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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Jul 31. 2022

 26. 집단이라는 이름의 광기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26일 : Murias de Rechivaldo 부터 Foncebadon까지 약 22km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동행하는 경험이 없다고 할 순 없지만, 같이 숙소에서 나와 이렇게 걸음을 맞춘 적은 드물다. 또한 같이 동행하는 순례자들은 일어나야 할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동시에 침대에서 나와 짐을 챙긴다. 예리, 선엽과 나는 서로를 깨울 필요도 없었고, 출발 준비도 거의 동시에 마쳤다. 다섯 시가 채 시작되기도 전에 순례자들은 어두운 길로 들어선다. 달은 이제 막 잠에서 깨 서쪽 하늘을 타고 올라온다. 그믐에 가까워져서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하늘에 수 놓여 있다. 순례자들은 길을 걷다 잠시 멈추곤, 흙길에 드러누운 채 밤하늘을 올려본다. 중간중간 별똥별들이 스스로를 태워가며 세상을 베어버린. 별자리를 이어보던 순례자들은 점점 쌀쌀해지는 날씨에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한다.  





개인으로서 존재하지 않으면 자유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집단이란, 광기와 같다. 목적성이 있는 생산적인 집단이건 그저 유흥과 쾌락을 위해 모인 집단이건, 집단의 정체성을 우선시하며 자의식을 흐뜨러트린다. 앞서 말했던 종교 단체들이 신을 찬양하며 저지를 범죄와 전쟁들, 인도주의를 내건 사회단체들의 시위, 시위를 가장한 폭력 소동과 인종 차별, 세계 대전과 아우슈비츠 수용소. 모든 게 다 신념에 잡아먹힌 집단이라는 광기가 만들어낸 참혹한 현장들이다. 물론 모든 집단이 광기에 물들었거나, 세상에 악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주관성이 더 중요시되는 집단, 목적성이 구체적인 집단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곤 한다. 개인으로 생각하면서 동행하는 집단이 생긴 오늘, 이 두 가지 관점의 차이를 다뤄보도록 하자.


집단의 형성 요인은 깊게 따져볼 필요도 없이, 생존하기 위함이다. 물론 어디까지가 '생존'을 위한 행위인지에 대한 경계는 다소 불분명하다. 누군가는 필사적 연명이야말로 생존이라고 말하겠지만, 다른 누구는 재미의 추구도 생존에 필요하다고 말할 만큼 사회는 복잡해졌다. 그러니 '왜 집단으로 뭉치려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갈 필요는 없다. 다만 그 안에서 실질적으로 무엇을 원하는가에 따라 집단 내의 개인, 더 나아가 집단 자체의 정체성이 결정된다고 볼 수 있겠다. 그 집단이 왜 만들어졌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건강한 목적을 위해 탄생한 집단이라도, 어느샌가 병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반대로 안일함에 찌든 집단이 목적성을 되찾거나 개선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극히 드물다. 한 집단의 정체성이 동호회 같은 단순 친목이라 하더라도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며, 반대로 사회 정의 추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환경 단체나 인권 단체도 단순히 지원금만 타 먹는 협잡꾼으로 전락하여 눈을 부라리곤 한다. 그 차이점은 본질적으로 사랑의 유무, 스캇 펙이 정의한 '상호 간의 영적 성장을 위한 행동'의 유무라고 볼 수 있겠다.




리는 굉장히 활발한 성격이고, 나에게 장난을 치거나 대화를 이어나가는 데 거리낌이 없다. 그녀와 친해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상호주의적 계에 익숙한 사람이라, 상대방이 나를 편하게 대할수록 나도 더 편하게 다가간다. 나중에는 둘 다 극한까지 신나서는, 평소라면 하지 않을 바보같은 짓도 같이 저지르고, 미친듯이 웃는다. 뒤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고개를 내저었을지도 모르겠다. 목적지에 도착한 뒤, 더 멀리 갈 생각인 선엽, 지훈과 인사를 나눈다. 아직 열한 시가 되지도 않았는데, 숙소 주인은 편하게 체크인을 도와주었다. Foncebadon은 산 중턱에 위치한 마을이라서 우리가 묵는 숙소도 산장 느낌이 물씬 났다. 건물 뒷마당이 보이는 소파에 앉아 잠시 쉬다가, 조용한 자리를 찾아 작업을 한다. 드러누운 해먹 아래로 강아지나 닭들이 돌아다니는 게 마음을 간지럽힌다.

 


일을 마치고 다시 소파로 돌아와 예리와 수다를 떤다. 방금 막 다른 봉사자에게 일을 맡기고 퇴근했다는 숙소 주인 로렌초는 큰 병에 샹그리아를 만들어 와서는 우리에게 나눠준다. 산장 안과 밖을 돌아다니는 세 마리의 개들과 멀리서 보이는 닭 무리만큼 그도 자유롭고 호쾌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숙소를 구경하다가 다락을 잠깐 봤다고 하자, 그는 신이 나서 다락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안은 충분히 넓었고, 여기저기 매트리스가 깔려있다. 그는 화장실과 샤워실도 다 구비가 되어있다면서, 원한다면 아래층에 있는 공용 침실이 아니라 다락방에서 머물러도 좋다고 제안한다. 우린 더 넓은 공간을 편하게 쓸 수 있다는 기쁨과 로렌초의 시원시원한 성격에 대한 놀람을 동시에 느낀다. 순례길은 늘 예측불허다. 타인이 주는 호의는 겉치레 없이 일단 받아봐야 한다.




집단은 힘이다. 목적성이 구체적인 집단은 강력한 힘을 가진다. 규모가 큰 집단일수록 의견을 통일시키는 게 어렵지만, 그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자기의 과업조차 극복하지 못한 나약한 개인은, 자신의 무력함을 숨긴 채 집단에 숨어들어 강함을 휘두르려 한다.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는 힘을 휘두른다는 것은, 수많은 문학과 영화에서 은유하듯, 악마와의 거래 그 자체이며 자기 자신을 광기로 내몰게 된다. 그 근본 욕구가 사랑이 아닌 자기 과시욕이나 일차원적 이득 그리고 대부분의 집단이 그렇듯 집단의 맹목적 보호일 뿐이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집단 수뇌부가 모순적인 행보를 계속하는 것이다.


집단 전체가 건강한 목적을 추구하려면 그 과정은 반드시 일관적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외부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보호와 단순 규모를 늘리며 안정성을 위한 방벽을 세우는 것이라면 언행이 뒤집어져 일관성 없는 광대가 되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게 다 집단을 위한 일'이라는 맹신과 함께, 광기에 찌든 자들은 자신 개인이 저지른 참혹한 결과에 대해 책임지지 않고 다시 집단 뒤로 숨어버린다. 집단은 책임지지 않는다. 아니, 집단에 숨은 개인은 집단의 행동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개인의 삶에 부여된 책임에서 도망치기 위해 집단이라는 껍데기를 썼다. 그렇게 개개인의 힘을 더 유약하게 만든다.


때문에 나는 집단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집단주의를 반대한다. 집단은 추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영화 기생충으로 수많은 시상식을 휩쓴 봉준호 감독이 인터뷰에서 한 답변이 떠오른다. 옛날에는 혁명을 통해 파괴해야 할 대상이 구체적으로 존재하였으나, 요즘에는 무엇을 겨냥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사회가 복잡해졌다. 난조류 속에서 집단의 힘을 통해 어떤 대상을 부수겠다는 건, 신기루에 맞서겠다는 말과 같다. 주먹을 휘두르면 잠시 사라졌다가, 이내 다른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이런 세상에서 군중은 그저 하루살이다. 그들이 아우성치는 이유는 진정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집단의 힘을 과시하고 거기에 만족감을 얻기 위함이다. 그들이 세상이 불공평한 이유를 말하며 불만을 표할 수 있을지라도, 근본적인 해결책을 꺼낼 순 없을 것이다.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시작점은 사회의 변화가 아닌 개인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숙소에 준비된 저녁은 푸짐하다 못해 무거울 지경이다. 채식주의자들을 위해 빠에야에 들어가는 돼지고기는 따로 준비되어서 나왔는데, 예리와 나 그리고 또 다른 한국인 한 분, 이렇게 세 명이 앉은 테이블에는 다른 세 명의 외국인 채식주의자들이 있다. 처음에 두 명만 채식을 한다고 오해한 예리는 고기를 많이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올라간 내 입꼬리를 나무라지만, 세 명인걸 알아채곤 그녀도 똑같이 입이 씰룩댄다. 곁들임으로 준비된 와인도 저렴한 순례자 메뉴치곤 훌륭하다. 술을 못 마셔서 평소엔 한두 모금만 마시는 예리도 몇 잔을 기울인다. 저녁을 마치고 주변 산책을 한다. 여덟 시가 넘었지만 밖은 아직 대낮이다. 예리와 함께 마을을 조금 다가 다시 낮에 쉬던 소파로 돌아와 시덥잖은 잡담을 이어간다.


그녀와 편하게 친해질 수 있었던 것처럼, 나에겐 분위기에 쉽게 스며들고 때론 더 열정적으로 이끌어가는 모습이 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내가 한 집단에 들어가도 내 개인성과 고유성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내 고유성이 위협받지 않는 곳에선, 나도 그 집단과 집단 내 개인의 성향을 존중해줄 수 있다. 다 같이 신나게 떠들고 놀자는 자리에 와서 혼자 사색하고 세상 진지한 척하는 건, 고유성이 나약한 자들이 관심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행동이다. 사색을 하고 싶다면 그런 자리에 오지 않으면 된다. 다른 사람들과 유쾌하게 장난치고 놀 때와 진지한 주제로 대화를 이어갈 때 극적으로 달라지는 내 모습에 예리는 당황한다. 어떻게 그렇게 매사에 열심히 또 재밌게 살면서 다 뻔하고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냐고, 그녀가 묻는다. 나는 답한다. 그 공허감에서 벗어나 보려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해보는 거예요. 어떻게든 발버둥 쳐보는 거죠. 그럼에도 이 구멍은 당최 사라지지가 않네요, 사라지지가...


그녀는 그 말이 참 아프다고 했다.





예를 들어, 세상 아래 건강한 역할을 수행하는 여성 단체도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성주의를 반대한다. 근본적으로 집단주의는 개인을 더 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나와 같이 시간을 보내는 예리처럼, 다른 여성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세계를 듣다 보면 정말 맑고 또 강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또한 나는 진심으로 내 어머니와 누이를 존경하는데, 그들은 강한 여성의 표본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나약함이 근간이 된 집단은 책임을 미루기 위해 문제의 원인을 집단 밖에서 찾으려고 하며 그렇게 비난할 대상이 정해지면 일제히 공격한다. 그런 공격에는 항상 애꿎은 피해자들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 피해자들 중 똑같이 나약한 개인들이 뭉쳐서 자기 자신을 보호할 목적으로 상대에게 대응한다. 아무리 남녀 갈등이 오늘날 더 빈번해졌다지만, 그래봐야 집단에 숨은 약자들의 아우성일 뿐이다. 나는 협력의 가치를 믿는다. 남녀가 서로 다른 신체적 차이와 거기에서 파생된 다른 경험들을 이해하고 협력할 수 있다는 가치를 믿는다. 프랑스에 살면서 한국인 남성들보다 여성들을 더 많이 마주치고, 따라서 대화를 나눌 기회도 훨씬 많았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이성을 서로 협력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대할 줄 알았다. 나는 그런 강하고 맑은 여성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건강한 집단은 오로지 특정 목적을 위해 만들어지며, 행동 강령이 구체적이다. 또한 목적이 다하면 소멸하거나, 다른 목표를 찾아 방향성을 틀어야 한다. 또한 집단의 목적과 개인의 목적, 혹은 이익은 합치해야 한다. 희생을 요구하는 집단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공동 신념을 우선시하는 사회단체보다 차라리 개개인의 이익을 중심으로 모인 기업이 본질적으로 더 건강하다. 가장 최초의, 최소의 집단인 가족조차 부모 자식 할 것 없이 상호 발전이라는 목표로 연대하지 않으면 절대로 화목할 수 없다. 우리는 종종 서로에게 사랑을 무기로 헌신을 강요하는 가족들을 마주할 수 있는데, 피해자의 역할인 구성원이 꾸려놓은 '개인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보게 되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신념이 있는 집단은 강하지만, 그럼에도 개인이 우선시 되어야 건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가족을 포함한 모든 집단은, 삶의 도피처가 될 순 있지만 안식처일 순 없기 때문이다. 어떤 공동체든 변화는 (즉 정체성의 소멸과 재탄생) 일어나기 마련이며, 개인의 삶은 언젠가 소멸할 집단의 정체성이 아닌 그를 통해 만들어진 개인의 이야기에 집중되어야 한다.


따라서 집단에 속해있는 개인의 목적은 본질적으로 두 가지 중 하나다. (혹은 사람에 따라 둘 다 이기도 하다.) 더 나은 개인, 더 나은 삶, 나아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집단의 힘을 '잠시' 빌리는 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무력감을 감추고 삶의 과업에서 도망쳐, 집단의 힘을 방패 삼아 책임지지 않으려는 자들. 전자의 경우 집단에 속해있다 하더라도 개인의 삶을 지킬 줄 알기에, 집단 자체는 광기의 다른 이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거기에 취한 자들과 취하지 않은 자들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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