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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Jul 20. 2022

19. 존재의 고통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19일 : Villalcazar de Sirga에서 Ledigos까지 약 30km

오늘 걸어야 할 구간 중간에는 약 18km 거리의,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가 나온다. 오래 걷는데 필요한 물이나 당분을 미리 챙겨둬야 할뿐더러, 폭염이 있기에 태양이 땅을 충분히 달구기 전에 통과해야 한다. 미리 맞춰 둔 알람으로 3시 20분에 침대에서 나온다. 순례길을 시작한 뒤로 가장 빨리 일어난 날이다. 순례자는 인스턴트커피와 레토르트 식품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급히 길에 올라선다. 밤하늘을 올려본다. 카시오페아 자리는 보이지만, 이상하게 북두칠성이 보이지 않는다. 아직 달이 너무 밝아서 그런가, 그믐이 되면 특별한 이유가 없더라도 꼭 새벽길에 오르자고 다짐한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순례자들이 많은지 꼭두새벽치곤 거리가 부산하다. 장난기가 많은 나는 평소처럼 헤드 라이트를 꺼내지도 않은 채, 발소리를 죽이고 속도를 올린다.





행복을 열망하지 않는다는 말과 부정적으로 행동한다는 동의어가 아니다. 종종 나처럼 신비를 믿지 않는다고, 인생은 어차피 무의미하다고 말하면서 교양 없이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곤 하는데, 인생의 허무함을 떠들어대면사실 허무를 수용하지 못한, 마치 마트에서 장난감을 사달라고 울며불며 떼쓰는 아이들 같은 행동일 뿐이다. 삶에 아무런 가치와 없다는 말과, 그러니 맘대로 행동할 것이다는 논리적 귀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들의 그런 행동조차 자신의 기분을 이해하고 공감해달라고 투정 부리는 유아기적 인정 욕구가 동기이며, 그런 유기체가 무슨 무의미를 논하자는 건지 웃기지도 않다. 의 무의미성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태도는, 침묵이 아닐까.


세상이 너무 아프다. 순례길에 오르기 전까지 매일같이 되뇌던 말이다. 신비나 행복, 희망이라는 단어 없이 살아 숨 쉬니 매 순간이 고통이다. 살아있음은 내게 아무런 온도가 없는 말이다.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이 태어나고 사라지는데, 나 하나 숫자를 줄여봐야 무슨 차이가 있을까. 나의 가족과 친구들이 많이 아파하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잊히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 세상을 떠난다. 주변 사람을 생각하며 내 삶을 견디자니, 공허한 메아리 매 순간 귀를 찢을 듯 울려대는데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나는 한순간이라도 좋으니 늘 존재하고 싶었다. 이 시간 동안 몇 번이나 죽음을 떠올렸고, 그럴 때마다 죽어도 좋지만 당장 말고 순례길에서 결판을 내자고 미루는 날의 연속이었다. 또한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 충동적인 자살 기도는 반드시 실패로 돌아갈 것이고 이후 더 골치 아픈 일만 늘게 뻔하다. 나는 내 죽음마저 변수가 발생하지 않도록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그러니 순례길에서 결론을 내자. 그렇게 길을 올랐다.





많은 순례자들의 입에 마의 구간이라고 오르내리던 18km는 생각보다 싱겁게 끝이 났다. 오전  6시쯤 그 코스에 진입해, 해가 채 열기를 뿜기도 전에 끝났다. 물을 두 병이나 챙겼는데, 한 병은 아얘 꺼내지도 않았다. 9시 정각 알림을 확인하고 마을 입구에 위치한 카페테라스에 앉아 빵과 커피를 주문한다. 이전에 이탈리아 친구들과 다 같이 마지막 밤을 보내기 위한 숙소까지 가는 길이 차라리 훨씬 힘들었다. 빵을 오물오물 씹으며 왜 그런 건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답은 쉽게 나왔다. 이미 힘든 구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이다. San Bol에 갈 당시엔 아무도 힘든 구간이라는 말을 안 했고, 이쯤 가면 숙소가 곧 나오겠지,라고 쉽게 생각했었다. 그러니 많이 긴장할 필요가 없었고, 그게 그대로 체력 소모로 이어진 것이다. 이미 힘든 구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우리가 그 코스를 대하는 태도부터 달라진다. 에너지바와 물을 충분히 챙기고, 전날 미리 충분한 휴식을 취한다. 길을 걸으면서도 긴장을 놓지 않고 체력이 유지되도록 페이스 조절을 한다. 잘 대비가 되어 있다면 힘든 일도 쉽게 넘길 수 있고, 대비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쉬운 일도 그르치기 마련이다.




살아감은 고통의 연속이다. 삶은 고통의 바다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들이 제일 먼저 소리쳤고 지금 이 순간에도 터져 나오는 문장이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 고통에 의미가 있을 것이라 믿으며 견뎌내려 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미는 신비를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부여하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테니까. 아픔을 견뎌온 노력이 모두 개 짓거리라는데 어떻게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겠는가? 사람을 찬양하는 모든 문장들은, 인간이 문명을 이룩하고 여기까지 온 근간이 그저 모든 생물들이 가지고 있는 생존 본능의 찌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항상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쓴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인간성은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당신의 존재 처절하게 경박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사족들을 다시 없애고 사실만을 말하자면, 삶은 고통의 연속이 맞다. 당신은 불합리한 일들을 앞으로도 더 경험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고를 당하거나 죽을 것이다. 열심히 삶을 일구려는 사람들이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그 불합리의 끝은 당신 자신의 죽음이다.


삶이 고통뿐이라는 사실을 처음 깨닫는 순간, 정신적 충격은 어마어마하다. 자신이 의미 있다 여기며 쌓아온 모든 삶의 흔적들이 송두리째 무너지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교양 없는 사람들처럼, 여기저기 화를 내고 일을 망치고 다니게 될 수도 있다. 그 시기를 어떻게 해야 잘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 사실을 겨우내 받아들이고 통증이 조금 줄어들면 (절대 사라지진 않는다) 당신은 적어도 남들보다 한 가지 좋은 일과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이 생긴다. 좋은 일은 그 뒤로 겪게 되는 고통들에 여전히 아파하면서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것을 알지만 그 이유를 모른다면, 또 다른 불안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으면, 아무것도 모를 때보다 더 초연해진다.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은, 이전보다 무엇을 하고자 하는 의욕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어차피 고통뿐이고, 죽음 말고는 벗어날 수 없는데 (쇼펜하우어는 죽음은 벗어나는 방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뭘 한다고 뭐가 달라지긴 할까? 삶이라는 고통의 바다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마을을 두 개 더 지난다. 오늘은 이미 30km를 걸은 셈인데, 필요하다면 아직 더 걸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내 에세이의 속도를 걷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멈추기로 한다. 체력을 회복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하루다. 숙소에 들어가서 재정비를 할 필요도 없으니, 카페에서 낮을 보내도록 한다. 저녁이 다가오면 근처에서 야영장을 찾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자. 이상하게도 숙소에서 쉬는 날이면 뭔가 신경 쓸게 많고 자꾸 할 일이 생기는데, 야영을 하기로 마음먹은 날이면 남아도는 게 시간이다. 느긋하게 작업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순례자 생활에 슬슬 익숙해졌는지 카페에서조차 가방과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해두고, 슬리퍼를 신고 앉아있다. 잠깐 만났던 한 한국인은, 야영을 하는 날은 어떻게 씻냐고 물었다. 양치나 세수는 가능하지만 샤워는 못한다고 답하니 놀라는 기색이 역력하다. 나도 한국에서 살다가 순례길로 유럽을 접했더라면 똑같이 반응했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꼭 야영한 다음날은 숙소에 들어간다고 말하며 그를 안심시켰다.

 



쇼펜하우어는 죽음이 존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미 존재하게 된 이상, 죽는다 하여도 부존재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주장에 반대한다. 그와 나는 세상이나 존재라는 단어를 규정하는 방식이 다르다. 아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나는, 당장 죽음 말고는 다른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신비를 믿고, 살아갈 의미를 믿는 사람들이 나와 똑같이 행동해야 한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 그러니 적어도 당신이 당신만의 살아갈 이유가 있고, 그게 존재의 고통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얘기를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 자신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리고 그 주변으로 퍼져나가듯, 불필요한 고통을 줄여나가야 한다. 그게 아니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차라리 더 지옥으로 만들자고 화라도 낼 생각인가?


세상엔 필요하다고 납득할 수 있는 고통들도 존재한다. 더 큰 고통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를테면, 자동차를 몰려면 운전면허가 필요하다는 것이나 (면허증을 따는 게 '고통'의 레벨 일지는 모르겠지만)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피나는 노력으로 훈련에 임하는 것. 하지만 세상엔 안 좋은 선택을 한 사람들로 인해 생기는 불필요한 고통들도 많다. 두 고통들 중에서 무엇이 더 많은지 모르겠지만, 우리를 더 아프게 하는 것은 불합리하고 불필요한 고통일 것이다. 필요한 고통들은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런 불필요한 고통을 조금씩 줄여야 한다. 해결을 짓자는 게 아니다. 대단한 일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잠깐이라도 더 웃을 수 있게 농담이라도 던지고, 지친 사람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주는 그런 것들. 지나가는 강아지 한 번 쓰다듬어보려고 팔을 뻗어 손이라도 흔들어보고, 만나는 이웃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고 좋은 하루 보내라고 말해주는 그런 것들. 우리가 서로를 꼭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사랑이나, 도덕이나, 인간성이나 그런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엔 무의미와 고통뿐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아픔을 서로 달래주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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