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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모 Jul 07. 2019

그것과 이것은 서로 다르지 않나요?

  미국 유명 시트콤 <프렌즈>의 한 에피소드에서 로스 갤러와 레이첼 그린은 함께 병원에 간다. 병원에 도착한 로스는 간호사에게 자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저는 닥터 로스 갤러입니다.” 이 말을 듣자 레이첼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로스를 바라보며 말한다. “로스, 여기는 병원이야! 여기는 ‘닥터’라는 말이 정말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라고!” ‘Doctor’라는 영단어에는 의사라는 의미 외에도 박사라는 의미가 있다. 고생물학 박사학위를 딴 로스는 자신이 박사라는 의미에서 ‘닥터 로스 갤러’라고 말한 것인데, 레이첼은 병원 관계자들이 로스를 의사로 헷갈릴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종류의 유머는 미국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한다. 가령, 비행기 안에서 환자가 발생하여 승무원이 승객들에게 “이 비행기 안에 닥터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때 누군가가 “제가 닥터입니다!”라고 자신만만하게 손을 든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영문학과 박사였다는 내용의 유머이다. 이 유머는 MD와 Ph.D.를 헷갈려서 생겨나는 것이다. 즉, ‘의사’인 MD(Doctor of Medicine)와 ‘박사’인 Ph.D.(Doctor of Philosophy)를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똑같이 ‘닥터’라고 불러도 그 닥터와 이 닥터는 서로 다른 것이다.


미국 유명 시트콤 <프렌즈>


  Ph.D.라는 단어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Ph.D.는 대학에서 줄 수 있는 학위 중 가장 높은 것으로, 기존에 인류가 가지고 있던 지적 경계선을 한 단계 확장시키는 데에 공로가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학위이다. 학위 이름이 Ph.D.(Doctor of Philosophy)이지만, 이는 철학과에서만 주는 학위인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는 전통적으로 신학, 법학, 의학 등의 분야를 제외한 대부분의 학과를 'Philosophy'라고 지칭하였기 때문에 학위 이름이 Ph.D.가 된 것이다.

  학위 이름에 'Philosophy'가 들어갔다는 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유머를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여러 학과의 교수들이 모인 학회를 상상해보자. 이때 학회 사회자가 “여기 경제학 전공자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대여섯 명의 교수가 손을 든다. 사회자가 다시 “여기 물리학 전공자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한두 명의 교수가 손을 든다. 사회자가 마지막으로 “여기 철학 전공자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이번에는 학회장 안에 있는 교수 전원이 손을 든다. 교수들은 일제히 “제게는 Ph.D.학위가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듣고 철학과 교수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얼굴이 벌게져서 다른 교수들을 향해 화를 내며 소리친다.

  “다들 손 내리세요! 그 철학과 이 철학은 서로 다르잖소!”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로부터 철학이 중요하다는 말을 계속해서 들어왔다. 삶을 풍요롭게 살려면 철학 공부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며 자라난 청년들은 대학교에서 플라톤, 칸트, 헤겔, 맹자, 한비자, 주자 등을 공부한다. 고단한 삶을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해 줄 인생의 지혜가 이들 철학자의 글에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철학책을 읽는다.

  그런데 어른들이 강조하는 그 '철학'과 대학에서 공부하는 이 '철학'은 서로 같은 것일까? 어른들이 강조하는 철학은 아마 ‘인생철학’을 뜻하는 것일 것이다. 삶을 허투루 살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인생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어른들이 철학을 강조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철학과에서 배우는 철학은 소위 ‘강단(講壇)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제도권 내에 존재하는 학문의 일종이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처럼, 스님의 설법을 들을 때처럼,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고 가슴 따뜻해지는 인생의 교훈은 강단철학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때의 철학은 경제, 사회, 물리, 화학 등 여타의 학문과 크게 다를 것 없다.

  강단철학을 배우지 않아도 인생의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강단철학을 열심히 배워도 자신만의 인생철학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생철학과 강단철학은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비행기 안에 닥터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는 영문학과 박사가 “제가 닥터입니다!”라고 손을 드는 것이 이상한만큼, “인생철학이 중요하다!”라는 어른의 말을 듣고는 청년들이 강단철학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 역시 이상한 것이 아닐까? 그 철학과 이 철학은 확실히 서로 달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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