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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Nov 07. 2022

30. 감정은 진심인가? 진심은 감정인가?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Trabadelo 에서 O Cebreiro까지 도보로 16km, 이후 Sarria까지 자전거로 44km

새벽 일찍 예리와 길을 나선다. 마을을 나가 몇십 분을 걸으니 나타나는 편의점에 들어가 빈 속을 채운다. 정말 간단한 싸구려 요깃거리들만 팔지만 그게 아쉽다고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길을 나섰다가 카페가 없기라도 하면, 어제처럼 새벽길 내내 알찬 순례는커녕 잠과 피로와 싸우며 좀비처럼 걷게 될 게 뻔하다. 나는 어제 같은 실수는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레드불 한 캔을 들이켠다. 배를 채울만한 간식거리를 사고 편의점을 나오니 바로 옆에 위치한 호텔의 라운지 카페는 이미 열려있다. 트럭 운전수들이 몇 명 있는 걸로 봐서 24시간일 수도 있겠다. 방금 간식을 샀지만, 따뜻한 커피가 필요한 우리는 문을 열로 카페로 들어간다. 스페인에서 먹는 크루아상은 프랑스의 그것보다 버터 함량이 적어서 그런지 더 푸석푸석한 느낌이 있다. 반면에 스페인식 빵 오 쇼콜라(Pan de chocolate)는 딱딱한 고체 초콜릿의 프랑스와 달리 초코잼을 바른 느낌이라 다른 묘미가 있다. 나는 커피 한 잔과 초콜릿 빵을 주문하고, 예리는 늘 먹는 카페라떼(Cafe con leche)와 크루아상 하나를 가지고 테이블로 돌아온다. 간단하게 배를 채운 우리는, 아까 편의점에서 산 과자를 맛보기로 한다. 예리는 1리터짜리 초코 우유를 샀는데, 정말 기가 막히게 맛이 없다. 아무런 단맛도, 초코향도 없는, 물 섞은 단백질 셰이크 같은 맛에 나는 헛구역질하며 음료를 뱉어내는 시늉을 한다. 그게 그렇게 재밌는지 그녀는 계속 날 따라 한다. 커피 덕분에 잠에서 달아난 우리는 편의점에서 산 모든 간식들을 버려둔 채 길을 나선다.

 




요즘의 사람들을 관찰하면, 감정적으로 분개해야 진심이 우러나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정제된 태도는 가식적이고, 가슴이 끓어오르지 않음은 진심의 부재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정치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비판할 수 있겠지만, 투표로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을 정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선 결국 시민 의식과 같은 문제로 보인다. 그런 행동 패턴을 가진 유권자가 많아질수록, 정치인은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해 그들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시민 의식을 비판할 의도는 아니다. 이것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닌 (비록 한국이 더 두드러지게 만드는 요인들이 있지만) 세계적인 흐름일뿐더러, 사실 사람 자체가 가진 본능이다.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동요되지 않는 말들이 그들의 마음을 대변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집단적 광기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타개책을 찾는 사람들을 본심이 없는, 공감해주지 않는 위선자라고 몰아세우고 쫓아낸다. 이런 문제들은 아직 이성적 사고가 자리 잡히지 않은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더 자주 관찰되긴 하지만, 이성적 사고를 관장하는 전전두엽 피질의 발달이 끝나는 25세 전후를 아득히 지난 사람들도 여전히 이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단순 생물학적 문제라고, 젊어서 그런 거라고 손쉽게 생각하고 넘어가기엔 무리가 있다.


감정이 문제를 인식하는 동기가 될 수 있으나 해결로 이끌어주진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감정은 문제 해결 능력이 없다. 때문에 어떤 문제에 대해 감정적인 분개를 느끼는 것에서 벗어나 더 사고하지 않는 것은, 문제 해결 의지가 없다는 말이다. 해결 의지가 없는걸 진심으로 볼 수 있을까? 그 문제들이 이미 개인의 역량을 벗어났기 때문에, 혼자서 해결하려고 애써도 바뀌는 게 없을 것이라 변명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거대한 규모의 사회적 문제여도 개인적 실천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면 미봉책에 불과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미봉책은, 이후 더 큰 책임을 요구한다. 이러한 변명은 때론 자기 자신은 정의 로우나 그만큼 무력하고, 저 병폐에 빠진 사회를 고칠 수 없다는 반감을 자아낸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고칠 줄도 모르면서 어떻게 사회의 문제를 고친다는 것인가? 그런 방식으로 해결된 사회적 문제가 세상 어디에 있는가? 사실 그런 감정적 격앙을 꾹 누른 채 불평을 멈추고 이성적으로 해결책을 찾고 실행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더 상처받고, 더 극복한 사람들 아닐까? 위선자 혹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줄 모르는 철혈이라고 낙인찍힌 그 사람들이 사실은 ‘정제된 본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울부짖는다고 세상이 바뀌는 게 없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침묵하는 법을 배운다. 이렇게 진심에 대한 역설이 발생한다.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이, 혹여 맹독이라 할지라도, 그대로 토해내는 것이 진심인가? 아니면 본질적인 변화를 만들기 위해 감정을 다스리고 정제된 실천을 하는 것이 진심인가?  




어제 숙소에서 쉬던 예리는 내게 오늘 하루만 더 같이 걷자고 부탁했었다. 하루하루 행선지를 정하지도 않고, 누구와 같이 다니길 고집하지도 않는 나이고, 예리는 그런 내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게 부탁한 이유는, 오늘은 산 정상인 O Cebreiro에서 40여 킬로 떨어진 Sarria까지 자전거를 빌려 타서 선엽, 지훈과 합류할 예정인데 혼자 가기엔 무섭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가 내 상황을 알기에 어려운 마음이면서도 부탁을 하는 것에 고마워서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나는 자전거 타는 것을 정말 광적으로 좋아한다. 그녀와 동행을 할수록, 점점 내 개인 시간들이 부족해짐을 느낀다. 같이 걸으면서 글을 쓰기 위해 혼자 있는 시간을 요구할 수도 있지만, 예리가 그것을 신경 써줄 수 있다 해도 내가 글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이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모든 것은 내가 한 선택들의 결과이다. 어쩔 땐 이런 흐름들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 순례길을 걷고 있고) 또 너무 흐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중심을 잡아야 할 때도 있다. (마찬가지로, 그러기 위해 순례길을 걷고 있다.) 오늘의 긴 동행 끝에는 선엽과 지훈도 있을 것이고, 그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인사를 나눈 뒤 다시 나의 순례를 하자는 생각으로 예리와 걷는다. 그렇게 오늘도 순례자는 자신을 따라오는 발소리에 서사를 부여하며 길을 나선다.



예리는 이미 이 길을 한 번 걸었던 적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오늘 오르게 될 산이 이전에 너무 힘들었다며 잔뜩 긴장해있다. 처음 길을 걷는 나는 (그리고 세상에 둔감한 상태인 지금은) 그런 미래 일에 대해 무감각한 채 지금 눈에 보이는 길을 걷는다. 그냥 보이면 걷고, 힘들면 쉬면서 당장 놓인 길을 걷는 것이면 충분할 것이다. 힘들면 어떠랴? 지금의 나는 그게 필요한지도 모른다. 산 초입에 있는 마을에서 한번 더 휴식을 취한다. 나는 탄산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녀와 걸으면서 점점 자주, 콜라를 주입하기 시작한다. 그래도 고집은 남아서 제로 콜라를 고집하고 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우리는 오르막을 향해 발을 뻗는다. 산 정상에 위치한 O Cebreiro까지 가는 길에서, 첫 3분의 1 지점이 많이 가파르다. 대부분의 순례길은, 비록 그것이 산 길이라고 해도 차량이 오르내릴 수 있을 정도로 완만하게 이어지는 자갈길이나 흙길을 걷는데, 이번에는 사람 두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계단 형식의 가파른 길이었다. 나는 오랜만의 제대로 된 산길에 오히려 신이 나 경쾌한 음악을 틀고 뛰어 올라가기 시작한다. 지기 싫어하는 예리는 힘들다고 짜증내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실질적으로 힘든 구간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고, 그런 상황에 예리는 오히려 놀란다. 이전에는 그렇게 힘들었는데, 정말 쉽게 올라왔다는 것이다. 사실 세상 일이 그렇다. 코끼리는 어릴 때 매어진 족쇄를, 어른이 되어서 충분한 힘이 있음에도 풀어낼 생각을 하지 못한다. 단순히 '나이'의 문제는 아니지만, 우리는 과거에 겪은 힘든 일들에 대해 시간이 지나 충분히 힘을 기른다면 다시 대면할 수 있다. '그게 별 거 아니었구나. 아니, 적어도 지금의 나에겐 별 거 아니구나.'라고 흘려보낼 수 있을 만큼 단단해지지 않으면 과거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이제는 완만해진 산 길을 그녀와 함께 마저 오른다.





이 질문에 대해, 둘 중 하나만 진심의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위선의 영역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다. 나 자신은 비록 실천으로 옮기는 의지야 말로 진심의 핵심이라고 믿지만, 그렇다고 감정적인 끓어오름이 진심이 아니라고 선 긋지는 못한다. 지만 감정적인 끓어오름, 이를테면 분노라던가, 열등감이라던가, 무력감, 우울함 등의 근본적인 원인을 분석하면서 해결하려 들지 않고 그 상태에서 머무르는 것은 위선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그 현상이 반복되면, 자기 자신의 형편없음에 대한 방어 기제로 작동하는 것, 그리고 타인에게 위로를 직, 간접적으로 요구하는 것 이상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로 시간이 지나 이젠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어른이 되어서, 자신의 삶이 왜 이렇게 초라할 수밖에 없는지 일장연설을 한다. 자신이 행동하지 않음에 대한 후회일 수 있고 혹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세상에 대한 원망일 수도 있다. 둘 다 해당하는 사람도 있다. 결국 남은 게 후회와 원망밖에 없는, 세상에서 가장 흉측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비록 성공적으로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을지라도, 스스로를 구원하고 세상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어떻게 초라하게 싸우면서 살아왔는지, 사회적으로 보잘것없는 사람의 삶이라도 나와 내 주변의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아름답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가?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불합리함에 분개하는 것은 당연하다. 안 좋은 일을 겪었을 때 힘들어하고, 울고, 화내는 것은 인간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감정은 문제 해결 능력이 없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는 (규모가 개인적인지, 사회적인지를 떠나서) 공감 능력이 없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슬픈 일을 겪으면 제도를 보완해서, 혹은 체계의 변화를 통해 피해자들을 위로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사람이지 제도나 정책 같은 실재하지도 않는 개념들이 아니다. 우리가 느끼는 박탈감의 직접적인 요인이 제도가 아닌 문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한 사회적 문제라면 그 해결을 제도에게 요구하는 것은 비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무기력한 유기체로 전락시키는 행동이다. 나는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생각이 잘못되었으니 고쳐야 한다거나, 그런 사고가 자신의 생각과, 더 나아가 세상을 좀먹는 것이라고 분개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아프다. 분개하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분개한다. 그들이 제도라는, 실재하지도 않는 개념체가 세상의 피해자들을 위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어떤 사람도 그들을 어루만져주지 못했고, 결국 기댈 곳이 그런 무형의 가치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숨에 O Cebreiro에 도착했다. 시계침은 오전 열 시 삼십 분을 겨우 넘겼고, 여기서 자전거를 빌리려면 한 시 까지는 기다려야만 했다.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한국인 한 명을 만난다. 간단한 인사와 질문만 할 줄 알았던 그는, 예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불필요한 질문까지 건네는 그를 보며 심기가 불편해진다. 나는 불편함을 감추지 않는 사람이고, 예리는 그런 내게 민감하다. 내가 무엇 때문에 불쾌한지도 금방 캐치한다. 나는 프랑스에 있을 때도 그랬고,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더 친해지려 하는 것을 무척 경계한다. 그 사람이 우리와 친해지려고 하는 것은 나와 예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좋아서가 아니라, 단순히 한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언어와 문화가 다르다고 배제하는 것과 같다고 우대하는 것, 둘 다 인종차별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세계의 확장을 방해하고 더 움츠러들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래서 나는 예리와 선엽, 지훈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게 반가워하지는 않았고, 계속 마주치면서 그 사람들을 단순 한국인 이상의 개개인으로 알기까지 시간을 둔 이유다. 나는 편하려고 순례길에 오른 게 아니다. 아프더라도 내 세계를 더 확장하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 내게 그 사람의 태도는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예리는 그런 내 기분을 느끼고 (본인도 부담스러워한 건 맞다. 다만 나처럼 그걸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이 아닐 뿐) 빨리 그 자리를 탈출했다. 우리는 자전거를 빌려주는 마트 앞 카페에 앉아서 시간을 때운다.



자전거를 타기 전에 수업을 진행하려고 했지만, 생각을 고쳐 수업을 미루고 최대한 빨리 자전거로 출발하기로 한다. 자전거로 오르내리는 산길은 걷기 위한 순례와는 궤가 다르다. 같은 거리라면 더 빨리, 쉽게 갈 수 있지만 같은 시간 동안 체력 소모는 훨씬 크다. 이미 자전거를 몇 시간씩 타면서 지방 여행을 다녀본 나는 괜찮지만, 자전거 경험이 적은 예리에겐 힘든 길이 될 수 있다. 갑작스럽게 수업을 취소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굉장히 미안한 일이지만, 동행이 있다면 우선순위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 학생들은 내 상황을 이해하고 흔쾌히 괜찮다고 답해주었다. 빌린 자전거들의 상태는 그렇게 양호하지 않다. 내가 프랑스 여행을 다니면서 타는 자전거가 순례길에서 걷기 위한 저렴한 트래킹화라면, 이 자전거들은 쪼리처럼 불편하다. 기어 변환도 부드럽지 않고, 밟는 만큼 잘 나가지도 않는다. 수업을 미룬 건 좋은 선택이었다. 정상에 도착해서 자전거를 빌렸다고, 내리막만 타고 내려가면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Sarria까지 도착하려면 계속 이어지는 산길을 몇 시간 동안 오르내려야 했고, 자전거를 자주 타보지 않은 예리에겐 더 고역일 수밖에 없다. 자전거를 탄지 겨우 십 여분이 지났지만 그녀는 벌써 울상이 되어 저 멀리에서 천천히 따라온다. 이런, 최소 두세 시간을 더 타야 한다.




감정적인 위로가 가진 힘은 위대하다. 삶의 역경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사람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지도 따위가 아니라, 그 사람의 아픔을 안아줄 수 있는 포옹,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는 듯 옆에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 같은 것이다. 자신의 초라함이 누군가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진다고 느끼는 것은, 궁극적으로 앞으로의 문제를 극복해나갈 에너지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을 안아줄 수 있는 것은 사람이지 사회 제도가 아니다. 따뜻한 사회 제도는 존재해선 안 된다. 차가운 체계 속에서 따뜻한 사람들이 남아야 한다. 온기는 상대적이다. 따뜻한 제도와 따뜻한 사람이 공존할 순 없다. 제도가 따뜻해는 것처럼 보이는 공동체에선 자연스레 사람이 그만큼 차가워지는 법이다. 사람이 사람을 안아주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미덕이다. 그리고 미덕은 제도화될 수 없다. 버스에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미덕으로 남기에 아름다운 것이지 그게 제도로 강제된다면 아름다울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것은 아름다운 가치를 당연한 가치로 전락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런 시도들 중 제대로 성공한 것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감정이 가진 따스함을 해결과 체계에서 찾으면 안 된다. 두 가지 다 진심의 영역이지만, 서로 작동하는 방식은 다르다. 감정의 영역은 감정의 영역으로 둔 채 본질적 해결을 위해 차갑고 현실적인 태도와 실천을 만들어나가는 것,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 진심으로 삶을 대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감정적 불안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혀를 씹으면서도, 영혼 없이 텅 빈 인간처럼 해결만 주장해서도 안된다. 우리가 변화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임상심리학자 조던 피터슨은 그의 저서에서, 사람들은 본인이 기르는 강아지가 아프면 병원 데려가서 주사를 놓고, 어떻게든 철저하게 약을 먹이려고 노력하지만 본인이 아프면 약을 먹기는커녕 처방전을 약국에 내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런 태도를 버리기 위해, 자기 자신을 훈육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은 정말 어렵고, 그렇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예리와 자전거를 타는 동안, 내가 철저하게 지킨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내가 받은 자전거는 나의 책임이고, 그녀의 자전거는 그녀의 책임이다. 종종 자전거를 끌고 오르막을 걷는 구간이 있었는데, 그녀가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그녀의 자전거를 내가 끌어선 안된다. 나는 그런 식으로 그녀를 연약한 존재로 전락시키면서 점수를 따고 싶지 않다. (아, 나도 사람이라 점수를 따고 싶긴 하다. 오해 마시길.) 이 태도는,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감정에 대한 실천일 것이다. 나의 감정은 예리의 자전거를 대신 밀어주고 싶을지라도, 그건 당장 편하더라도 궁극적으로 그녀가 자신의 자전거를 책임질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이다. 그녀가 당장 고맙다고 반응해도, 이 험난한 길이 끝나면 그만큼 덜 뿌듯할 것이다. 그녀는 앞서가는 나를 보며 먼저 가도 좋다고 했지만, 나는 속도를 줄이거나 그녀와 거리를 줄이면서 계속 동행했는데, 그녀가 책임질 수 없는 일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예리가 타는 자전거가 낡아서, 기어 변환 중 체인이 껴서 고장 나는 경우에, 자전거에 대해 잘 모르고 이미 몇십 분을 타느라 스트레스가 많을 상태인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택시나 숙소에게 연락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자전거를 고친다는 것은 지금의 예리가 책임질 수 있는 영역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늘 자전거 위의 예리의 임무는 스스로 자전거를 몰아 무사히 숙소까지 가는 것이고, 그 외의,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변수들만 내가 개입하는 것. 그런 태도가 예리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 더 넓은 세상을 선물할 수 있을 것이다. 예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그래야만 하는 문제들에 내가 껴드는 것은 이타심이 아니라, 인정받고 싶다는 내 욕구와 이기심에 불과하고 예리를 더 무력한 위치로 전락시키는 행위이다. 물론 이것도 결국 내 이기심이다. 나는 힘들어도 해낼 줄 아는 예리를 원하지, 무력한 예리를 원하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숙소에 도착한 예리는 선엽과 지훈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린다. 간은 이미 여섯 시를 훌쩍 넘었다. 선엽과 지훈은 애써 공용 주방이 있는 숙소를 찾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들을 위해 맛있는 요리를 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손을 씻고 바로 음식 준비를 시작한다. 오늘의 메뉴는 국물이 자박한 닭볶음탕과 간장과 고추장으로 각각 양념을 잡은 제육이다. 물론 냄비로 찐 쌀밥도 같이 있다. 요리를 좋아하는 지훈은 내 옆에서 조리를 돕고, 선엽은 뒤에서 재료 준비를 돕는다. 숙소까지 오는 내내 고생한 예리는 방에 올라가 잠시 재정비를 한다. 앞으로의 순례길이 또 어떻게 달라질지는 모르지만, 당장 내일은 이들 모두와 작별을 할 생각이다. 다시 나만의 리듬을 찾아야 한다고, 내 안의 순례자는 계속 말한다. 다시 혼자가 될 시간이 온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날 예정인 그들에게, 나는 최대한 늦잠을 자서 퇴실 시간이 가까워져서 길을 나설 계획이라고 말한다. 오늘 저녁은 이를테면, 송별회 같은 것이다. 맛있는 저녁 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숙소 테라스로 나와서 수다를 떨다가 같이 사진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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