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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Nov 08. 2022

31. 절실함이라는 가벼움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Sarria에서 Barbadelo까지 5.1 km


부산한 소리에 잠에서 깨고 다시 잠들기를 몇 번, 침대에서 나왔을 땐 숙소에 두세 명의 순례자밖에 남지 않았다. 이미 예리, 선엽, 지훈 세 사람은 새벽 일찍 떠났을 것이다. 열심히 늦잠을 자려고 심지어 노력까지 해봤지만 이제 막 여섯 시 반이 지났을 뿐이다. 평소에 네 시에 일어나는 순례자에게 이 정도면 충분히 사치라고 생각하면서 납득한다. 이미 조용해진 숙소를 돌아다니며 평소보다 더 천천히 짐을 정리하고 나갈 채비를 한다. Sarria부터 산티아고 대성당까지는 100km가 조금 넘는 정도만 남았다. 길 위에서의 여정은 어느새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 오늘은 다시 나의 속도를 되찾기 위한 순례이다. 문제는 얼마나 걷는지가 아니다. 얼마나 생각할 수 있는지가 핵심이다. 다시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만끽하며 순레자는 천천히 길을 나선다.


숙소를 나오니 주변이 전부 밝다. 주로 해가 뜨기도 전에 어두운 길을 나서기 때문에, 출발하는 마을을 천천히 구경한 적은 정말 드물다. 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더 늦추며 거리를 구경한다. 커피를 마시지도 않았는데 마을 외곽이 보이자 다시 길을 돌아 마지막에 본 카페로 향한다. 비록 순례길의 필수품, 카페인을 섭취하고 있지만 잠에서 너무 깨진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은 걸음도 생각도 느리게 흘러가는 하루이고 싶다. 당장 느끼는 허전함에 주의를 기울인다. 내가 나 자신을, 내 내면의 목소리를 다시 발견하는 것은 시간이 걸린다. 또한 그 기다림 동안 허전함이 찾아온다. 처음엔 허전함이 나를 정말 불안하게 했었지만, 이 잠깐이 지나면 더 중요한 만남이 올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더 이상 슬프지는 않다. 아니, 아프더라도 그런 감정들의 필요를 깊이 알고, 소중히 느끼기에 나는 무너지지 않는다. 아닌가? 그냥 더 이상 무너질 게 없는 걸까. 쓴웃음을 짓는다.





자신의 삶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지 못한 채 성인으로 쫓겨나면, 꿈이 있고 목표가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들 자체가 멋있어 보인다. 하루하루 숭고한 목적 없이 기계처럼, 사회에서 요구하는 대로 살아가는 나와 달리 그 사람의 눈은 반짝인다. 왜 그런 꿈을 가졌는지 일장연설을 듣노라면 삶에 대한 저런 진지함이 없는 나의 모습은 뭔가 초라해 보이기도 하다. 적으면서 생각하니, 그건 단순히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일 수도 있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그런 사람들처럼 될 수 있었고 그것이 거짓된 삶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꿈이 있다고 말을 내뱉은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힙합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힙합의 음악성보단, 대부분의 힙합과 랩 음악이 너무 뻔하고 비슷한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달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만의 길을 가겠어'라느니, '나는 남들과 달라'라느니...


가수 (그리고 아티스트) 이찬혁이 쇼미 더 머니에 나와 뱉은 화제의 가사와 일치한다. 정말로, 쇼미 더 머니가 세상을 망쳤다. 자신의 고유성을 지키려는 문장들을 허울뿐인 트렌드로 만들었고, 사람들은 자신의 고유성이 무엇인지 발견하지도 않은 채,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한다. 자신의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지도 않았고, 왜 자신이 남들과 다른지, 어떻게 다른 점을 보여줄 수 있는지 고찰하지 않은 채 그저 자신은 다른 존재라는 말만 뱉어낸다. 그 현상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자신만의 꿈이 있다고 포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당장 실천하는 게 있는지, 자기 자신을 어떻게 훈련 중인지, 적어도 구체적인 계획이라도 있는지 물어보면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그런 것들은 힙합이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절실하다고 말하지만 아무런 행동의 변화도 없다. 그들은 꿈을 가지는 것의 책임을 모른다. 그저 타인에게 그런 '쿨한' 사람으로 대우받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나는 꿈이 있다는 사람들을 위선자로 낙인찍었다.




마지막으로 혼자 걸은 게 그리 오래된 건 아니지만, 순례길은 하루하루가 낯설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사실이 나를 정말로 자유롭게 만들었다. 때론 같이 걷는 가족의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들에 누워있는 강아지를 쓰다듬기도 한다. 지나가다가 보이는 철로에 흥미가 생겨, 오 분, 십 분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낸다. 혼자 걷는 순례길이 이렇게나 여유롭냐면, 사실 그렇진 않다. 특히 20kg에 가까운 배낭을 메고 느긋하게 풍경을 바라볼 여유는 5분도 채 안된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금세 어깨가 아플 테니까. 이건 조금 더 고집을 부려보는 것이다. 빨리 걷는 순례길 속에 놓친 건 없을까, 구태여 불편함을 감수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한 시간을 걸어 주변 풍경이 예쁜 순례자 숙소 앞에서 가방을 내려놓는다. 아직 숙소는 닫혀 있었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오히려 좋다. 근처에 의자들이 놓인 정원이 있으니 앉아서 수업을 하고, 글을 쓰다 보면 언젠가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수업을 마치고 숙소에 들어온다. 주인이 정말 친절하고, 숙소는 최근에 생겨서 깨끗한 시설을 구비했다.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다시 정원으로 나와 멀리 펼쳐진 풍경을 가만히 응시한다. 코를 스쳐가는 바람 속에서 시원한 수풀과 햇빛에 데워진 공기를 느낀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방도가 없지만, 나는 이런 시원하고도 따뜻한 냄새를 좋아한다. 테라스 뒤로 숙소 주인이 운영하는 푸드 트럭이 있다. 그가 준비한 수제 버거와 음료로 가볍게 점심을 해결한다. 가만히 노래를 틀어놓고, 토해지는 문장들을 노트에 기록하며 몇 시간을 보낸다. 뒤로 다른 순례자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모두 프랑스인이다. 나는 그들이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모두 이해하면서, 절대 반가워하지도,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티도 내지 않고 그저 구름만 쳐다본다. 지금은 아무런 말도 할 줄 모르는 벙어리이고 싶다. 프랑스인이 아니라 한국인이 옆에 있다 해도 말을 걸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고민을 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해답을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드물다. 그 해답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은 더욱 적다. 대부분 사람들은 절실하다고 말하면서 실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치 자신은 그대로 있어도 백마 탄 왕자님이 언젠가 나타날 것이고, 그 사건으로 자신의 삶이 완전히 뒤바뀌면서, 선망하던 사람들의 삶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은 저런 기다림 말고는 스스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실질적으로 시도해볼 만한 해결책을 제시하면 그런 시도를 왜 할 수 없는지 변명하기 바쁘다. 그래서 행동으로 옮긴 게 있는지 물어보면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그래 봐야 한두 번 시늉하듯 해본 노력을 열거한다. 정말 자신의 삶에 열렬한 지, 자신이 처한 문제들을 이겨내고 꿈에 한 발짝 다가가는 게 절실하냐 물으면, 그렇다고 한다. 이런 태도가 어떻게 절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절실함은 언제 그렇게 경박한 단어가 되었나?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그리 고귀한 단어도 아니었다. 절실함은 멋있어 보이지만 허상에 불과한 대표적인 단어 중 하나이다. 절실함이 변화의 시발점일 수 있지만, 변화를 주도하는 핵심은 아니다. 절실함은 감정의 영역이고, 모든 감정들이 그렇듯 절실함 또한 휘발성이 강하다. 그것보다 훨씬 강력한 무기는 시간을 들일 줄 아는 것이다. 시간을 들이는 것만큼 무서운 힘이 세상에 없다. 우리는 이것을 짧게 줄여서, 습관이라고 칭한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남들보다 덜 절실하더라도 더 실천으로 옮기고,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면서 자신의 삶을 발전시킨다. 오히려 습관을 형성하는데 절실함은 독처럼 작용하기도 한다. 절실함은 자기 자신에게 어느 정도 수준의 극적인 변화 모델을 제시하고, 그 기준에 부합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대개 이런 감정을 통제할 줄 모르는 사람은 당연히 적절한 기준치를 잡을 줄 모르고, 스스로의 못난 현 위치만 부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처음부터 무조건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 길 기준) 800km의 끝에 도착하겠다는 결심으로 순례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첫날 피레네 산맥을 넘고 큰 좌절에 빠지게 되는 것과 같은 이유다. 때론 본질적 변화를 위해 절실함을 거두는 전략도 필요하다. 습관이라는 것은 정말 사소한 실천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섯 시가 지나고, 푸드 트럭에선 주인이 저녁 식사로 빠에야를 준비하고 있다. 아까와는 하늘 빛깔이 조금 바뀌었다. 시간의 흐름을 구경하는 동안 몇몇 순례자는 나에게 말을 걸었고 대화가 길어지진 않았다. 그들은 내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하기 위한 순례길이 아닌, 혼자 걷고 생각하기 위한 여정이라 말해도 전혀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말을 걸었다는 것에 미안해하지도 않고, 그저 순수하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본다. 대체 어떤 고민이길래 길에 올랐는지, 그렇게 여기까지 걸으면서 어땠는지 짧게 대화를 주고받는다. 저녁 시간이 되어도 그들과 합류하지 않는다. 나는 내 테이블에서 와인을 즐기고, 그들은 각자 친해진 사람들과 테이블을 잡고 대화를 나눈다. 음식을 갖다 주는 주인 외에 아무도 내게 신경 쓰지 않았고, 나는 이것이 참 좋았다.




절실함을 드러내려는 사회의 가장 큰 모순점은, 정말로 본질적인 변화가 절실한 사람이라면 그걸 내뱉을 생각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걸 남들에게 풀어내고 인정받아봐야, 자기가 실제로 변한 게 없다면 누구보다도 스스로를 역겹게 생각할 것이다. 반대로 스스로 많이 노력해도 타인이 부정적으로 평가할까 봐 두려움에 빠지기도 한다. 그 '변화' 자체를 입 밖에 내기가 끔찍하게 무섭다. 정말로 절실한 사람이라면 타인에게 자신을 포장하고 합리화할 시간에 더 행동하라고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남들에게 휩쓸리며 살아가다가 생기는 변화가 아닌, 스스로 필요성을 깨닫고, 주도하는 변화에는 바람이 불지 않는다. 정말로 소리 하나 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남들이 신경 쓰지도 않는 구석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고, 변화를 떠벌리는 대신 만족할 때까지 스스로를 훈육시킨다. 안 좋은 버릇을 고치고, 새로운 습관을 형성한다는 것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한 번 변했다고 만족하지도 못한다. 우리 몸과 삶의 항상성은, 잠시 방심하는 순간 우리를 다시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때문에 변화는 과거의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이며 '내가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가 아니라, '내가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 어떤 습관을 만들어야 할까'를 고민하는 삶이다.


절실하다와 절박하다 라는 동사 원형은, 그나마 과거형으로 사용될 때 가치를 지니는 듯하다. 이미 이룩한 변화들에 대해, 그때는 그것이 절박했을 뿐 어떤 대단함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이 동사의 옳은 사용 예가 아닐까? 때문에 나는 꿈이 있다는 사람들을 위선자로 낙인찍는다. 꿈이 있다는 것은, 그걸 입으로 내뱉는 것 그 이상이다. 나는 자기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실천으로 옮길 줄 아는 사람들만을 응원할 것이다. 그들에게 장애물을 피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 나에게 말고,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런 절실함으로 그렇게 아파하던, 과거의 내 모습이 있었다.




일요일인 내일은 순례길을 걸으면서도 온라인 과외를 하는 나에게 유일한 휴일이다. 시간에 쫓길 필요가 없기에, 행선지를 정하지 말고 걷고 싶은 만큼 실컷 걸어보자고 다짐한다. 해는 서쪽으로 내려앉고 있었고, 여기까지 걸어온 순례자의 그림자가 동쪽으로 길게 늘어졌다. 마주칠 생각보다, 끌고 온 생각들이 훨씬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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