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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Jul 18. 2022

16. Deus Ex Machina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San Bol에서 Convento de San Anton까지 약 10km. 이후 Castrojeriz 왕복 8km. 총 18km.


텐트에서 자는 동안, 산티아고는 종종 잠자리를 바꾸면서도 더 이상 낑낑대지는 않았다. 밤 중에 한 번 혹시 오줌이 마렵지 않을까 텐트 밖으로 내보냈는데, 내 의도를 알아챈 건지 멀리서 볼일을 보고 다시 텐트로 들어오기도 했다. 어느덧 새벽이 찾아왔고, 순례자는 늘 그렇듯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오늘은 약 10km를 걸어가면 보이는 숙소에서 머물 예정이다. 내가 가장 가까운 숙소에 머물기 때문에 강아지 산티아고를 맡아 해결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며칠을 함께 지냈던 이탈리아 친구들과, 그리고 나은과 인사를 나눈다. 그들은 더 멀리 갈 예정이기에 길에서 마주칠 수도 있겠지만, 공식적으로 같이 숙소를 쓰는 건 마지막이다. 나은과는 다시 마주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이탈리아 친구들은 매일 최소 20km 이상 걷기 때문에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 같다. 이것도 확실하지는 않다. 그냥 고민할 필요 없이 순례길이 이끄는 대로 걷는 게 순례자의 일과다. 천으로 된 작은 봉투에 강아지 산티아고를 담아 안고 길을 나선다. 오늘의 짧은 순례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갈 작은 동행이 있다. 마도 이번엔 그와 걸음 속도도 맞춰야 할 것이다.





세상엔 어떤 신비를 경험하고 그것을 증거하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 분명 과학과 논리로는 설명될 수 없는 마법 같은 일이 존재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나는 그들을 비난하거나 경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투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모든 신비를 잃어 내동댕이 쳐진 채 길 위에 올랐는데, 그들은 그렇게 자신이 추구하는 신비에 중독된 채 울고 웃으며 살아갈 수 있다니. 수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요구하고 파헤치지만, 사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이 무엇을 진실이라 믿고, 그 최면에서 벗어나지 않게 방어 기제를 만들어 놓는 지다. 초에 어니스트 베커의 <죽음의 부정>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자기가 인식하는 세계에 대한 불신과 부정은 죽음과 같다. 각자가 믿는 진실이 다르기 때문에 수많은 오해와 갈등들이 생기고 있지만, 자신의 세계를 부정하는 것보다 그 편이 낫지 않겠는가?



순례자 숙소(Albergue Convento de San Anton), 교회 폐허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에 인터넷은 커녕 전기도 없다.


순례자 숙소에 도착했을 때, 한 자원봉사자 분이 나를 맞아주셨다. 아쉽게도 그녀는 영어가 유창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통역 어플을 사용해가며 소통을 해보지만, 강아지를 어떻게 하라는 건지 감이 안 온다. 그렇게 난감하던 차에 나보다 조금 뒤에 출발했던 이탈리아 친구 레오가 보인다. 그와 함께 얘기를 들어보니, 여기서 약 4km 떨어진 도시 Castrojeriz로 가서 시청이나 경찰서에 문의해보라고 한다. 나는 짐을 내려두고 편한 몸으로 도시를 향해 더 걷기 시작했다. 시청 앞에 도착하니 다른 친구 마티야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도착하자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청사 문을 열고 들어간다. 잠시 뒤 우리는 무사하게 산티아고를 맡길 수 있었다. 그 아이가 이 도시에 남아 자라게 될지, 다른 지방에 있는 유기견 보호소로 가게 될지 아직은 모르겠다. 몇 년 뒤에 순례길을 다시 밟을 일이 생긴다면, 그때 알 수 있으리라.


시청 직원에게 무사이 인계된 산티아고


때문에 사람은 믿음 없이 살아갈 수 없다. 그게 영혼에 대한 믿음이건, 관계에 대한 믿음이건, 사랑이나 종교에 대해서건, 무엇이라도 과학적,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무언가를 믿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오늘 하루가 어제보다는 조금 나을 거라는 믿음 없이 어떻게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 당신이 방금 전 가족과 만났거나 통화를 했다고 해서 지금도 가족이 무사할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 만남 이후 10초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군대 훈련소에 입소한 첫날밤에 한 훈련병이 급하게 자리를 비웠다. 자신을 훈련소까지 데려다준 가족이 귀가하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무사할 거라는 믿음이 산산이 깨진 순간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무사할 '통계적 확률'이 높을 뿐 그게 논리적으로 무사함을 증명할 순 없다.


그렇다면 매 초마다 가족의 안위를 걱정해야 할까? 그런 삶은 일상생활이 가능할까?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이 불안해서 어떻게 눈앞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어떤 의심이나 정보들을 뒤로 미루고 더 중요한 정보들에 집중해야 한다. 눈앞에 일들을 제외한 나머지가 (어느 정도는) 잘 흘러갈 거라는 최소한의 믿음 없이는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고, 그런 삶은 얼마 가지 않아 스트레스로 심장마비가 올지도 모른다. 우리 문명만 봐도 그렇다. 여기저기 철판으로 때운 배 마냥 언제 가라앉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는 학교에 가고, 출근을 하지 않나? 그렇기 문에, 사람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아무런 믿음이 없다면 문자 그대로 살아있을 수 없다.

 



내가 머무는 숙소는 방금 다녀온 도시에서 멀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순례자들은 거쳐가는 곳으로 생각하지 머무르지 않는다.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침실에서 편하게 낮잠을 잔다. 느지막이 잠에서 깨 부엌에 있는 몇 가지 재료로 점심을 준비한다. 자원봉사자 분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문 밖을 보니 새로운 순례자가 도착해있다. 맙소사, 그는 며칠 전 나와 갈라졌었던 나이 지긋한 독일인, 마르틴이다. 내가 속도를 늦춘 만큼 다시 마주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탈리아 친구들과 찢어진 당일 그를 다시 볼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는 10년 전에 이 숙소에서 머문 적이 있다며, 어떻게든 다시 묵으려 오늘 30km가 넘는 행군을 했다. 요즘 스페인은 최고 온도가 39도, 40도에 달하는 날의 연속이고 그가 오후 3시쯤 도착했다는 걸 고려하면, 절대 쉽지 않은 길이었을 것이다. 나는 혼자 먹으려고 만들던 점심을 2인분으로 늘린 뒤 그와 미뤄두었던 대화를 이어간다.


타이밍이 맞았는지 이 날 성당 폐허에서는 작은 음악 콘서트가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이 기적을 증거하고 희망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나도 내 하루를 어떻게든 버티면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x ex machina)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까? 이미 버려진 신비들을 제쳐두고, 반론될 수 없는 새로운 신비를 찾아서 그 안에 나를 가두고 살아야 할까?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마치 내 삶을 타자에게 맡기는 기분이라 영 내키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런 신비가 없더라도, 삶은 이어나갈 가치가 있다는 증거를 찾아야 할까? 차라리 이 편이 나에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지만 도무지 자신이 없다. 어떻게 일개 인간이 희망 없이 삶을 버티란 말인가? 매 순간 찾아오는 공허감에 어떻게 맞서란 말인가? 정말 사람은 자발적으로 무언가에라도 미치거나, 삶의 허무에 미쳐버리거나 둘 중 하나 밖에 없는 걸까?


나도 신의 개입을 갈망했던 적이 있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은 순례길에서 벌어지는 모든 기적 같은 일들 또한 신의 개입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에세이의 끝이, 결국 신비는 존재한다!, 라는 식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순례길을 걸으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순례길을 걷는 이유에 대해 말을 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그래도 신비는 존재해! 난 알아!'라고 대답한다. 독일인 친구 옐토는 내게 '네가 순례길을 통해 더 눈을 떴으면 좋겠어'라고 원하지도 않았던 충고를 한다. 얼마나 오만한가? 어떻게 자신이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는가? 나는 그가 자신의 무언가를 믿는 것을 비판하지 않았다. 그들의 신비가 거짓이라고 울부짖지도 않는다. 하지만 세상 어딘가엔 신비로부터 박탈당한 사람들이 있다. 저 오만하고 무지한 이들은 그런 사람들 앞에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증거 할 수 없으면서 '난 경험했고, 느꼈고, 때문에 알아!'라고 말하는 건 그저 자신의 말이 옳고, 서로 소통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역시 우리는 너무나도 각자의 세상을 산다. 차라리 나는 내 에세이가, 세상에 그런 신비들이 다 거짓이고 인간은 초라하고 무력하고 불결하지만 믿음이나 희망 없이도 살아갈 이유가 있다고, 신비에게서 버림받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결말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더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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