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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Sep 18. 2022

28. 체계에 관한 오해와 진실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Molinaseca에서 Ponferrada를 지나 Camponaraya 인근 야영지까지 약 20km.


산 아래에 위치한 몰리나세카Molinaseca의 새벽은 어둡다. 여섯 시가 막 넘었을 무렵 네 명의 한국인이 숙소를 빠져나온다. 예리와 나는 몰리나세카로부터 약 8km 떨어진 도시 폰페라다Ponferrada에서 데카트론에 들러 시간을 보낼 예정이다. 순례길 내내 발가락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예리에게 다른 신발을 사보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같이 걷고 있는 선엽과 지훈은 쉬지 않고 더 멀리 걸을 것이다. 앞서가던 예리와 나는 갈림길에서 그들과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 정신없이 걷다 보니 인사할 타이밍을 놓쳤지만, 빠른 시일 내에 또 볼 수 있을 것이다. 여덟 시를 넘겨 데카트론 앞에 도착했지만 아직 문을 열지 않았기에, 근처 카페에서 추로스로 아침을 해결한다. 스페인에 와서 이 날 처음으로 추로스를 먹었는데, 설탕과 계피 가루만 잔뜩 뿌려진 한국의 추로스와 달리 찐득한 핫초코 한 잔이 같이 나온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나에겐 굉장히 만족스러운 아침이다.


카페에서 식사를 마치고 다시 데카트론 매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예리가 진열대에 놓인 여러 트래킹화를 신어보는 동안 나는 매장 내부를 돌면서 다른 장비들을 구경한다. 캠핑을 하다 보니 취사도구를 사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매일같이 감자 오믈렛과 바게트만 먹을 바에야 간단하게 조리를 하는 게 더 낫지 않나 고민해보지만, 아쉽게도 이번 배낭엔 더 이상 들어갈 자리가 없다. 다음에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것이라 되뇌며 다른 장비들로 눈을 돌린다. 다시 예리가 있는 곳으로 가니, 어제 같이 시간을 보냈던 한샘님과 광석님이 보인다. 두 분은 오늘 폰페라다에서 머물 예정이라며, 시간 괜찮으면 같이 점심을 먹자고 우리에게 제안한다. 근처에 맛있는 중식당이 있다고 한다. 어차피 수업을 위해 오후 늦게까지 도시에 남을 나에겐 좋은 소식이었다. 식당이 문을 열기까진 시간이 남았기에, 여유로운 마음으로 도시를 구경하기 시작한다. 새 신발을 덕분에 걷기가 무척 편해진 예리는 신이 났는지 배낭을 멘 채로 곧잘 돌아다닌다.

 




많은 사람들이 체계에 대해 크게 두 종류의 극단적으로 다른 오해를 한다. 첫째는 체계를 세상의 만능기로 여기는 것이고, 둘째는 체계를 삶의 감옥으로 여기는 것이다.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제도의 발전이 유토피아를 가져올 것이라 믿으며,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체계라는 것은 기득권층이 타인을 지배하고 유린하는 것을 '정당화하려고' 만들어 낸 장치라고 여긴다. 하지만 서로 반대의 생각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이 두 집단의 사고적 뿌리는 오히려 유사하다. 자신이 개인으로서 짊어져야 할 책임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출발점이 자기 자신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각자가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부속품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때문에 체계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혹은 무작정 체계를 비판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행동인지 모를 뿐만 아니라 삶의 체계를 스스로 창조하고 일구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체계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의존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지, 반대로 평가절하하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행동인지 알아야만 한다.


체계를 만능기로 여기는 사람들의 사정을 들어보자. 세상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차고 넘친다.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수준의 거대한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정부와 같은 거대 기관들이 법과 제도를 정비하여 이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매번 선거철이 올 때마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자가 당선된다면 세계가 더 나아질 것처럼 - 마치 유토피아가 이룩될 수 있다는 식으로 - 떠드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 사람들이 해결책을 알고 있는가? 당장 이슈가 되고 있는 환경 문제만 봐도 그렇다. 문명이 극단적으로 퇴보하는 수준으로까지 탄소 사용을 억제하지 않는 한, 탄소로 인한 지구 온난화는 멈추지 않을 것이며 설령 탄소세를 늘리고 탄소 사용을 줄이는 등 생활을 불편하게 만드는 가혹한 정책을 내놔도 미봉책에 불과하지 해결책이 아니다. 아무도 당장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모른다. 더 활발한 연구와 더 나은 기술, 더 나은 교육 등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 외엔 실질적인 해결책이 없다. 그럼에도 체계의 일선에 있는 지도자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은 자기 삶을 제대로 돌보지도 않으면서 체계가 무엇이든 다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강박이라도 있는 것인지, 자기 세뇌를 하려는 것인지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하지만 체계를 지휘하는 그들도 우리와 같은, 오히려 우리보다 경직된 사람일 뿐이다.


만약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제도가 발견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유토피아를 가져오진 않는다. 이런 종류의 체계는 개인이 아닌 집단을 다루기 위해 존재하며, 따라서 한 집단의 특성을 일반화하여 접근할 뿐 개개인의 특성을 반영할 순 없고, 해서도 안된다. 체계에 현혹된 인간은 타인을 군중, 혹은 집단의 일부로 여길뿐 개별적으로 피어난 인격체라고 여기지 않는다. 정치인들이 민생을 모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민생'이라는 절대적 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 개별적인 문제들을 겪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각자의 다른 목적으로 모여서 발생하는 시너지가 민생인데, 민생을 이해하려면 분리된 개인의 삶을 유심히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이 삶에서 겪고 있는 문제들의 가장 근원적인 원인은 무의식 가장 깊숙이 있기 때문에, 그 삶을 파악하기 위해서 얼마큼 깊이 들여다보아야 하는지 알 길이 없다. 따라서 모자라 보이는 정치인뿐만 아니라 나와 당신도, 우리도 민생이 어떻다고 정의 내릴 수 없다. 체계는 군중의 집단적 특성과 행동을 토대로 만들어질 뿐 개인의 삶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절대로 만능기가 될 수 없다. 제도와 체계는 사회적 안전망에 불과하며, 이 안전망도 완벽할 수 없다. 최소한의 안전망 이상으로 제도가 개입하려 들면 안 된다. 그것은 제도를 구세주라고 여기거나 반대로 인간을 인격체로 여기지 않는 것과 같다. 양쪽 다 오만함이다. 지금까지도 체계 유토피아를 이룩했다는 말이 들려오면 그곳은 항상 지옥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수업을 진행하는 동안 나를 제외한 일행은 식당 근처 카페에서 루왁 커피를 마신다. 나도 마셔봤지만, 루왁 커피만의 특유에 느낌은 잘 모르겠다. 정성 들여 커피를 내려주는 주인의 실력이 커피의 맛을 살리는 데 더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가게의 분위기는 좋았다. 카페 내부의 울림과, 바로 앞 도로에서 들려오는 소음 때문에 더 구석진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순례길을 걸으면서 원격 수업을 하기 가장 이상적인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카페 내부가 아니라, 바깥의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어딘가이다. 카페 내부는 와이파이가 있어도 느리거나, 핫스폿을 사용하자니 데이터가 안 터진다. 시끄러운 카페에선 수업을 진행할 수가 없고, 조용한 카페에서 나 혼자 떠들기도 그렇다. 그렇게 어느 건물의 벽에 기대앉아 수업을 진행하고 있으니까 한 할아버지가 와서 나에게 1유로를 건넨다. 구걸 중인 거지라고 생각했나 보다. 실시간으로 상황을 보고 있던 파트너 선생님과 학생이 엄청 웃는다. 내 몰골이 그렇게 거지 같은지 물어본다.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손에 태블릿을 들고 화상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 1유로를 벌었는데도 억울한 마음이 조금 생긴다. 족스럽게 점심을 마치고 오후 세 시가 되어서야 나는 다시 길을 나선다. 예리와 함께 걷고 있지만, 나는 다음 수업을 위해 중간에 적당한 장소에서 한번 더 멈출 것이다.  





체계의 존재 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마치 체계가 아무짝에 쓸모없는 감옥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거나, 모든 체계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말한다. 더 최악의 경우는, 사회적 해결책을 제시함에 있어 다른 체계와의 상호작용, 그 여파와 악용의 경우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류는 항해를 한다. 언제부터 '동물'과 분화되어 문명이라 불리는 인류만의 항해를 시작했는지 딱 정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처음부터 멋진 배로 시작한 문명이 아니라는 점이다.  눈앞에 터진 문제들을 기워내듯 해결해가며 여기저기 철판을 덧댄 배를 타고 문명은 흐른다. 우리가 타고 있는 문명이라는 배는 최신식 순양함이 아니라, 대양 한가운데를 표류하고 있는 고물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 가라앉을지 몰라서, 구멍이 나면 뭐라도 가져와서 막는다. 마찬가지로 각각의 체계들이 생긴 이유는 어떻게든 눈앞에 벌어진 문제 해결하기 위함이다. 과거에 생긴 제도가 현재에 와서 역효과를 더 많이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오히려 문명의 발전을 저해하거나, 인류의 평화에 장애물이 되는 제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제도를 뜯어고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비난이 아니다. 왜 그런 제도가 생길 수밖에 없었는지 들여다보고, 단순 파괴가 아닌 더 나은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을 정도로 고민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체계에서 파생되는 문제점들의 해결책을, 현재 문명에 적용 가능할 만큼 현실적이고 치밀한 그런 해결책을 제안할 수 없으면서 '현 체계는 잘못되었다'라고 비판하면 안 된다. 그러한 역효과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의 체계로 올 수밖에 없었는지 들여다보고 그 흐름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더 나은 방향을 찾을 수 없으며, 그저 자기 자신이 '깨어있는 척'하기 위한 행동에 불과하다. 결국 그런 행동의 동기는 어쭙잖은 인정 욕구가 전부라는 것이다. 런 행동은 마치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신호등이라는 체계가 효율적이지 않으니 지키지 않고 맘대로 주행할 것이라고 말하고 것과 같다. 그 결과는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종국에는 자기 자신을 (사회적) 죽음 혹은 도태로 내몰 것이다. 체계는 문명의 시발점이며, 문명의 산물이다. 개인의 얄팍한 시선에서 나온 '그럴 듯 해 보이는' 체계가 적용될 수 없는 이유는,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의 입장만 고려한 얄팍한 의견이기 때문이다. 물론 체계를 고치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그저 순응하고 고개 숙이고 살아가라는 말은 아니다. 늘 의구심을 지니고 살아가면서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는 것을 멈추지 않되, 오늘날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진 문명이 작동할 수 있는 것은 체계 덕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존중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Fonferrada에서 한 시간을 걷다 멈춰서 수업을 진행하고는 다시 한 시간 남짓을 걷는다. 7월은 해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순례자들은 보통 아침에 걷고 오후가 시작되면 이미 숙소에 들어간다. 이 시간에 걷고 있는 순례자는 정말 드물다. 순례길을 걸으면서도 책임져야 하는 일정은 이런 변수들을 만들고, 때문에 더 피곤하고 종종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그래서 길을 더 새롭고 재미있게 만들어준다. 어릴 적 즐겨하던 한 게임의 슬로건이 '게임이 쉬우면 재미가 없습니다.'인데, 게임 자체보다 삶을 통해 공감하게 된다. 사는 게 쉽고 편하면, 정말이지 재미없는 삶이다. 재밌는 삶은 늘 (인위적으로라도) 힘든 상황이 오기 마련이고, 그 상황을 이겨냄에 성취와 만족,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 챙모자로 더운 해를 애써 가리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내가 수업을 하는 동안 앞서갔던 예리는 이미 Camponaraya에 위치한 한 숙소에 체크인을 마쳤다. 나는 마을 근방에서 캠핑을 할 예정이기에, 잠시 그녀를 만나 같이 저녁을 먹는다. 간이역 정도의 역할을 하는 작은 마을이라 몰랐지만, 예리가 묵는 숙소 레스토랑이 여러모로 예사롭지 않다. 첫 번째로 종업원의 말투와 일하는 태도의 온도 차이였다. 그리 배고프지 않은 우리는 햄버거 하나를 나눠먹기로 했고, 서버는 다소 험하고 거친 목소리로 알겠다고 답했다. 이미 순례길을 걸어봤거나 나처럼 유럽에 살면서 타인에 태도에 그리 스트레스받지 않는 사람이라면 많이 놀랐을 정도로 그는 던지듯이 대답하곤 했다. 그러더니 지금껏 둘이서 한 메뉴를 시킨 가게들 중 처음으로 앞접시와 식기를 두 개씩 먼저 깔아주는 것이었다. 이 뒤로 굉장히 섬세하게 다른 손님들도 챙겨주는 모습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종국에는 식사를 마치고 길을 나서기 전에 물을 떠가려고 하자 그가 물통을 받아 한번 헹궈주고 물을 꽉 채워주는 것이었다. 이래서야 말투가 거칠다거나 공격적이라고 컴플레인을 걸기엔 너무 일을 잘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오히려 만족감을 높여주었다.


두 번째는 예리와 나눠먹은 햄버거였다. 오늘은 점심에도 미식을 한 날이지만, 맛있다고 유명한 집에서 맛있는 것을 먹는 것보다 아무 데나 와서 놀라울 정도로 맛있는 음식을 접하는 게 더 강렬하다. 햄버거에 들어간 패티는 적당하게 익어서 부드럽게 (고기가 살살 녹는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다) 넘길 수 있었고 구운 파프리카는 정말 고소하고 달았다. 세상에 맛있는 음식은 많지만, 내가 배우고 싶다고 느낄 정도로 간편하지만 동시에 맛있는 음식은 그렇게 많지 않다. 변수가 많은 일정 사이에서 이런 발견을 할 수 있다는 게 순례길의, 정확히는 순례하듯 사는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일 것이다. 즐거운 식사와 경험을 마친 나는 예리와 인사하고 조금 더 길을 나선다. 캠핑을 하는 경험이 많아지니, 이젠 지도를 둘러봐도 어디에 텐트를 올리기 좋은 장소가 있는지 감이 온다. 멀리 나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앞서 얘기했던 두 오류의 공통 전제는, 인간 개인은 사회 체계 앞에서 무력하다는 착각이다. 하지만 모든 체계의 시발점은 개인이다. 우리는 이미 체계가 존재하는 문명에서 태어나 사회화를 거치면서 마치 사회적 체계가 태초부터 존재했다고 믿고 (어찌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자기 자신의 '태초'부터 존재한 건 사실이니까), 그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것이 현대 문명까지 온 인류에게 있어서 유리한 생존 전략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신의 삶의 체계, 즉 삶의 신념이 바탕이 된 규칙을 세워 지키면서 살아가라고 말하면 매우 인위적으로 받아들이고, 어색해하기 마련이다.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지켜나가는 것은 어딘가가 '자연스럽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개인의 삶에 필요한 규칙들 중 일부는 사회적 규칙에서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도덕적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이것이다. 개인의 체계조차 제대로 만들 줄 모르는 사람이 어찌 사회 현상을 이해하고, 더 복잡한 사회 체계를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개인을 들여다볼 줄 모르면서 사회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거짓말쟁이 거나, 인간을 건 취급하는 오만방자한 폭군이다.


개인으로서 만들어나가는 체계의 의의는 사회적 성공이나 기계적인 삶이 아니다. 체계를 스스로 만들고 지켜나가는 사람이라고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성공하기 위해서 기계적인 삶을 살아갈 필요는 없다. 성공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스스로 삶의 규칙을 정하고 지켜나가고 있지만, 개인의 체계가 가지는 의의는 추락하는 시기에도 밑바닥까지 가지 않도록 도와주는 안전망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미라클 모닝, 운동하는 습관, 명상, 글쓰기 심지어 아침에 이불 정리하기 등 수많은 자기 계발서에서 반복적으로 권장되는 행동들은 본질적으로 삶을 체계화시키는 데 이바지하며, 거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점은 깔끔한 방이나 건강한 몸이 아니라 (이런 요소들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런 행동을 함으로써 자기 통제력을 늘릴 수 있다는 것이다. 체계적인 행동을 통해 하루하루 수많은 변수로 가득한 삶 속에서 '최소한 어느 정도'는 자기 삶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다는, 실천이 기반된 믿음은 불안감을 낮추고 힘든 시기에도 자신에 대한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게 만든다. (앞서 언급했듯이, 규칙적인 생활은 실질적인 호르몬 안정에도 기여한다.)


다만 이런 체계들은 타인이나 책, 사회적 시선에서 비롯되지 않고 스스로 정하고 지키는 것이 핵심인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체계는 (조언으로든 인정 욕구로 인해서든) 자기 자신을 위한 체계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체계를 만드는 데 가장 큰 독은 감정, 사회적 인정 욕구다. 이런 체계를 만들어 지키고 살아가면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줄 거라는 헛된 기대는 체계의 중요성을 무디게 만든다. 도덕성도 이 상황에 포함될 수 있다. 사회적으로 (어렴풋이) 합의된 도덕성의 바운더리를 지키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 시선으로 좋게 보이기 때문이지 도덕을 지키고, 타인을 나와 다른 객채로 존중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사회적 규율을 잘 지킬 뿐 도덕적이라고 볼 수 없다. 도덕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선 사회적 합의와 체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공공 도덕을 지키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공공 도덕의 위선과 빈틈을 파악하고, 스스로가 생각하는 옳은 도덕을 실천해야 한다. 그 출발점은 당연히도, 내가 타인에게 존중받고 싶은 방식으로 타인을 존중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회와 소통할 수 있고, 더 나은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는 개인의 체계를 세우고 실천하며 살아가다 보면 자연스레 그 체계를 존중하고 받아들이고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며, 그런 시너지가 쌓이고 쌓이면 사회의 새로운 체계로 이어질 것이다. 스스로가 실천하지도 못하는 체계를 사회적 체계로 만들자고 주장하는 것은 하루살이들의 일이다.

 

개인의 체계가 개인의 삶에서 전락하지 않게 하는 안전망의 역할을 한다면, 그 연장선에 있는 사회의 체계는 문명의 안전망의 역할을 한다. 즉, 사회적 체계는 유토피아가 아닌, '문명 후퇴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기능'이 전부라는 것이다. 세상은 오히려 수많은 개인들의 선택으로 구성되고 흘러가고 있다. 체계가 당신에게 보장해주는 것보다 당신이 스스로 선택하고 일구어나갈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많다. 이런 선택지는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해서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다. 변수가 너무 많아서 계산할 수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나마 인식하기 편한' 사회적 체계에 많은 무게를 싣는 것으로 보인다. 분명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인 것은 맞지만, '무엇이 세상을 바꾸는가?'로 우선순위를 매긴다면 개인의 선택이 단연 앞설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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