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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Jul 19. 2022

18. 행복 중독, 그 안쓰러움에 관해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18일 : Boadilla del Camino부터 Villacawar de Sirga까지 약 24km

".... 순례자인가 봐." 마지막에 들린 또렷한 한국말에 잠에서 깬다.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뒤를 보니 멀리서 세 사람이 지나간다. 잠결이라 확실하진 않지만, 쉼터에서 노숙(비박)을 하는 나를 발견한 저 사람들은 한국인으로 추정된다. 시계를 확인하고 침낭을 정리한다. 한 시간 반만 걸으면 도시 Fromista에 도착할 수 있다. 물론 더 걸을 체력은 있지만, 어제 많이 걸은 게 억울해서라도 도시에서 쉬자고 다짐한다. 외투들도 한 번 빨아줄 때가 되었다. 세탁기가 있는 괜찮은 숙소를 잡아야 한다. 내가 잠을 잔 순례자 쉼터는 마을 입구에 있기에, 가방을 메고 안으로 들어간다. 중앙 광장에 도착하니 아까 날 지나친 한국 분들이 쉬고 있다. 한국 사람을 오랜만에 본다며 날 반겨주고는 오늘 어디서 출발한 건지 묻는다. "아까 마을 입구에서 발견하신 노숙자가 바로 저예요." 나는 가방 안에서 찌그러진 샌드위치를 꺼내며 답한다.


순례자길을 따라 Fromista를 들어갈 때 볼 수 있는 수로




신비를 부수고 인간성을 부정하고. 나의 글들 때문에 '너는 행복한 순간이 없었냐'고 묻고 동정해도 괜찮다. 나는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 이 순례길 위에서도 행복한 순간들을 많이 느끼고 또 즐기고 있다. 내가 힘들어하던 시기에도 한 사람은, 견디면 반드시 행복한 시기가 올 테니 자기 말을 믿고 오늘 하루도 잘 보내라고 내게 말해주었다. 그 사람의 목소리는 정말 따뜻하고, 말투는 정말 오목해서 나를 포근하게 만들어 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도 행복한 시기가 올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내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그 사람의 진심 어린 위로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정말로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나는, 행복의 정체를 알고 있다.


오래전부터 빛은 희망과 행복의 상징이었다. 마치 궁극의 질문에 대한 답이 42인 것처럼, 행복의 정체는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지닌 광자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초기 인류가 현대 인류보다 시력이 더 좋았겠지만, 그 당시의 밤은 매일이 죽음의 위협이었다. 지금보다 더 찬란했을 달과 별의 은총도 먹이를 노리는 야행성 동물들을 막아주진 못했다. 사냥당하던 밤에도, 무사히 지나간 밤에도 늘 해가 뜨기만을 기다렸으리라. 그렇게 동이 틀 무렵이 다가오면 해가 언제 고개를 내미는지 기다렸을 테고, 해가 완전히 나와 자신들을 비춰주면 그 온기가 너무 반가워서 행복에 겨웠으리라. 또한 맹수와 싸워 이겼을 때, 오늘을 날 수 있는 충분한 식량을 구했을 때, 처음 보는 과일을 먹고 살아남았을 때, 그 숨 쉴 수 있음이 (생체 기계로써 소임을 계속할 수 있음이) 행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밤이 오지 않으면, 아침도 올 일이 없다.




Fromista에 도착하여 잠시 동행했던 한국인 분들과 작별한다. 시계를 보니 이제 막 오전 7시가 넘었다. 어떤 순례자들은 잠에서 깨 하루를 시작하지도 않았을 시간에 내 순례가 끝났다. 도시 중심부로 가니 출발 전 아침을 먹는 순례자들이 보인다. 나는 왠지 모를 승리감에 벤치에 앉아 크게 기지개를 켠다. 체크인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잠시 쉬다가 근처 카페나 바에 가서 아침을 먹은 뒤 글을 쓰든, 잠을 자든 한껏 여유를 부릴 수 있으리라.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 인사한다. 처음 만나는 독일인 순례자가 이제 출발하는 거냐고 묻는다. 오늘 몸 상태가 안 좋아서 다음 목적지까지 택시를 탈 생각인데, 동행을 구하는 중이라고 한다. 오늘은 이미 다 걸었고 도로 맞은편에 보이는 저 숙소에서 묵을 예정이라고 자신 있게 답한다. 그녀는 내게, 저 숙소는 며칠 전부터 계속 문을 닫은 상태라고 말한다. 정말이지 계획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행복 중독에라도 걸린 것처럼 쥐 잡듯 행복을 끌어내거나,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서 산다. 하루라도 행복이 없으면 어떻게든 만들어내려는 금단 증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불행하거나 힘들고 슬픈 삶을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두려움에 빠져서는, 불행에서 도망치듯 사는 건지 정말 행복을 추구하는 건지조차 구분이 안 간다. SNS에 자신의 행복한 모습들을 주야장천 올려놓곤, 조금이라도 불안이 찾아오면 그 사진들을 보면서 괜찮다, 괜찮다, 자기 최면을 건다. 영국 자선 단체 CALM은 런던 사우스 뱅크에서 여러 사람들이 행복하게 웃는 모습이 담긴 사진전을 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스스로의 결정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마지막 사진들이었다. 나는 그 고인들의 사정을 알알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행복 중독에 빠져있었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다만, 갑작스레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요인은 '행복하지 않음'이 아니라 살면서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는 불안과 불행에 대한 취약함이 아닌가 고민하게 된다.


행복의 정체는 빛이다. 새벽 일찍 순례길을 시작하면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길 아래로 내 그림자가 보인다. 주변에 빛이 하나도 없는데 왜?라는 의문을 품고 그림자의 반대쪽을 쳐다보면 달이 우리를 비춘다. 이렇게 깜깜한 밤엔 달빛마저도 감사하게 된다. 달빛마저 들어오지 않는 숲길을 걸을 땐 헤드 랜턴(인공조명)이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달이 어느 정도 길을 밝혀주는 곳에서 답답하다고 랜턴을 켜버리면 눈은 랜턴의 밝기에 적응해서, 랜턴이 비추지 않는 곳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이미 더 강한 빛이 있기에 우린 더 이상 달빛에 감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랜턴에게 감사 인사를 하지도 않는다. 그 빛은 내가 만들어낸, 의도된 빛이기 때문이다. 해가 뜨기 시작하면 달빛은 점점 힘을 잃는다. 사실 달빛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햇빛이 강해서 묻히는 것이다. 낮에도 하늘에 달이 있다면, 그 달은 우리를 비추고 있다. 느끼지 못하는 건 우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밤은 찾아온다.




가려고 했던 숙소는 영업을 안 하고, 시계는 아직도 숫자 7의 언저리에서 시침을 흔들고 있다. 김이 다 빠져서 같은 도시에 있는 다른 숙소가 아닌, 더 걸어가서 나오는 다른 마을들의 순례자 숙소를 뒤져본다. 고작 10km만 더 걸으면 (이젠 이런 거리는 우습다) 굉장히 목가적인 숙소가 나오고, 입실 시간도 오전 10시로 적혀있다. 너무 기쁜 마음에 확인차 전화를 해보지만 오류라는 답을 받았다. 가능하면 저녁은 식재료를 구해서 요리를 하고 싶지만 하필 일요일이라 많은 마트들이 문을 열지 않는다. 그나마 일요일에도 여는 마트가 있는 마을을 찾아보니 아뿔싸, 그곳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 가려고 했던 곳이다. 역시 계획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순례자는 푸념하며 다시 길에 오른다.





마치 낮에 뜨는 달의 비춤을 느끼지 못하듯 사람은 현재 느끼고 있는 쾌락에 적응하는 성질이 있어서, 행복한 상황에도 어느새 적응해 더 행복한 자극을 찾으려고 한다. 반대로 불행한 상황에 빠져서 시간이 지나면 그 상황이 덜 불행해지고,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기준치가 된다. 한 번 불행에 빠지면, 불행에 빠지기 전의 지루했던 일상도 행복했던 시절로 바뀐다. 그리고 우리가 행복해졌다 해도, 다시 밤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언젠가 행복한 시기가 올 것이란 말은, 언젠가 불행한 시기도 찾아온다는 말과 같다. 행복과 불행은 죽음에 다다르기 전까지 파동 함수처럼 반복된다. 그러니 불행을 두려워해선 안된다. 행복하지 않은 상태는 비정상이 아니다. 눈을 감고 잠을 자며 애써 어둠에서 도망쳐도 밤은 찾아온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은 한밤중에 잠에서 깬다. 그때 목 조르듯 사무칠 어둠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어둠 속을 걸을 줄 알아야, 달빛을 느끼고 달그림자를 볼 수 있다. 행복만 쫓아 태양에 더 가까이 가려는 사람은 결국 이카루스처럼 땅으로 추락하고, 두 눈을 잃어 남은 평생을 어둠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인공조명은 스스로 만들어낸 인공 행복이다. 빛이 들어오지 못하는 어두운 숲에선 랜턴이 필요하듯, 인공 행복 덕분에 정말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겠지만, 그런 행복은 자신에게 우연히 떨어진 기적이 아니라 억지로 짜여내진 행복이라는 점을 자기 자신은 (적어도 무의식은) 인지하고 있다. 당연히 그런 인공 행복의 가치는 낮을 수밖에 없다. 행복하려고 애쓰지 말고, 찾아온 행복에 열렬해야 한다. 만들어진 행복은 가짜라는 것을, 불현듯이 찾아오는 행복들을 느끼기 위해선 밤에도 맨 눈으로 걸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결국 행복 중독에 빠진 사람들의 행동 동기는 밤에 잠에서 깨 길을 나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을, 길은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행복에 매달릴 필요가 없기,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되진 못할 것 같다. 순례자는 다시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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