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네 시 무렵 텐트 정리를 거의 마쳤을 땐 예리가 도착해있었다.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이 동행은, 적어도 오늘은 무사한 모양이다. 그녀와 함께 길을 나선다. 달은 완전히 그믐이고 날씨도 맑다. 남은 순례길 위에서 오늘만큼 별 보기 좋은 날은 이제 없을 것이다. 조금 더 길을 걸어서 가로등이 없어서 사방이 어두컴컴한 흙길 위에 멈춰 선다. 밤하늘 사진을 몇 장 찍다가 땅바닥에 벌러덩 누운 채 하늘을 보고 있는 예리 옆에 나란히 눕는다. 천체 물리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은,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 하나하나가 다 별에서 왔다고 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타인과 우주를 모두 다른 대상으로 여기지만 결국 모든 것이 우주의 일부이자, 우주 그 자체로 연결되어 있다. 모든 고대 신화에서 해와 달과 별은 초월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는데, 고대 인류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이면서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초월적인 존재로 비치기 때문이다. 최첨단 망원경과 중력을 거스를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현대 인류도 여전히 별들을 갈망한다. 아마도 그곳이 우리의 고향이어서 그런 게 아닐까? 나는 은하수에서 죽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친구는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었지만, 사실은 지금 여기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지구가 은하수의 한 복판이다. 나는 예리와 함께 말없이, 때론 엉뚱한 소리를 하며 은하수를 바라본다.
동이 틀 무렵, 나와 예리의 상태는 완전히 엉망이었다. 이른 아침에 시작한 순례임에도 커피를 마시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간에 카페 한 군데를, 너무 낡아 보인다는 이유로 지나쳐버린 게 화근이었다. 앞으로는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하더라도 커피는 꼭 마시자고 다짐한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기 전이라 바람은 시원했지만, 걸으면서 눈이 계속 감겼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마을 어귀에 놓인 벤치를 하나씩 차지하며 드러누웠다. 유일하게 맨살이 드러난 얼굴을 스쳐가는 바람과, 잠든 내 모습을 다른 순례자에게 보이기 싫어서 폰페라다에서 샀던 다용도 헤어 밴드를 크게 펼쳐서 얼굴 전체를 덮어버린다. 먼저 자리를 일어난 예리는 그런 내 모습이 웃겨서 사진을 찍었고, 이 사진은 순례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 중에 하나가 되었다.
신은 인격체의 형상을 하면 안 된다. 나도 마음 한 편으론 그런 인격체로서의 신을 갈망하며 살아왔다. 지금도 여전히 그럴지도 모르겠다. 순례길을 걷기 전부터, 또 그전부터, 마음이 무너져 내린 그날부터 지금까지. 혹은 평생에 걸쳐서 한 생각(바람) 일 수 있다. 한껏 풀이 죽은 내 세계에 다시 싹이 틀 수 있게 만들 '신의 기적'이 나타나기를, 운명이라는 것이 나타나 얼음을 녹여주기를, 이제라도 움츠러든 마음을 달래고 세상이 무너지도록 펑펑 울 수 있게 해 줄 누군가가 나타나 주기를.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온 구절처럼, 다음 길 모퉁이를 지나면 나의 연인을 마주할 수 있기를. 내가 잃어버린 그것은 스스로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그것은 초월자만이 나에게 내려줄 수 있는 무언가라고 여기며 여기까지 걸어온 게 아닌지 자문한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선 이런 생각도 든다. 더 이상 운명이니 기적이니, 그런 ‘내 손을 벗어난 가치’를 믿으면 안 되겠구나. 버티면서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나를 구원해줄 누군가가 나타날 것이라고 희망을 품으면 안 되겠구나. 신은 인격체여선 안 된다. 우리를 어여삐 여기고, 동정하고, 품을 줄 아는 인간처럼 행동해선 안된다. 그는 오롯이 인과율의 형태로 존재해야만 한다. 물론 이것도 나의 자격지심에서 온 생각일 수 있다. 우리는 늘 자신의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생각들의 뿌리를 주의해야 한다. 그래도 그가 인과율로 존재해야만, 지금 내가 메마른 마음을 짊어지고 이 광야를 걷는데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나는 신의 기적을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존재이고 싶지 않다. 이 순례길의 끝이 나의 죽음 아닌 더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라면, 그것은 그의 보살핌이 아니라 길을 걷기로 결정하고 실천으로 옮긴 내 고집에 대한 결과이어야만 할 것이다. 그가 인격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언젠가 그를 만났을 때 그의 멱살을 잡는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 막연히 그를 원망하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다시는 자발적으로 나 자신을 그런 무력한 상태에 두지 않으리라.
조금 정신을 차린 나는 예리와 함께 다시 순례길에 오른다. 오늘은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Villafranca del Bierzo라는, '스페인 하숙'에 나왔던 마을을 거쳐 더 올라갈 계획이다. 예리와 나는 길 중간에서 잠깐 졸 정도로 심한 이 피로가, 아침에 바 하나를 그냥 지나치면서 커피를 보급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결론지으며 어디든 카페가 보이면 들어가자고 다짐한다. 한 시간을 가까이 걸었지만 어디에도 끼니를 때울 곳이 보이지 않는다. 에너지가 고갈된 나는 점점 걸음의 속도가 느려지다가 언덕 밑으로 비야프랑카가 보이자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마을은 분지처럼 산 아래에 위치해서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발견할 수 없었다. 가끔은 이런 순간들이 기쁨으로 다가오긴 하지만, 멀리서부터 보이는데 도통 가까워지지 않는 희망 고문이 더 낫지 않을까 고민하는 경우가 있다. 목적지가 눈에 보이면 페이스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기사, 살면서 우리가 헤쳐나가야 할 대부분의 길은 목적지가 멀리서부터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마을에 도착한 우리는 순례자 도장을 찍어주는 관광 안내소나 대성당엔 눈길도 주지 않고 카페에 들어간다. 커피를 들이켜자 그제야 눈이 맑아진다. 아이러니하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소위 '커피를 연료 삼는 기계 문명'에서 벗어나 자유를 느끼고 삶의 참된 의미를 고민하지만 커피에선 벗어나지 못한다. 이제는 현대 사회가 너무 정신없기 때문에 커피 없이는 못 버틴다는 변명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다. 아침까지 해결하고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 마을에 위치한 중형 마트로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의 목적지는 이 마을에서 약 8km 떨어져 있고, 숙소에는 공용 주방이 있다. 나는 예리에게 사용할 수 있는 주방이 있다면 재료를 구해서 한식을 해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 마을에 있는 중형 마트에서 고기를 포함한 재료들을 구하기로 했다. 평소에 20kg가량의 배낭을 메고 다니면 정말 의외의 장점이 있는데, 재료들을 가득 채워서 1~2kg이 더 무거워진다 하더라도 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보기를 마친 두 순례자는 비야프랑카 뒤로 펼쳐진 산의 계곡을 따라 길을 걷기 시작한다. 한 순례자의 배낭 위에는 대파 한 묶음이 올려져 있었다.
인격체로서의 신은 산타와 같다.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우리를 보살펴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우리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고, 세상의 고통과 불합리에 저항하며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를 ‘따스하게 보살피는' 존재는 말 그대로 어머니이자, 어머니의 어머니이다. 그는 아이들의 신이다. 모든 것이 두렵고 불안한 우리에게 “괜찮아, 널 헤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내가 너와 함께 할게."라고 말하는 목소리이다. 현대 종교의 흐름을 볼 때,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신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런 부분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종교는 우리에게 추앙과 믿음을 요구한다. 비단 종교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종교를 믿지 않아도 운명은 믿는 사람들이 많다. 초월적인 무언가가 인과율을 비틀고 기적을 만들어 내 삶을 바꿔주기를, 불안의 사막을 건너는 나에게 안식의 오아시스가 나타나 주기를. 그것이 사람들이 바라는 ‘운명’이자 ‘희망’ 혹은 ‘신' 아닌가? 오늘 하루가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나을 것이라는 희망 없이 어떻게 꿈에서 깰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그날은 언젠가 오고야 만다. 실낱같은 희망 하나 없이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움직여야 하는 아픈 시간들이 세상엔 존재한다.산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선물을 받을 거란 기대를 죽이는 날이 오는 것처럼. 신의 기적의 존재한다는 믿음은 우리를 보살핌에 기대게 만들고, 구원받기를 기다리도록 유도한다. 이미 자기의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음에도, (또한 그럴 책임이 있음에도) 행동으로 옮기기를 두렵게 만든다.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스스로의 삶과, 더 나아가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고 책임을 느끼지 않도록 만든다. 희망을 욕심하고 구원을 갈망하면서 스스로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게 하는 그런 마음이, 우리를 더 무력하게 만들고 더 많은 우울증 환자를 만들고 있다. 초월적 존재와 가치들에게 파묻혀 주체성이 질식당하는 삶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운명의 조우'를 기다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다.다시는 자발적으로 나 자신을 그런 무력한 상태에 두지 않으리라.
이미 식사와 커피, 당 충전으로 무장된 순례자들이 무서울 건 없었다. 아니,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찾아올 폭염이 두렵긴 하지만 당장의 문제는 아니었고, 오히려 두려운 만큼 서둘러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걷는 내내 예리와 쉬지 않고 수다를 떨다 보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폰페라다 Fonferrada에서 신발을 바꾼 뒤로, 예리는 훨씬 더 편하게 걷는다. 발가락 통증이 줄어들다 보니 자연스레 보폭도 늘고 속도도 빨라진다. 그녀는 종종 나보다 앞서서 걸을 때도 있는데, 때론 쫓아가기 벅찰 때도 있다. 숙소에 도착한 뒤 짐을 풀고 건물 앞 벤치에 앉아 수업을 진행한다. 그동안 예리는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한 순례자와 대화를 나눈다. 얼핏 들리는 그의 영어 억양이 익숙하고 반갑다. 순례길에서 만나는 유럽 사람들 중 유독 프랑스인이 드물었는데 오랜만에 만났다. 나는 수업을 마치고 짐을 정리하며 잠깐 대화를 나눈다.
잠깐 눈을 붙일 생각으로 침대에 누웠지만 일어났을 땐 이미 한 시간이 넘게 지나 있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낮잠이 긴 건 좋지 않다. 너무 깊게 잠들었던 탓에 몸을 휘청대며 공용 침실에서 나온다. 시계는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오늘 저녁에 만들 한식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일찍 주방을 차지한다. 양파, 마늘, 생강, 대파를 큼지막하게 썰어 냄비에 넣고 물을 부은 뒤 삼겹살을 통째로 담가 불을 올린다. 쌀을 씻어 다른 냄비에 담는다. 남은 대파는 큼직하게 썰어 다진 마늘과 고춧가루, 소금을 뿌려둔다. 오늘은 냄비로 밥을 하고, 수육과 파 겉절이를 먹을 것이다. 나는 한 번에 여러 가지 음식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동시에 여러 요리를 하면 손이 많이 가다 보니 그 과정이 몰입할 수 있고, 각 요리들은 서로의 아쉬운 점을 보완해서 시너지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손이 바빠져도 누군가가 나를 돕는 것을 바라지 않게 된다. 잡생각이 많은 내가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이다.
인과율로서의 신은 비록 차갑고, 계산적이게 보일 수 있지만, (그리고 운명에 비해 하나도 재미없어 보이는 것도 맞지만) 논리적이며 공명정대하다. 무엇보다 그 신은, 우리에게 박수받고 추앙받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를 추앙하고, 손뼉 쳐주기 위해 존재한다. 당신이 더 나은 삶을 만들려고 노력하면, 그것을 위해 무언가 상반된 가치를 포기하고, 장애물을 맞닥뜨리면 이겨내고, 이 길이 맞는 것인지 스스로 의심함을 반복하며 실천으로 옮기면 그 삶을 얻을 수 있다. 운명이 말하는 행복은 모든 사람의 것이지만, 인과율로서의 신은 행복이 행동의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운명적인 만남조차도, 그 중심엔 지금까지의 자신의 노력과 그 만남의 대상이 지금까지 해온 노력들, 그 이야기가 정말 가치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단순히 ‘짜잔'하고 나타난 운명이 아닌, 수많은 아픔과 외로움, 자기 의심을 견뎌온 삶이 지금 이 자리를 증명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 신은 우리에게 경고한다. 도망치는 삶에 낙원이 없을 것임을 경고한다. 스스로를 구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도 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자기 자신의 편이 되지 않으면, 아무도 편들어 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산타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혜성의 출현이 일종의 초월적인 전조로 여겨졌었지만 지금은 혜성의 정체를 알고, 그 궤도를 파악해 언제 상공에 모습을 드러내는지 계산할 수 있다. 현대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많은 현상들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초월적 가치'를 지녔다고 주장하면 안 된다. 인간과 인간의 이룩한 문명의 계산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라고 신비를 부여하면, 그 순간 우리는 스스로가, 그리고 인류가 가진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나는 신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고, 신비를 추구하는 이들을 비난하기 위해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 아니다. 내가 길 위에서 찾고 싶은 것은 오로지 하나, 모든 신비가로부터 유배당한 이들이 여전히 살아있어야 할 이유이다. 내가 운명을 믿었다면, 운명으로부터 버림 당한 나는 애써 숨 참으며 이 길에 오르지도 못하고 이미 꼬구라졌을 것이다.정말로 다시는, 자발적으로 나 자신을 그런 무력한 상태에 두지 않을 것이다.
순례길에서 처음 준비해본 한식은 성공적이었다. 음식을 만들면 늘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지만 한정된 재료와 주방 환경에서 뽑아낼 수 있는 최대한을 했다고 생각한다. 순례길을 걸으면 스테이크나 햄버거 이상으로 고기를 푸짐하게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다른 마을에서 재료를 미리 구해 몇 킬로를 걸어와 요리를, 특히 한식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될 것이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순례자들이 붙여둔 포스트잇들 사이로 수육을 해 먹었다고 한국어로 적어 붙인다. 우리가 떠난 뒤 도착할 다른 한국인들이 샘나길 바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