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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Jul 18. 2022

17. 살다와 존재하다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17일 : Convento de San Anton에서 Puente Fitero까지 약 12km, 이후 Boadilla del Camino까지 약 10km, 총 22km.

오랜만에 개운한 정신으로 잠에서 깬다. 전날 저녁에 곁들인 레드 와인과 열 명이 넘게 머물 수 있는 방에 단 세 명뿐인 덕분이다. 조금 더 기다리면 숙소에서 아침도 준비해줄 테지만, 길을 일찍 나서는 마르틴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어제 산티아고를 맡기기 위해 들렀던 Castrojeriz에 다시 도착해서 같이 아침을 먹는다. 행선지는 각자 다르다. 나는 이 도시에서 오전을 보내며 일을 마친 뒤 출발하고, 그는 아침만 먹고 바로 떠날 예정이다. 어제 갑작스레 마주했던 것처럼, 또 언젠가 어디에서 만나겠지 하며 서로 인사를 나눈다. 만남은 기약하지 않았기 때문에 즐거운 법이다.



내가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는 죽지 못해 산다, 좋아하는 말 중에 하나는 앓느니 죽지, 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두려움에 끌려다니면서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다. 비록 두려움은 가장 원초적이고 강력한 행동 동기이지만, 거기에 잡아먹힌 삶은 방향성이 없다. 책상 위에 자석을 하나 올려두고, 다른 자석을 잡고 책상 위 자석을 밀어내 보라, 자석은 정해진 방향 없이 이쪽저쪽으로 밀려난다. 그런 삶은 끝없이 도망치면서도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저 환경과 상황에 밀려다니기만 하는 삶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어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존재한다는 것은 뭘까? 나에게 들이닥치는 모든 상황에 반대하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나?

  

물론 무언가 반대할 때 사용하는 le mais(그러나)는 소통에 있어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강력한 단어이다. 나는 당신과 생각이 다르다, 당신과 다른 개체(존재)이기 때문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한국 문화는 집단주의가 기반이기 때문에 집단 혹은 타인과 다른 의견을 가진다는 건 상대에게 동조해주지 못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진다. 생각의 다름이나 의견의 결함을 짚기 위해 던진 말이, 사람에 대한 결함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프랑스에서 (뿐만 아니라 서구 문명의 기반이기도 하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 중 하나를 꼽으라면 mais일 것이다. 서로 생각이 다름에도, '너는 그렇구나, 그것도 일리가 있네' 이러면서 대화가 이어진다. 그렇게 서로가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한다.


하지만 반대할 줄 안다고 해서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순서가 어긋났다. 타인과 다른 자신의 고유한 생각이 있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을 때 이의를 제기하는 게 옳지, 일단 무조건 반대하고 보자는 마인드는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함이 아닌, 상대방이 틀렸음을 지적하려고 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타인의 의견에 그저 동조하거나 그저 반대만 하는 경우가 있다. 자신만의 고유성이 없을 때 (혹은 표현하기 두려울 때) 그런 행동을 하는데, 이는 첫째로 인정 욕구가 주요한 동기일 뿐이고 (반대를 하는 경우에도 관심을 받고 싶다는 욕구가 내포되어 있다. 좋아하는 여자애를 괴롭히는 애들을 보라) 둘째로 타인을 존중할 줄 모르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에 무조건 동의를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존중하는 게 아니다. 그 사람에게 복종하는 거다. 자기 스스로 자기 존재성을 포기하는 행위일 뿐이다. 사실 쟁점은 동의하느냐 반대하느냐가 아니라 어떠한 환경, 상황, 대화에서든 어느 정도 자신의 고유성을 유지할 수 있느냐이다.  





일을 마치고 정오가 가까이 되어서야 길을 나선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순레 거리를 10km대로 유지할 계획이다. 성큼성큼 나가기엔 생각이 충분히 정리되지 않았다. 아침에 떠난 마르틴을 포함해서, 나와 만났던 사람들은 이미 언덕을 넘어 다음 마을로, 또 그다음 마을로 더 앞서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경쟁하려고 길에 오르지 않았기에, 앞서 걷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응원이 된다. 언덕을 넘어가다가 나에게 우쿨렐레를 가르쳐준 독일인 친구를 다시 만난다. 이번에는 잊지 않고 그의 이름을 물어본다. 옐토(Jelto)라고 소개한 그는 언덕 위 쉼터에서 한 시간을 넘게 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노래를 한 곡 듣고, 나는 보답으로 초콜릿 몇 조각을 건네준다. 순례길 위에서 누군가와 얘기를 하면서 걸으면 시간이 금방 간다. (다만 대화를 하면서도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에 더 피곤해진다.) 오늘 묵으려는 숙소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이미 이 숙소는 만원이었다. 계획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물론 언급했듯, 우리는 모두 각자의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존재성의 유무를 결정짓는 건, 자기 자신이 자신의 고유성을 응원하고 지키려는지 아닌지의 차이다. (아무리 허점 투성이더라도) 의견을 꺼내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편을 들 줄 모른다는 말과 같다. 의견을 꺼냄에 있어서 신중할 필요는 있다. 부족하기에 겸허한 마음으로 자기의 생각을 표출해야 한다. 그러면 그 생각을 들은 다른 누군가는 문제가 있는 부분을 지적할 테고,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생각이 더 건강하고 튼튼해질 수 있다. 자기 의견을 표현해도 남들에게 공격받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한 시기는 절대 오지 않는다. 그런 비판들을 성장의 밑거름으로 만들 수 있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타인을 존중한다는 (거짓) 이타심으로 자기 입장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 끝에선 내가 타인을 위해 의견을 굽힌 만큼 타인도 나에게 굽혀주는 삶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아무도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는 삶을 가지게 된다. 그건 존재하지 않는 삶과 마찬가지다.


존재하기 위해 마치 남들과 다른 길을 걸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남들과 달리 더 독특하고, 별나게 사는 게 존재의 이유인 것처럼 우쭐대는 사람들이다. 내가 디자인과 인문을 좋아하는 만큼, 창의적 사고에 대해서도 다룰 일이 있을 테니 그 부분을 너무 파고들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남들과 다르다고 고유성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고유성을 파고들 때 남들과 다른 부분들이 드러나는 것이다. 단순히 '다름'만 쫒은 사람들의 삶은 불안감 투성이다. 마치 10초마다 한 번씩 인스타 피드를 새로고침 하듯 새로운 트렌드를 찾아서 빨리 자신의 것인 양 치장하고 싶어 한다. 처음 예시를 들었던 튀어 다니는 자석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삶의 중심이 없다. 중심이 없는 물체는 무게가 없다. 무게가 없는 물질은 중력이 없다. 중력 없이는 절대로 다른 물체를 끌어당길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남들과 같은 길, 고리타분한 삶을 산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순례자 숙소에 묵묵히 남아 지켜주는 사람들이 없다면, 순례자도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그들은 숙소를 관리하며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낼지 모르겠지만, 순례자들은 매번 다른 분위기의 숙소를 경험하게 된다. 어떤 숙소를 가더라도, 그들의 고유성이 숙소라는 공간과 그들이 순례자를 대하는 분위기에서 느껴진다. 고리타분한지 매번 새로운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자신의 고유성을 양보하지 않고, 그것과 알맞은 삶을 살아가는지 또 그래서 보람을 느끼는지가 존재하기 위한 본질이 아닐까? 그게 일치하는 삶이라면 아무리 지루한 일 (예를 들어 공무원) 일지라도 그 영향력과 중요성을 인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한 번은 더 웃어줄 수 있는, 존재하는 삶을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숙소에서 나와 근처 마을로 갔지만, 전반적인 분위기가 별로 마음 안 든다. Castrojeriz에서 사둔 먹거리들로 내일까지 문제가 없을 테니 차라리 오늘은 야영을 할까 고민한다. 아직 오후 수업이 하나 남았기에 급할 필요는 없었다. 바에서 얼음이 들어간 콜라를 마시면서 다른 순례자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수업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인적이 드문 쉼터를 찾아 벤치에 앉는다. 며칠 전에 데이터가 터지지 않아 꽤나 애먹었기 때문에 상태를 확인한다. 문제없다. 그렇게 수업을 시작하고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수업이 취소되었다. 스페인에 온 지 곧 3주가 되는데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이번 돌발 상황의 원인은 폭염이었다. 기온이 너무 높아서 그늘 아래에 있었음에도 태블릿이 견디지 못한다. 정상적으로 수업을 마쳤다면 편하게 쉬면서 조금 시원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야영할 곳을 찾으러 갈 텐데, 너무 어이가 없는 나는 그대로 길을 나선다. 이 폭염에 길을 나서는 게 제정신인가 의구심이 들 수 있겠지만, 그랬다면 순례길에 오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 시간을 걸어서 텐트를 칠만한 숲을 찾았다. 날씨 어플에는 39도가 찍혀있다. 처음에는 잠깐 쉬어갈 생각으로 주저앉았지만, 이거 다시 일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가만히 앉아있으니 벌레들이 꼬인다. 힘을 내서 방충망 대신 텐트를 친다. 잠깐이나마 벌레 없는 편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이대로 여기서 잘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기지개를 켜보지만, 그 순간 얼마 남지 않은 물통이 눈에 들어온다. 분명히 저번의 실수를 발판 삼아 여분의 물을 사 왔지만, 이 정도의 더위라는 변수는 생각지 못했다. 조금 나아졌다 싶으면 생각지 못한 문제가 터지기 일쑤다. 눈물을 머금고 (사실 흘릴만한 남은 수분도 없다) 텐트를 정리한다. 10km만 걷자던 아침의 나는 어디 갔는가?




누군가는, 그런 고유성의 추구가 타인을 존중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게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고유성을 키우고 가꾸다 보면, 자신의 고유성이 중요한 만큼, 타인의 것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온전히 건강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응원할 수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또한 내가 굳이 내 입장을 고집하지 않아도 고유성이 흔들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내 고유성과 일치하지 않아도, 나와 함께 있는 타인의 고유성이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양보하게 되는 상황도 있다. 단순히 남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복종하는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 늘 그렇듯, 건강한 이기심은 건강한 이타심을 낳는다. 존재를 고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존재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고, 그저 살기에 바쁜 사람들은 존재하려고 싹 틔우는 사람들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결국 그날 저녁은 다음 마을까지 내려와 순례자 쉼터에서 비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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