 pt. 1"

잔나비 정규 4집 "사운드 오브 뮤직 pt. 1" 리뷰

by 미지의 걸작

오래 전, 잔나비 열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때 유튜브 채널 '딩고 뮤직'의 "잔나비 JANNABI [100초]로 듣는 잔나비 명곡 모음"을 통하여 밴드의 음악을 처음으로 접하였다. 그 이후로 그들의 음악이 지닌 풍부한 깊이의 가사를 음미해왔다. 칸트에 따르면, "경험에 형식을 부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상상력"이라고 한다. 칸트의 말을 빌려 예술 경험을 기술한다면, 예술은 우리의 근거 없는 직관에 근거를 마련해주는 인간의 활동이다. 가령, 로스코의 <Untitled(Red)>는 색을 통해 정열과 격동을 비롯한 감정을 표현하는데, 감상자는 그림을 감상하며 비로소 '정열'의 본 의미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일상적 언어체계에 포섭된 개념들은 예술을 통해 비로소 살아숨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오랜 시간 내가 느끼는 슬픔의 근거를 잔나비의 음악에서 찾기 위해 부던히 노력했다. 슬픔의 이유를 그들이 마련해주기를 바라며, 나의 멜랑콜리가 그들이 노래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기를 바라며.


2025년 4월 28일에 발매된 정규 4집 앨범 "사운드 오브 뮤직 pt. 1"은 이전 정규 앨범인 "환상의 나라"에서 아쉬웠던 점들을 모두 개선하며 음악적으로 한층 높은 경지에 도달하였다. "MONKEY HOTEL"과 "전설"을 통해 현시대를 대표하는 밴드 중 하나로 성장한 잔나비가 새로운 단계로 도약해야 하는 시기에 "환상의 나라"는 오히려 현실에서 도피하는 퇴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었다. 앨범은 독일 낭만주의의 '환상'과 '도피' 모티프를 전면에 사용하였다. 앨범의 타이틀곡 "외딴섬 로맨틱"은 이러한 정서가 집약된 곡이다.


나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지
거긴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그래 넌 두 눈으로 꼭 봐야만 믿잖아
기꺼이 함께 가주지

이대로 이대로
더 길 잃어도 난 좋아
노를 저으면 그 소릴 난 들을래

쏟아지는 달빛에
오 살결을 그을리고
먼 옛날의 뱃사람을 닮아볼래 (oh oh)


그들의 음악은 현실적 언어로 낭만적 세계를 창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 연유하여 밴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그들의 인기는 현실과의 접점에서 기원함에도 불구하고, "환상의 나라"는 낭만적 이상세계 구축이라는 목표를 위해 현실과의 접점을 포기하였다. 더불어 앨범은 그들의 초기 EP에서 드러나는 퀸과 비틀즈로부터의 영감을 극복하기는 커녕, 그들의 영향으로 회귀하였다. 해럴드 블룸이 <영향에 대한 불안>에서 말하듯, 위대한 예술가는 영향을 수용하여 자신만의 독창적 스타일로 승화한다. 잔나비는 정규 2집 "전설"에서 브릿팝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밴드의 독특한 음악적 스타일로 승화하였으나, 3집에서 다시 이들에 대한 영향으로 회귀하였다는 사실이 서사적 측면에서 아쉬웠다. 이외에도 다양한 이유로 인하여 "환상의 나라"는 이전 두 앨범 보다 흥행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범의 음악적 완성도는 높았는데, 뛰어난 믹싱/마스터링으로 인하여 음악을 듣는 경험은 만족스러웠다. 국내의 많은 아티스트들이 여전히 보컬 볼륨을 높이기 위해 음질을 포기하는 상황에서 밴드의 사운드 디자인은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사운드 오브 뮤직 pt. 1"은 이전 앨범의 긍정적 요소들을 강화하고, 아쉬웠던 점들을 보완하여 한 층 높은 수준으로 도약하였다. 앨범은 밴드가 주로 노래하던 멜랑콜리에서 벗어나 창조와 사랑을 전면으로 내세웠다. 가사의 주제와는 달리 비주얼 아트와 사운드 디자인은 8-90년대 스페이스 오페라를 재현한다. 밝은 톤의 기타와 드럼 사운드의 반향이 이러한 느낌을 배가한다. 대표적으로 'FLASH'와 '아윌다이포유♥x3'에서 이러한 사운드 디자인이 두드러진다. 이전 앨범들에서 유려한 가사로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공략하고자 한 반면, 이번 앨범에서 최정훈은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음악을 수단으로 하여 실현하고자 하였다. 'Flash'의 거꾸로 박힌 나무에 대한 부분이 대표적이다.


거꾸로 박힌 늙은 나무가
번쩍이는 모양을 하고서는
위대할 것들 비범한 것들
나에게로 내리칠 것
두 눈은 커다랗게!

Then I say flash! (Flash!)
Then I need flash! (Flash!)


곡은 '거꾸로 박힌 나무가 존재한다면 어떨까?'라는 발상에서 시작하여 위대함과 비범함을 예술가의 외부에서 번개처럼 내리치는 속성으로 설명한다. 소개글에서 밝히길, 'FLASH'는 영감이 '번쩍'하는 순간에 우리에게 찾아오는 순간을 노래하는 곡이라고 한다. 곡은 '영감'이라는, 이제는 일상적인 소재를 나무와 번개라는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구현한 셈이다.


다음 곡인 '아윌다이포유♥x3'에서도 독창적 아이디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곡은 세 개의 목숨이 주어지는 게임에서 착안하여 하나의 목숨이 남았을 때, 그 목숨을 음악이라는 목표를 위해 바치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네게로 뛰어들었던걸
기억해 줄래
남은 두 개의 목숨으로
I will die for you


곡에 대해 잔나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보통 게임이 삼세판이듯, 나에게는 세 개의 목숨이 있었고 최소 두 번은 죽었을 거라는 아슬아슬한 기분을 느낄 때가 잦습니다. 나머지 하나의 목숨이 남았을 때 내가 좋아하는 시 -서커스의 여자- 속 주인공처럼, 영화 매드맥스의 워보이들처럼, 어벤져스의 아이언맨처럼 헌신할 무언가를 위해 뛰어들 수 있으리라고 결심하는 노래입니다. 우리 음악을 사랑해 주는 팬들에게 바치는 노래이기도 하고 그래서 곧 음악 그 자체에 대한 곡이기도 합니다." 이 곡은 게임 속 전자음악의 사운드를 차용하여 창조에 관해 노래한다는 점에서 '창조'와 '사랑'을 중심으로 한 문학적 주제와 '우주'로 집약되는 비주얼 아트의 연결고리로서 기능한다. 덕분에 이질적인 두 개의 이미지가 성공적으로 융화될 수 있었다.


처음 'FLASH'와 '아윌다이포유♥x3'를 들었을 때, 새로운 앨범이 도달한 경지에 압도되었다. 정규 3집의 타이틀곡 '외딴섬로맨틱'은 아주 오래 전에 완성된 곡이라고 한다. 밴드는 이전에 "환상의 나라"를 구성할 때 '외딴섬로맨틱'을 위협할 수 있는 곡을 제외하였다고 밝힌 적이 있는데,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기존의 음악들이 오랜 시간 동안 비슷한 주제의식을 공유한 원인은 오래 전에 작곡한 노래를 새로 발매함에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새로운 앨범의 주제의식이 기존 앨범들과 확연히 구분된다는 사실 또한 앨범에 실린 음악들이 완전히 새로이 만들어진 음악이라 그럴 것이라 추측한다. 밴드는 이제 새로운 음악으로 세상에 돌아왔으며, "사운드 오브 뮤직 pt. 2" 발매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차원으로 도약하기 위해 앨범이 어떠한 다리를 놓을 것인지 앞으로 주목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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