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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Jul 27. 2022

25. 당신의 세상이 바뀌지 않는 이유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25일 : Villadangos del Paramo에서 Murias de Rechivaldo까지 약 44km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잠에서 깬다. 시간은 아직 새벽 세 시도되지 않았다. 천천히 침대에서 나와 건물 밖을 보니, 숙소 바로 맞은편에서 광란의 파티가 진행되고 있다. 스페인은 토요일 저녁마다 축제라지만 하필 하루 종일 걸은 순례자들이 그나마 쉴 수 있는 공간 앞에 우퍼 스피커가 울리다니, 오는 날이 장 날이라는 걸까. 다른 순례자들이 어떨진 모르겠지만, 나는 다시 잠에 들 자신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앉아있으니, 이것도 내 까미노구나, 납득하게 된다. 순례자는 이내 가방을 메고 길을 나선다. 그믐이 가까워지는 밤하늘에는 이전보다 무수해진 별들이 보인다. 길을 걷다 잠시, 주변이 나무로 둘러싸인 숲길 공터에 누워 여름철 대삼각형을 가로지르는 은하수를 발견한다. 모든 별들의 고향, 나는 항상 네가 보고 싶었다. 늘 네 품에서 죽고 싶었다.




세상에 대한 불평이 이질 않는다. 뉴스만 보면 안 좋은 소식들이 매 정시에 교회에서 울리는 종처럼 하루 종일 들려온다. 겨우 문제 하나를 해결하면 둘, 셋으로 늘어난다. 정치가 문제고, 사회가 문제고, 경제가 문제다. 문제가 끊이질 않는다. 사람들은 매일 저녁 포차에 모여 세상이 엉망진창이라 살기 힘들다고 한탄하며 한 잔 기울인다. 서로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서로 자신이 응원하는 쪽이 옳다고, 허울뿐인 도덕성을 꺼내 들며 다툰다. 그들은 세상의 문제가 너무 거대하게 쌓여서 평생을 피해자로 살아가야 하고 이 모든 책임은 기득권층과 대기업에 있다고 말한다. 자신도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싶지만' 세상에 악이 넘쳐서 옴짝달싹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작 힘 있는  자들은, 그들의 사리사욕만 채울 뿐 세상을 더 좋게 만들 생각이 없다. 세상은 대체 언제쯤 더 좋아질는지, 절대 변하지가 않는다.


한심한 소리다.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소리다. 자기 자신은 변할 생각도 없으면서 세상이 변하길 바란다니, 초에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을 객관화하고 평가를 내리고 잣대를 재는 것 자체가 오만한 행동 아닌가? 심지어 학술적인 근거도 없다. (자신한다, 학술적인 근거들을 들고 오자면 세상은 조금씩 더 좋아지고 있다. 우리는 늘, 역사상 가장 좋은 세계를 누리고 있다.) 그저 자신의 경험, 더 정확히는 객관적 경험을 받아들이는 주관적 태도로 이렇다 저렇다 불평하고 있는 게 전부 아닌가? 세상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자기 자신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늘, 세상이 객관적 진실이 아닌, 주관적 인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해왔다. 상상 속의 '절대적 세상'에서 자신이 하는 노력들이 일말의 가치가 없다 하더라도, 그 노력을 해야만 한다. 세상을 더 좋게 만들고 있다는 '착각'을 위해서라도 무언가를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행동에서 나오는 근거들이 삶을, 곧 자신의 세상을 바꾸기 때문이다. 물론 쉽게 살겠다고 합리화를 통해 착각을 만드는 순간,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걸 내면은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더 치욕적일 것이다. 환영한다. 그 끝엔 기만자들의 지옥이 있다.




생각해보면 참 짓궂다. 다음날 오래 걷자는 생각으로 햄버거를 가득 만드니까 일찍 떠나는데 망설일 필요가 없다. 부족한 잠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애초에 험하게, 열렬하게 걸어보자고 계획한 날이니 가벼운 핸디캡으로 여겨도 괜찮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정말 한계가 온다면 어디서든지 누울 수 있다.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오로지 토해져야 할 문장들만 가다듬으며 길을 걷는다. 을 걷다가 Sahagun에서 만났던 노인, 호아니또 Joanitto를 만난다. 그는 호안 Joan이라는 이름을, 아이들 애칭인 호아니또로 스스로 이름 붙여 길을 걷는다. 이 노인은 아이와 같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그저 하루하루 자기 자신을 발견하며 길을 걷는다. 행복과 기쁨이 삶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그를 보며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나는 그의 삶을 응원하지만, 그처럼 살 순 없다. 각자가 구성한 세계가 너무 다르게 흘러간다. 두 세계는 교차점을 지나 다시 멀어진다. 나는 속도를 높여 그와 헤어지고, 여전히 쉼 없이 이어지는 고행을 받아들인다.





한 사람이 한 세상을 구성하는 절차는 다음과 같다. 지구라는 공간에 내동댕이쳐져서, 살아남기 위해 주변 사물, 생물들을 인식하는데 열을 올린다. 무엇이 생존에 유리한 상호작용을 제공하는지, 무엇이 더 불리한 상황을 만드는지 필사적으로 파악한다. 그렇게 별자리를 그리듯 사물들, 사람들과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가며 일종의 인식의 네트워크 형성한다. 네트워크의 중심은, 전혀 의심할 여지없이, 자기 자신이다. 세상의 중심은 항상 자기 자신이다. 어떤 비열한 협잡꾼들은, 그런 태도로 살지 말라고, 세상의 중심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충고 아닌 충고를 하지만, 그들조차도 자기가 가진 세계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지 않는가? '타인이 중심인 타인 세상의 존재'를 알고 있고, 존중할 수 있다 한들, 그것을 이해할 순 없다.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기 세계가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을 따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 전체를 이해한다는 말과 같다. 


70억 인구 중 한 명의 영향력은 우주 속 티끌만큼 미약하겠지만, 세상은 그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절대적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절대적 세계와 세계의 기준을 열거하고 증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의 세계는 당신이 인지한 현상과 상호 작용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심축은 당신 자신이다. 그 주변으로 서로 주고받는 영향력이 가장 큰 집단, 중간 집단, 미약한 집단 순으로 그물망은 펼쳐져 있다. 당신이 하는 행동은 당신 자신과, 주변 가까운 사람들에게 영향을 퍼뜨린다. 파도는 메아리가 있어서, 그런 영향은 다시 자기 자신에게도 돌아온다.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행동이란 없다. 아무리 티끌같이 사소한, 이를테면 자기 전에 손톱을 깎는 행위 하나에서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떠한 영향은 탄생한다. 그 모든 영향의 책임은 세계의 중심인 자기 자신이다. 때론 자신이 만들어내지 않는 영향도, 자기 스스로 책임져야 할 순간이 있다. 이 빌어먹을 세상은, 당신으로부터 말미암은 일뿐만 아니라 저지르지 않은 것까지 책임을 지라고 말하곤 한다. 도망치는 것은 자유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세계의 축은 한 뼘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자기의 책임이 아니라고 변명하는 것은 자유지만, 차라리 자발적으로 책임을 지려고 했다면 이렇게까지 망가진 세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도시 Astorga로 이어진 순례길은 우리에게 고원을 지나도록 요구한다. 언덕을 올라가니 길에서 몇 번 마주쳤던 한국인 두 명이 보인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마저 길을 걷는다. 그렇게 한 시간을 넘게 걸어가니 순례자 쉼터가 보인다. 내리막길에 위치한 쉼터 너머 멀리, 도시가 보인다. 슬슬 배가 고프니 여기서 도시락을 먹도록 하자. 그제야 순례자는 걸음을 멈춘다. 네 시간 동안 약 22km를 쉼 없이 왔다. 직전의 휴식도 해봐야 5분 남짓이었으니, 30km를 쉬지 않았다고 허세를 부려도 거짓말은 아니다. '왜 이렇게 무겁게, 힘들게 걸으세요?' 지금까지 순례길을 걸으며 마주쳤던 몇몇 사람들의 질문이었다. 답은 쉽다. 그 고행에 몸이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마음의 짐이 더 아프다. 세상은 참 아프다. 아직은 십여 킬로미터를 더 걸을 예정이었지만, 눈앞에 규모 있는 도시가 보이니 갑자기 한식이 먹고 싶다. 아까 마주쳤던 한국인들이 저기서 멈출 예정이라면, 같이 요리를 해 먹자고 제안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다시 눈앞에 펼쳐진 경치와 햄버거의 맛에 몰입하면서, 한국인 순례자는 동향인들을 기다리기 시작한다.



십여 분을 기다린 끝에 그들과 합류했다. 넌지시 안부를 나누며 다음 행선지를 물어봤지만 Astroga에 도착하면 잠시 쉬고 더 멀리 걸을 계획이라고 한다. 나도 한식을 해 먹는 게 틀어지면 원래대로 더 걸을 생각이니, 그들과 잠시 동행한다. 순례길 위에서 이미 몇 번을 마주쳤었기에, 이번에는 통성명을 했다. 보통 세 명이서 함께 다니는데, 예리, 선엽 두 사람이 걷고 있었고, 남은 일행인 지훈은 더 앞서있다고 한다. 예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대화를 시작하고, 분위기를 밝게 만들 수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서 아이들은 낯을 가리고, 어른들은 겁을 먹기 마련이다. 그녀는 낯을 가리지도, 겁을 먹지도 않고 나와 대화를 이어나가며 장난들을 주고받았다. 선엽은 주로 우리들의 대화를 묵묵히 들으며 반응을 해줬다. 무리 안에서는 늘 수용할 줄 아는,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필요한 법이다. 그는 이 안에서 그런 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수용소 군도>를 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접근 방식은 눈여겨볼 만하다. 공산주의 소련 연방은 당시 시대적 흐름이었고, 그 시대를 주름잡는 기득권과 권력자가 아닌 평범한 개인은 몰아치는 시대의 흐름에 이끌려(혹은 떠내려)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어떻게 개인이 막아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소련 강제수용소의 역사와 수용소가 생기기 전까지의 흐름을 분석하며 어떻게 수용소 제도가 체계화되었는지를 분석한다. 무엇보다도, 그런 흐름에서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택지 내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제시한다. 결국 개개인의 잘못된 선택들이 모이고 모여서 공산주의와 수용소라는 광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실제로 세계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행동을 했느냐 아니냐 보단, 지금 벌어지는 상황에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건 무엇이 있는지 고민하는 태도가 아닐까? 그게 비록,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님에도 말이다. 사람들은 최대한 책임을 덜 지려고 한다. 그래 놓고 더 많은 자유를 추구하는 건 결국 강제수용소와 같은 광기를 낳을 것이다.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도, 같은 이유로 악화되고 있는 건 아닐까?


결국 우리가 선행을 베푸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좋은 사람이라고 박수를 받거나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기 자신이 원인이 아닌 문제들에 대해서도 책임지는 마음을 가진 개인과, 개인이 행동하고 실천하는 선함이 그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그 영향이 인근으로 퍼져나가 주변 사람들도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확률을 조금이라도 더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이 한 잘못된 선택을 비난할 수 없다. 앞서 얘기한 대로, 절대적 선은 존재하지 않고, 각자는 본인이 추구하는 선함을 실천하며 선택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면, 그 사람을 위해 가슴 아파하는 것과 대신 책임져줄 수 있는 것들을 짊어짐으로써 더 좋은 세상을 만들거나, 적어도 더 나쁜 세상이 되는 것을 막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당신이 그런 태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면, 당신의 삶은 이미 충분히 바뀌었을 것이다.


자기의 세상을 바꿔 본 적이 없는 사람은 타인의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전혀 모른다. 당신이 추구하는 우상이 어떤 정치인이든, 기업가든, 사랑하는 연인이든 상관없다. 우리는 타인의 세상을 구원할 수 없고, 타인도 우리의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 정부나 제도가 바뀌어도 삶은 여전히 고통의 바다이고, 스스로의 실천으로부터 고통을 줄여나가겠다는 태도만이 세상을 변하게 만들 수 있다. 거기서 도망치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그로 인해 만들어진 지옥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변명할 순 없을 것이다.




예리, 선엽과 함께 Murias de Rechivaldo에 위치한 순례자 숙소에 도착한다. 저녁 식사까지 포함하여 적지 않은 비용이 들지만, 건물 내부와 뒤편에 정원이 있는 조용하고 아늑한 숙소다. 숙소까지 도착하는 길은 정말 즐거웠다. 단순히 한국인들과 걸었다가 전부가 아닌, 대화 코드가 잘 맞는 사람들을 만났다. 순례길 위에서 한국인들과 마주쳐도 (굳이 한국인에게만 그런 것도 아니다) 먼저 다가가 말을 걸거나, 표정을 부드럽게 풀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대화할 일이 드물다. 두 사람도 처음엔 내가 대화를 하지도 않고, 마주쳐도 속도를 줄이지 않는 사람이라 많이 어려웠다고 말한다. 깊은 밤이 찾아올 때까지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가끔의 진지한 주제와 대부분의 우스갯소리를 주고받는다. 오늘 은하수를 본 경험을 말해주니, 그들도 별을 보고 싶다고 한다. 내일 아침은 다 같이, 일찍 출발하자고 일정을 맞춘다. 또다시 순례길로부터 잠시의 동행을 선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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