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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Sep 06. 2022

27. 평등이라는 이름의 폭력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27일 : Foncebadon에서 Molinaseca까지 약 20km.


알람 소리에 잠에서 일어난다. 여섯 시가 되기 직전이다. 다락방에서 자니 이른 아침마다 늘 들려오던 순례자들의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오늘은 천천히 출발해도 좋은 날이다. 알람을 옆에 던져놓고 매트리스에 다시 누워 게으름을 피운다. 지금 아침을 먹으러 나가기엔 너무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는 좋은 핑계가 있다. 그렇게 삼십여분을 뒹굴대다 1층으로 내려와 아침을 먹고, 일곱 시가 넘어서야 숙소를 나선다. 예리와 나는 오늘 산을 건너서 선엽, 지훈과 합류할 예정이다. 서 걷고 있는 그들에게 을 내려오는 길이 꽤 험하니 조심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래도 오랜만에 배를 충분히 채우고 길을 나서기에 마음은 편하다. 동쪽 끝 산기슭에서 피어나는 해를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예리는 이른 아침임에도 벌써 에너지가 넘친다. 자연스레 발걸음도 빨라지는 그런 아침으로 순례자의 하루는 시작된다.



온 세상에 평등이 울려 퍼진다. 모든 것은 평등해야 한다는 아우성이 끊이질 않는다. 세상이 원래 불공평함을 알면서도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고, 세상의 원형은 평등하였으나 욕심 많은 사람들이 그 황금률을 무너뜨렸다는 듯 환상에 빠져 사는 사람들도 있다. 마치 평등이 인류가 추구해야 하는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에는 멋모르고 사회적 트렌드에 맞춰 평등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동화 피터팬처럼 어른이 되기 싫은,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싶지 않다는 아집으로 가득 찬 사람들도 있다. 자신이 삶이 초라한 이유가 초월적 가치인 평등을 막아서는 자본의 앞잡이와 기득권 때문이라고 원망하며, 자기 삶을 바꾸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평등이라는 가치처럼 인간적인 것이 없다. 모순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평등의 가장 치명적인 모순은, 사회적으로 합의될 수 있는 진정한 평등을 규정하고 그 범위를 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기회의 평등이 미덕이라고 말할 때, 다른 누군가는 결과의 평등을 주장한다. 결과의 평등은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고 더 치밀하게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기회의 평등을 추구한다고 주장하지만, 내보이는 행동 양상은 결과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을 따져 물으면, 이미 저 너머 '거대한 악'이 기회의 평등을 다 뺏어가 버려서, 결과의 평등 없이는 기회조차 가질 수 없다는 식으로 얼 무어 버린다. 심지어 이 '기회의 평등', '결과의 평등'도 그 영역을 구체적으로 잡을 수 없다. 세상에는 이미 어떤 결과가 있어야 (선천적으로든 환경적으로든 또는 개인이 스스로 일궈낸) 가질 수 있는 기회들이 대부분이다. 결국 어디까지가 기회고 어디부터가 결과인지, 그 경계선은 모호하기 마련이고 사람마다, 시기마다 그 해석은 달라질 수밖에 없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일반인으로 구성된 농구단과 장애인으로 구성된 농구단이 서로 친선 경기를 치를 때, 일반인 농구단은 다른 일반인을 대하듯 최선을 다해야 하는가? 그 결과가 100:0이라는 무지막지하고 비인간적인 격차를 보인다 해도? 혹은 일반인 농구단은 장애인 농구단의 수준에 맞춰서 경기하거나, 동등한 입장에서 경기를 진행하기 위해 휠체어라도 타야 할까? 오히려 휠체어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 농구단에게 불리한 경기가 아닐까? 이 경기는 어떻게 해야 '공정함'이 성립될 수 있을까?





Foncebadon에서 순례길을 걷다 보면 '철의 십자가'라는, 순례자들 사이에선 꽤나 유명한 구조물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순례길을 걷기 시작할 때에도 무엇이 유명한지는커녕 어디로 걸어야 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길을 걸으면서 마주쳤던 여느 십자가들보다 작고 초라한 저 구조물이 왜 유명한지 모른다. 다만, 역사적으로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순례길의 특성상, 사진을 찍고 인증하는 것으로 유명한 것은 아닌 게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에게 재밌는 건, 철의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유명한 것'을 보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일 수밖에 없다. 철의 십자가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기다리는 순례자들을 둘러본다. 누군가는 철의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사진을 찍기도 하겠지만, 그저 유명하다는 이유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와 예리는 그런 사람들을 잠시 구경하다가 이내 길을 나선다.


나중에 찾아보니, 순례자들이 고향(순례 출발지)에서부터 돌을 챙겨서 순례를 하다가 철의 십자가에 도착해서 돌을 내려놓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철의 십자가는 돌무더기 위에 세워져 있다. 높은 나무 기둥은, 앞으로도 쌓일 돌무더기에 십자가가 파묻히지 않도록 세웠을 것이다. 하지만 돌무더기는 지면에서 얼마 올라오지도 않았고, 십자가까지 닿기엔 까마득하다. 더욱더 많은 순례자들은 풍습을 따르지 않고, 철의 십자가의 본질은 점점 더 잊혀 간다. 풍습이 이어져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고집하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는 잊힐 것이고 유명한 것으로 유명한 구조물로 전락하고 있으니, 어느 시점부턴 그저 껍데기에 불과한 십자가로 전락할 것이다. 대개 사람들의 삶이 그렇듯이, 그리고 세상에 원래 그렇듯이.




평등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 진화 방식에 역행하는 가치이다. 평등은 위계를 파괴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위계는 고리타분한 사회 계급과 질서에 대한 말이 아니다. 위계의 원형은 사회나 문명이 있기 전부터 존재했다. 위계, 즉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은 생존의 필수 조건이다. 모든 생물들은 태어난 직후 주변 사물과 생물들 중에서 무엇이 자신에게 중요한지, 자신의 생존에 큰 도움이 되는지 혹은 위협이 되는지를 파악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관심(경계)을 주어야 하는 대상에 따라 우선순위를 부여한다. 모든 생물은 이런 방식으로 생존한다. 우선순위를 부여하지 않는 생물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사망하기 때문이다. 당장 당신이 자신의 인식 체계를 파괴하고 세상을 '평등하게' 바라보도록 뇌의 설정을 바꿀 수 있다면 (물론 불가능하지만) 물밀듯이 들어오는 무가치한 정보들이나 당장 분류할 수 없는 정보들로 머리가 다 타버릴 것이다. 그런 상태로는 단 한순간도 일상생활을 할 수 없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루하루가 다르고, 미지의 정보들이 계속 쏟아지기 때문이다. 우리 뇌는 무시해도 될만한 정보는 애초에 인식도 하지 않는다. 그들 입장에선 얼마나 불평등한 처사인가?


또한 평등은 애초에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실현 불가능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곳은 공간과, 자원과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각자가 충분하다고 느낄 만큼의 자원을 모두가 가져갈 순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툼과 전쟁이 발생하는 것이고, 이것이야 말로 가장 '인간적'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생존을 위해 갈등보다 협력을 선택한다. 이것 또한 인간적이다. 갈등이 비인간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평화로운 해결책으로 공평 분배를 주장하곤 하지만, 이미 앞서 언급된 문제로 '무엇이 공평인가'를 규정할 수도 없다. 개개인의 특성 따위 모두에게 같은 양을 나눠줄까? 그게 그 사람들이 주장하는 '인간성'을 다루는 방식인가? 아이, 성인, 노인으로 구분지어야 할까? 성별은 어떨까? 이런 식으로 각자의 특성을 반영하다 보면 전 세계 인구수만큼의 카테고리가 필요하다. 즉, 사람을 사람으로, 인격체로 대하는 이상 카테고리를 구분 짓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모두를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모두를 사랑하는 듯한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삶의 태도일 뿐 특정 대상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들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그 누구도 무한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서 높은 순위에 위치시킨다는 말이며, 다른 대상에게 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말이다. 평등은 미움받기 싫어하는 겁쟁이들의 몫이다. 불평등은 소외를 낳고, 소외당한 자들은 그 원인을 원망한다. 평등은 그들에게 받을 미움이 무서워서 취하는 '무엇도 우선순위에 두지 않겠다'는 전략이지만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하다.





 숙소 체크인 시간에 맞춰서 마을에 도착한 나와 예리는 지체 없이 숙소를 향한다. 이미 아침 일찍부터 마을에 도착해있는 선엽과 지훈을 만나 숙소에서 대화를 나눈다. 저녁을 위해 근처 마트에서 어떤 재료들을 구할 수 있을지 확인하러 간다. 수육이 먹고 싶어서 마트 주인에게 통삼겹살이 있는지 물어보려 하지만, 내 앞뒤로 서있는 마을 주민들이 그와 대화를 멈추지 않는다. 줄을 섰는데도 순서가 지켜지지 않는다. 이십여분이 지나니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한다. 사실 혼자 왔다면 말이 통하고 말고를 떠나서 이미 그들에게 불평했겠지만, 옆에 있는 예리가 그런 나를 불안하게 쳐다본다. 스페인어를 잘했다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또 가르치는 입장으로 늘 되새기는 문장이 있다. 말을 못 해서 차별당하는 것은 세계 어디를 가도 똑같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불어를 못해서 차별당했으면서 인종 차별이라고 불평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순례자가 비록 관광객은 아닐지라도, 이방인인 것은 늘 같다.




누군가는 이런 사실들이 너무 차갑다며, 인간애를 가지고 접근하면 안 되는 것이냐 반문할 수 있다. 모두가 행복한 평화로운 세상까지 논하지 않더라도, 조금은 더 세상을 따듯한 불로 밝힐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야박한 현실에도 우리가 제도를 조금씩 보완해 나간다면 '그럼에도 더 평등한' 삶을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져있다. 그게 실현 가능한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다. '더 평등한 사회'를 위해 본인 스스로 실천으로 옮기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자신보다 더 사회적 계급이 높은 사람들이 행동하지 않는다며 비판한다. 더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제도가 부족하다며 불평불만을 쏟아낸다. 자신의 자유는 조금도 양보할 생각 없이 타인의 자유를 옭아매려는 생각만 가득하다. 더 평등한 사회를 위한 개인의 자발적인 실천을 넘어서는 미덕은 없다. 생각해보자, 제도로 강제된 배려는 과연 미덕인가? 부자에 목에 칼을 겨누고 약자에게 돈을 나눠주고 더 베풀라는 요구를 하는 것은 미덕인가 악행인가? 그것이 과연 아름다운 사회일까? 개인의 실천에서 시작할 수 있는 해결책이 아닌 모든 떠다니는 말들은 피터팬의 네버랜드 따위와 다를 바 없다.


그저 신기루에 불과한 가치를 주장하면서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능력 있는 사람들과 부를 이룬 사람들을 악으로 규정하고 평등한 세상을 위한 희생양이 되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마트 바닥에 주저앉아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쓰면서 우는 아이와 다를 바 없다. 그러니 평등이라는 가치는 폭력이 맞다. 정말 인간애가 있는 세상은, 자발적인 실천이 있는 곳이다. 타인에게 '실천해야 한다'는 요구를 할 시간에, 어떻게 더 노력해야 스스로가 추구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고 행동으로 옮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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