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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Jul 26. 2022

24. 대단함에 질식당한 사람들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24일 : Leon에서 Villadangos del Paramo까지 약 21km


6시가 되자 순례자는 길을 나선다. 대도시에서 묵었다 보니, 순례를 시작한 사람들이 평소보다 많이 보인다. 숙소에서 나오기 전에 잠도 충분히 잤고, 아침도 영양가 있게 해결했다. 심지어 어제는 거의 걷지도 않았으니, 순례를 시작한 이후 최고의 컨디션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걸음을 늦추는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애매하게 망설일 거 없이 발을 뻗는다. 아직 바람이 찬 새벽임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땀이 나기 시작한다. 오히려 기분이 좋다. 이대로 쉬지 않고 간다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다. 오전이 지나기 전에 수업이 있으니, 시간이 늦어지지 않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보자. 오히려 걷는 속도는 훨씬 빠르니 수업 시작 전에 마을에 도착하지 못하게 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누군가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 목표를 이루는 것을, 마치 그 사람이 원대한 꿈에 다가가 영광의 자리에 앉기 위해, 그 결과로 다른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으며 좋은 평가를 듣기 위해 한 노력의 결과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이 그런 목표를 가질 수 있음에, 그걸 이루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것에, 그것을 결국 실천으로 옮기는 데에 '대단하다'라는 말을 한다. 누군가를 칭찬하기 위한 굉장히 흔하고 당연한 표현이다. 얼마나 우리 문화 깊숙이 박혀있는지, 이 말을 오랫동안 부정해왔던 나도 종종 무의식적으로 나올 때가 있다. 그렇다. 세상에 대단하다는 말은 존재해선 안된다. 말 그대로 대단한 사람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그저, 저마다의 사정으로 짊어진 짐과 책임의 무게를 견디거나, 견디지 못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남들에게 박수받을 정도의 욕심으로 일을 해내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동기가 타인의 평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중은 늘 새로운 자극을 찾고, 세상의 평가는 늘 바뀌기 마련이, 그들은 평가가 시들어진 순간 관심 가지던 것에서 손을 뗄 것이다. 정말 가치 있고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들은 타인의 평가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스스로가 처한 환경에, 앞에 놓인 장애물을 넘기 위해 필요한 생각을 하고, 납득한 철학을 따르며, 고유성의 목소리를 들으며 실천으로 옮긴다. 그런 행동이 필요해서 할 뿐이지, 스스로의 영광을 위함이 아니다. 그저 대단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절대로 그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에 다다를 수 없을 것이다. 





시간 반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20km 넘게 걸었다. 가방을 메고 제대로 걷기도 힘들어했었던 순례길을 시작한 첫째, 둘째 날이 떠오른다.  그때와 비교했을 때 더 많은 거리를 더 빨리, 그리고 더 오래 걸어도 지치지 않는 사실에 뿌듯해진다. 오늘 묵을 순례자 숙소는 아직 열리지 않았다. 건물 앞에 놓여있는 테이블에서 수업을 진행한 뒤 마을을 둘러볼 겸 마트에 간다. 순례길을 지나면서 자주 지나치게 되는 작은 규모의 마을에는 마트가 보통 한 개, 많아야 두 개 정도가 있을뿐더러 편의점 같이 여러 품목이 진열된 게 아닌, 순례자나 마을 주민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들만 배치되어 있다. 비유를 하자면 구멍가게 같다. 이번에 도착한 마을의 마트 또한 규모는 작지만, 그래도 간편하게 조리할 수 있는 냉동식품들이 있다. 내일은 일요일이고, 일요일만 유일하게 수업이 없다. 마음 편하게 오래, 많이 걷고 싶다는 생각에 영양분을 충분히 보충할 수 있는 재료들을 찾아보며 어떤 음식을 만들지 상상해본다.  


숙소에 체크인을 마치고 부엌 상태를 둘러 본다. 마트에 어떤 재료를 팔고, 부엌에서 사용할 수 있는 조리 도구와 남은 재료가 무엇이 있는지 파악해두지 않으면 요리를 할 때 돌발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다. 여기저기 서랍을 뒤져보던 내게 숙소 관리인은 (불을 사용한) 요리는 안된다고 일러준다. 이런, 선택지의 폭이 너무 크게 줄어들어 버린다. 냉장고와 전자레인지는 사용할 수 있지만, 즉석 식품은 이제 그만 먹고 싶다. 다시 마트로 돌아가 재료를 고른다. 오늘 저녁을 거하게 먹진 못할테니, 차라리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 점심까지 먹을 수 있도록 햄버거 빵을 집는다. (한 봉지에 빵 네 개가 들어있다.) 늘 야채와 단백질이 필요한 상황이라, 양배추, 토마토와 양파뿐만아니라 햄으로 부족할테니 두툼한 소시지를 챙긴다. 좋은 재료들을 다 넣으면 그만큼 비싸겠지만, 영양과 맛이 검증된 음식을 내일 낮까지 먹을 수 있다는건 순례길 위에선 일종의 축복과 같다.





업적을 이루기까지 이끌어온 행동 동기가, 처한 환경에 따른 필요와 책임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대단한 일을 해냈다면 응당 그런 말을 해줄 수 있어야 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대단하다고 치켜세울 줄 아는 순수한 칭찬조차 그릇되었다고 말할 필요가 있냐고 따질 수 있다. 문제는 표현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이것을 사용하는 방식에 있다. '너 참 대단하다, 쉽지 않았을 텐데. 나라면 그렇게까지 할 수 없었을 거야.' 이런 문장이 자연스레 떠오른다면 대단하다는 말을 그만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저 문장의 이면에는, 나는 그걸 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 라는 자기 비하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자기 비하의 목적 없이 순수 칭찬이라고 변명해도 마찬가지다. 말은 사람의 무의식에 침투한다. 당신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건, 저 표현이 반복될수록 당신은 스스로를 그 사람의 삶 아래로 선을 긋게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한계 지으면서까지 남을 칭찬한다는 건 진실된 게 아니라 미련한 짓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종류의 ‘선긋기'는 듣는 사람에게도 허망함을 주는 건 마찬가지다. 까다로운 목표를 이루기로 결심하는 순간은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이 아니라, 실패로 끝나고 모든 걸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과 절망감을 씹어 삼킨 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스스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순간이라 느끼고, 누구라도 자신과 같은 상황라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즉,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재능 따윈 없다. 무릅쓴 위험을 이겨내기 위한 절실함과 노력만 있을 뿐이다.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여긴다.) 그런 사람에게 ‘너는 대단하고 난 못할 일이다.’라는 말은, 그 모든 절실함과 노력을 무로 만들어버리고 그 사람의 재능을 칭찬하는 표현일 수밖에 없다.




만든 햄버거를 은박지에 싸서 냉장고에 보관한다. 말이 햄버거지, 패티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데울 필요 없이 차게 먹어도 괜찮다. 문제는 오늘 저녁에 한 개를 먹고나면 세 개가 남는데, 그것을 다 가방에 넣을 수 있는지이다. 하나하나 묵직할 뿐더러 가방에 넣고 걸어다니면 뭉개지거나 심지어 터질 위험이 있다. 차라리 같은 숙소에 있는 처음 본 한국인에게 나눠주자고 결정한다. 인사하려고 다가가서 말을 걸어보니,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다. 인사를 나눈 김에, 혹시 저녁을 먹었는지 물어본다. 그는 레온에서 출발하여 오늘이 순례 첫 날이라고 한다. 저녁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는 커녕, 관리인에게 받은 일회용 침대 시트도 어떤 용도인지 모른다. 늘 모험의 시작에는 행운이 따르는 법이다. 지금의 나는 어느덧 행운을 줄 수 있는 주체였다. 그에게 햄버거가 남으니 같이 먹자고 제안한다.





재능 있다는 말도 마찬가지로 폭력적일 뿐이다. 이제 막 새로운 분야를 배우기 시작한 사람에겐 칭찬이 될 수 있겠지만, 어려운 일을 해낸 사람들에게 재능 있다는 말은 노력의 부족 혹은 부재를 의미한다. 무엇보다, 재능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 두뇌 및 심리 검사로 사람마다 특정 기질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배움이 더 탁월한 분야가 있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재능이 아니라 흥미다. 잘해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좋아해서 자주 관심을 가지다 보니 잘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흥미를 가지게 된 분야를 꾸준히 관찰하고, 더 잘 알고 싶어서 많은 자료를 찾아보고, 더 좋은 실력을 가지기 위해 평소엔 안 하던 자발적 실천도 한다. 그렇게 더 좋은 가능성을 한 뼘 한 뼘 열어 나아가며 더 잘하게 된다.


선천적으로 남자아이들은 여자 아이들에 비해 사물에 더 관심이 많고, 여자 아이들은 사람에 더 관심이 많은 경향을 보인다. 이는 남학생들이 더 많이 공대에 지원하고 여학생들이 간호학과에 많은 이유를 일부 설명할 수 있다. 일부 예외의 존재는 재능이 아닌 환경과 흥미라는 사실을 오히려 부각한다. 행여 재능이 존재한다 한들, 그것을 수치화할 수 있는가? 그저 각자 상대적인 재능을 지레짐작하고 자신의 열등감을 감추려 타인에게 재능이라는 신비를 부여하는, 그저 자기 합리화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차라리 재능 따위 존재하지 않고, 자신의 흥미와 그 분야에서 꽃 피우기 위한 노력, 그래야만 하는 이유(절실함)들이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는데 더 중요한 요소이며, 여기서 재능은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기 위한 (재능이 없다는 비교든, 그 반대든)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른바 ‘대단한 사람들’ 중 대부분은 대단해지기 위함이 아닌 책임을 지고 자신의 과업을 완수하는 것에 자신의 삶을 걸었을 뿐이다. 스스로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도 처음엔 다른 앞서가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재능이 없다고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국민 요정 김연아 선수도, 몇 년 동안 세계 대회에서 수많은 상을 휩쓸며 전 세계가 인정하는 빙상 여제가 되었으나, 김연아 선수가 연습하는 모습을 3일만 보면 재능이라는 단어를 더 이상 꺼낼 수 없을 것이란 말이 있다. 그런 사람들 모두가 끝없는 자기 의심과 채찍질의 시간을 견뎌야만 헀으며, 그 결실에서 재능이 차지하는 비율은 1%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이렇게 설명함에도, 절실함과 노력도 재능이고, 자기 의심을 이겨낸 것도 재능이라고 말할 심산이라면 나는 반박하지 않겠다. 어차피 자기 자신에게 아무런 믿음도 가지지 못하는, 반박할 가치도 없는 삶을 살고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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