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승 Jul 24. 2022

23. 예술가의 기만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23일 : 순례 거리 없음. Leon 시내에서 약 10km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어젯밤에는 기어이 오늘 도착할 예정이었던 대도시 Leon까지 걸어와서, 이미 문을 닫은 순례자 숙소 근처의 교회에서 침낭을 펴고 노숙을 했다. 일정을 맞출 필요는 없지만, 이 도시에 있는 현대 미술관과 중식 뷔페를 벼르고 있었기에 오늘은 더 걷지 않고 도시에 머물기로 한다. 아침마다 짐을 부랴부랴 싸고 몇 시간을 걷는 게 조금 질리기 시작했었는데, 타이밍이 좋다. 오늘 묵을 순례자 숙소는 11시는 되어야 입실이 가능하지만, 숙소 건물 안뜰에 미리 들어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잠시 작업을 하다가 아직 사람들이 북적거리지 않는 거리를 걷는다. 오늘 하루만은 순례자에서 벗어나 관광객으로 지내겠지만, 사색은 멈추지 않는다. 아니, 잘 때 말곤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다.


스페인에선 마트나 약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시설에 시에스타(브레이크 타임)가 있다. 미술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숙소에서 충분히 쉬다가 오후 다섯 시가 가까워질 때쯤 천천히 길을 나선다. 아침에 구경했던 도시와 달리 거리 어디에든 사람들이 있다. 급할 건 아무것도 없기에, 느긋하게 걸음을 옮겨 MUSAC 현대 미술관에 도착한다. 알록달록한 불투명 유리와 투명 유리로 만든 시퀀스에 흥미가 간다. 나는 사람들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자아내는 공간을 좋아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주는 것보다, 어디로 가야 할지 궁금하게 만드는 시퀀스를 가진 게 훨씬 더 뛰어난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미술관이 문을 열기까지 남은 오 분 남짓의 시간 동안 돌아다니며 외관을 즐긴다.


입구는 건물 파사드(Facade)에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고 표지판 하나 없지만, 건물을 구경하며 시선을 옮기다보면 자연스레 입구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언제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소개할 수 있을까? 예술 관련 학위를 땄을 때? 전시를 처음으로 해봤을 때? 작품을 처음으로 팔았을 때? 예술 작업을 자신의 생업으로 정했거나, 생계유지가 될 때? 질문을 바꿔보자. 언제 '대단한' 예술가가 되는 걸까? 100번째 전시를 마쳤을 때? 유명한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작품을 사서 화제가 되면? 일정 금액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을 때? 예술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도 까다로운데, 저 질문들에 사회적 합의를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접어두는 게 좋을 것이다. 다만 몇 가지 확실한 것은, 예술은 전문 분야로 규정지을 수 없다는 것. 예술가는 있어도 예술 전문가는 있어선 안된다는 것. 그리고 예술가는 (적어도) 새로운 것을 표현하는 사람이 아닌, 자기의 세계를 표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개성을 표현하는 시대를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표현하려고 애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들과 다르다고 떠들려고 발악을 한다. 인정 욕구라는 뱀에게 잡아먹히고, 방어 기제라는 독이 든 사과를 씹어대며 타인들과 자기의 다른 점을 찾아내기 위해서 손톱을 물어뜯고 피드 새로고침을 계속 누른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관심이 없다. 개성은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뜻할 텐데 저들이 찾는 개성에 자기 자신은 더 이상 없다. 그저 남들과 다름을 울부짖으며 자신의 고유성엔 눈길도 주지 않는다. 무리 명성이 있고 돈을 많이 벌고 영향력이 있더라도, 들은 화와 관습의 창조자나 개척자가 아니라, 나태한 협잡꾼에 불과하다. 스스로 그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나마 예술가는 아니어도 기술자(technicien)의 위치에 오를 순 있을 것이다.



종종 예술 분야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전시를 같이 보거나, 미술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에 대해 주제가 옮겨질 때가 있다. '나도 저 작가의 그림체처럼 나만의 스타일을 빨리 찾고 싶어!' 그러고는 인터넷에서 다른 작가들의 독특한 스타일들을 찾아 자기도 따라 그려본다. 그걸 보고 있자면, 그저 조용히 쓴웃음만 짓게 된다. 예전에는 내 의견을 피력한 적도 몇 번 있지만, 대개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내 입장을 말하려고 애써봐야, 잘해야 꼰대 아니면 나도 인정 욕구에 찌든 (내 말이 맞지? 같은) 사람이 되어버린다. 늘 그렇듯, 침묵은 꽤나 많은 상황에서 좋은 답이 되어준다.


프랑스 예술 학교(보자르)를 다닌 한국인이라면 꽤나 공감할 이야기가 있다. 부분의 프랑스 학생들은, 자기 스타일에 대해 그렇게 고민하면서 작업하지 않는다. 자기만의 작업 방식을 찾는 것에 그리 열을 올리지 않는다. 그냥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 주제를 다루다 보면 천천히 스타일이 생긴다. 남들보다 먼저 스타일이 잡혔다고 좋아하거나, 늦다고 아쉬워하지도 않는다. 이미 스타일이 정해졌다는 것은 오히려 교수들의 지적 사항이 되는 경우도 많다. 미술관에서 작가들의 드로잉 노트를 보는 몇몇 사람들이 그 작가의 그림체에 감탄하곤 하는데, 정작 그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휘갈겨 본 것일 확률이 높다. 학교에서 그렇게 작업하는 애들이 태반이라, 이젠 보인다. '저 작가도 저 땐 별생각 없었구나.'


그런 식으로, 소위 '싸질러놓은 똥'에 청중들은 박수를 보낸다. (실제로 자신의 변을 통조림 캔에 담아 작품으로 만든 작가 Piero Manzoni도 있다. 가장 최근에 진행된 2016년 경매에선 캔 하나가 약 3억 6400만 원에 거래되었다.) 근현대 미술사에서 배울 수 있는 여러 '주의'사조들은 항상 폭소를 터뜨리게 만든다. '.... 주의' 형식의 미술사조 시초 중 하나인 인상주의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스스로 붙인 이름이 아닌, 대중들이 그들의 작품을 조롱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름이다. 그 뒤로 20세기 초에는 구체 주의니, 미래주의니 이상한 사조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다. 미술사조가 생기기 전 이미 19~20세기는 세계사적으로 이데올로기(이념)이라는 신흥 종교가 퍼지던 시기였다. 거기에서 조롱조로 생긴 인상주의가, 몇 년이 지나서는 그들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니 다른 협잡꾼들도 하나 둘 자기의 작업 스타일을 찾아냈다고 광고를 시작한다. 심지어 미래주의는 뭐라도 된 것처럼 작업물을 보여주기 전에 스타일을 먼저 안내할 심산인지 '미래주의 선언'까지 해버린다.



내가 웃긴 건 그들의 행동이 아니다. 마치 벽에 낙서하듯, 소꿉놀이를 할 때 역할을 정하듯 자기들끼리 시시덕대려고 한 행동일 것이다. 뭇 예술가들이 그렇듯 '그냥 재밌어 보여서' 한 행동일 뿐, 정말 예술의 역사에 위대한 발자국을 남기자는 말에 진지해져서 게거품 물고 달려든 게 아닐 것이다. 그런 예술가들이 없진 않았겠지만, 그런 마인드로 예술을 접하면 십중팔구 실패하고 이름도 못 날린다. 내가 웃음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지금 미술사를 배우면 그때 그 사람들의 행보가 마치 뭐라도 있는 것처럼, 예술의 세계에 새로운 지평이 열린 시기인 것처럼 강조하는 게 너무 웃기다. 예술은 그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 시각적으로 표현할 뿐이다. 그런 본질에 집중한 예술들이 오래도록 남는다.


이른바 예술병에 걸린 사람들은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어떤 발견들이 있고, 어떤 흐름을 따라가는지 통찰할 생각이 전혀 없다. 개성에 시대에 살면서 자기 내면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 그 고유성을 어떻게 갈고닦을지엔 전혀 관심이 없다. 현상은 복잡하나 본질은 단순하다. 매 순간 바뀌는 트렌드는 줄기차게 읊어대면서 그 사이에 숨겨진, 변하지 않는 본질에 대한 호기심이 없다. 그들은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해 공부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다. 그저 빨리 예술가로 인정받기만 욕구한다. 자신의 예술 세계가 어떤지 다른 사람들과 토론을 (가장한 어필을) 하려고 약속을 잡는다. 예술사조가 융성하던 시기의 프랑스는 살롱 문화가 (카페에서 예술가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문화) 유행이었지만, 그 살롱들 안에서 무너지지 않는 고유성을 가진 소수의 예술가들만 이름을 날렸고, 대다수의 나머지는 대중들에게서 잊혔다.


명확하게 하건대, 예술가라고 해서 영감에만 의존하는 건 악이다. 예술을 한다는 이유로, 세상을 더 좋게 만들어가는 다른 분야의 사람들처럼 부지런히 공부하며 살지 않는다면, 그 예술은 게으름을 위한 핑계다. 영감에 의존한다 해도 여러 다감각적, 지적 활동을 통해 뇌가 유연해져 있는 게 아니라면, 창의적 사고는 불가능하다. 예술을 꽃피우는 건 마치 술과 파티인 것 마냥 사는 사람들이 있다. 술 담배를 안 하면 인생의 재미는 어디서 찾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재밌다는 건 인정한다. 나도 좀 자주 마시고 가끔 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바탕을 만들기 위한 기본적인 노력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예술은 절대로 개화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하루하루 치여사는 와중에, 예술은 자유롭다는 핑계로 어설프게 사는 사람들을 예술가 대우해 줄 생각 없다. 그건 그냥 게으름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예술적 가치가 없다.





오로지 예술가들만이 남에게 빌려온 매너와 어물쩍 끼워 맞춘 견해에 질색하며, 이런 비밀, 모두가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있는 떳떳하지 못한 마음, 모든 인간은 유일무이한 불가사의라는 신념을 내보인다. 예술가들은 우리에게 모든 인간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근육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그 자신이며, 홀로 그 자신이라는 것을 용기 있게 알려 주려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철저하고 일관되게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자신이 아름답고, 눈여겨볼 만한 존재임을, 자연의 모든 작품들처럼 새롭고 놀라운 존재임을, 그리고 결코 따분한 존재가 아님을 알려 주려 한다.


위대한 사상가가 사람들을 경멸할 때는 그들의 나태함을 경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처럼 획일적인 모습을 하고, 교류하거나 지식을 나누는 일에 관심도 없을뿐더러 그럴 자격조차 없어 보이는 까닭이 바로 그들의 나태함에 있기 때문이다. 무리에 속하지 않으려거든 편안함에 안주하려는 자신의 성향을 억눌러야 한다. 그리고 "너 자신이 되어라! 지금 너의 행동과 생각과 욕망은 모두 진정한 너 자신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양심의 소리를 따라야 한다.


Kaufmann, W. (1975), pp. 122-123

매거진의 이전글 22. Vanitas Vanitatum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