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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Nov 10. 2022

32. 좋은 사람의 정의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Barbadelo에서 Porto Marin을 지나 Palas de Rei까지 약 42km


전날 미리 정리해 둔 짐을 들고 어두운 거실로 나오니 비스킷과 보온병에 든 커피가 보인다. 다시 길을 떠나는 순례자들에게 알찬 아침까지 챙겨주진 못하지만, 간단하게 배를 채운 음식이라도 둔 주인의 배려다. 오늘은 얼마나 걸을지, 어디까지 갈지 정하지도 않았다. 그냥 발이 닿는 대로 걸어보자, 숨을 크게 들이쉬고 다시 내뱉는다. 순례자는 길을 떠난다. 오전 네 시가 고작 넘었을 뿐이었다.  



어두운 밤길 속에서 어디에도 다른 순례자의 기척은 없었다. 산티아고 길 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어울리다 며칠 만에 혼자 걸으니, 덮어두었던 문제가 다시 고개를 내민다. 나는 아직도 내가 살아야 할지, 그냥 죽을지 정하지 못했다. 왜 계속 살아야만 하는지, 그 답을 찾지 못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안 좋은 충동은 많이 줄었지만, 사실 그것은 다행이라고 말할 게 아니다. 나는 이 상황 또한 문제라고 인식할 수밖에 없다. 나를 이 길 위로 내동댕이칠 수밖에 없었던 그 질문은, 아무리 부정하고 모른 척 해도 언젠가 다시 내 가슴에 박힐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어영부영 순례길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긴 아픔 끝에 얻은 게 하나도 없는 것이고, 다시 통증이 심해지면 그때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제대로 매듭짓지 않은 지금의 나를 원망할 것이다.


나는 프랑스에 오기 전부터, 프랑스에서 몇 해를 보내고 지금까지도 구체적인 장래 희망이 없다. 어떤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할지는 나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추상적인 목표는 구체적인 행동 강령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무엇이 좋은 사람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야만 했다. 지금의 나는 정말이지, 좋은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나 자신에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기에, 이 고행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순례자는 상념에 빠진다. 나는 어떤 좋은 사람이고 싶었나?




좋은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면, 나는 늘 두 가지 모델을 제시한다. 강한 사람, 그리고 맑은 사람. 이 두 가지가 모두 충족되어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강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아니, 삶의 풍파가 그를 흔들더라도 그는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 자신만의 신념으로 세상과 부딪힐 줄 안다. 만약 그 신념이 잘못된 것이라 산산조각이 난다 해도, 무엇이 부족한 것인지 스스로를 훈육하며 더 좋은 신념 체계를 쌓을 줄 안다.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제시할 수 있고,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지적할 줄 안다. 타인에게 '강한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함이 아닌, 스스로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욕심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더 겸허하게 자기 자신을 정제한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책임지려고 한다.


하지만 강한 사람은 너무 날카롭게 벼려져 있어, 종종 주변 사람들에게 두려움이나 경계심을 사는 경우가 많다. 자기 자신을 훈육하기 위해선 매 순간 긴장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긴장감은 의도치 않게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면서, 좋은 에너지를 전달하지 못한다. 때문에 동시에 맑은 사람일 필요가 있다. 맑은 사람은 주변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채우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준다. 강한 사람, 맑은 사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을 했을 때, 맑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강함이 결여된 맑음은 위험하다. 맑음이 무너져 내리면, 무너진 자기 자신에게나 주변 사람들에게 모두 맑음보다 더 강력한 독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부정성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때론 병적인 이기심까지 생겨 주변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혹은 그 맑음 자체가 독이 되는 경우고 있다. 타고난 맑음으로 주변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를 들어줄 줄 아는 것은 좋을 수 있지만, 자신을 잃어버리면서까지 타인의 감정에 몰입하는 것은 재능이 아니라 저주이다. 자신의 감정이 무너지지 않도록 방벽을 쌓을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좋은 사람에겐 밝은 에너지를 전달할 줄 아는 맑음뿐 아니라 어떤 상황에도 무너지지 않는 강함, 그 두 가지 자질이 모두 요구된다. 맑기만 하거나 강하기만 해선, 절대로 좋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순례길을 처음 걸었을 땐 다섯 시만 넘어도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했는데, 여섯 시가 지나도 해가 나오지 않는다. 길에 오른 지 한 달이 넘었는데 벌써 겨울이 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만큼 서쪽으로 걸어왔기 때문이다. 기준 시간은 같더라도, 서쪽으로 약 700km를 걸어왔으니, 해는 그 거리만큼 늦게 뜨는 것이다. 여전히 순례자는 보이지 않는 길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것은 개들의 울음소리다. 순례길에 걸쳐져 있는 시골집을 지키는 개들은 어둠 속 인기척을 경계한다. 다들 잘 묶여있을 거란 생각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길 몇십 분,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내 바로 앞까지 와서 길을 막고 으르렁댄다. 그에겐 목줄이 없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나라고 놀라지 않을 수는 없었다. 십여 초를 대치하니 개는 낮게 으르렁대기를 계속 하지만 더 다가오지는 않는다. 나는 비록 좁지만 순례길 한복판이었고, 여기까지 그의 영역 일리는 없었다. 집 바로 앞이 아닌 여기까지 나와 짖었다는 것은 그도 잠결에 많이 놀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개의 경계를 풀기 위해, 아주 천천히 힘 풀린 오른 주먹을 그에게 가까이한다. 주먹을 무력 사용으로 생각하는 인간과 달리, 개들에겐 손톱이야 말로 무기이다. 그러니 내 냄새를 맡고 경계심을 풀게 하기 위해선 이 방법이 더 좋다. 그에게 충분히 냄새를 맡도록 하고, 낮은 음성으로 천천히 말을 건다. 스페인어는 모른다. 한국어로 말을 걸으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는 못 시키겠지만, 적어도 내 음성을 통해 공격 의도가 없다는 사실을 전달할 수 있다. 그렇게 몇 분이 흐르고 나는 개를 지나쳐 다시 길을 나선다. 그는 자리를 한 발짝도 비켜주지 않았지만 짖거나 으르렁댐 없이 내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는 비록 전문가가 아니지만 짧게나마 개들의 소통 방식을 알고 있었고, 일을 그르쳤을 경우 부상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만약 내가 공격당하는 심각한 상황이라면 그 개를 죽일 수도 있었다. (나는 캠핑 장비를 들고 순례를 하기 때문에 당연히 캠핑 나이프도 차고 다닌다.)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는 놀랐을지언정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었다. 내가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긴장하면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릴 수 없다. 놀랐다고 소리를 지르거나 (무거운 배낭을 멘 채) 뒤로 돌아 도망치는 것이 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가장 현명한 결정에, 그래도 지금까지 강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 게 헛된 일은 아니었구나, 생각하며 약간의 뿌듯함을 느낀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해는 순례자에게 인사했다. 언덕 아래로 깔린 구름은 파도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막연하게 좋은 사람이고 싶다 말한다. '저는 저에게도 남에게도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어요. 그냥 제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남들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되잖아요.' 자주 듣게 되는, 가장 허무맹랑한 말이다. 남들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된다는 말이 어떻게 저렇게 쉽게 나올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저 문장은 모순 투성이라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다. 피해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타인에게 도움 되는 일들만 골라서 한다고 한들, 본인이 생각했던 결과 그대로 나오는 경우가 있나? 그런 것들을 질문하면 대부분은 대답을 피한다. 애초에 현실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은 없다. 정말 최소한의 단위라도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그 결과가 경우에 따라 다시 더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상황을 초래하기도 한다. 즉, 우리는 무엇이 남들에게 피해를 주고 안 주는지 규정할 수 없다.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타인에게 피해를 안 주는 것이 아니라, 의도를 떠나서 주게 된 피해에 할 수 있는 만큼 책임을 지는 것이 전부다. 저런 안일한 태도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기 싫다는 말일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원하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서로 간의 네트워크가 형성된 인류 문명 안에서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반드시 누군가에겐 이득을 주고 다른 누군가에겐 피해가 된다. 정말로 남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으면 문자 그대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거나, 철저하게 고립되면 된다. 과연 가능할까?





내가 가진 스마트 워치는 운동 앱을 켜지 않아도 10분 이상 걸으면 자동으로 기록을 시작하는데, 이건 일시 정지를 할 수 없다. 내가 멈추고 잠시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꺼지는 것이다. 괜히 조금이라도 더 걷고 쉬자는 오기로 길을 나선 지 네 시간이 되었지만 절대 멈추지 않는다. 눈앞으로 강을 가로지르는 큰 다리가 보인다. 안개가 심해서 그 주위로는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다리의 끝에 도착하니, 포르토 마린 Porto Marin이 보인다. 여기까지 왔으니 잠시 쉬고 갈까, 생각하다가 마을에서 빠져나오는 수많은 순례자들이 보인다. 여기까지 오면서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는데, 짧게 어지러움을 느낀다. 이 마을에서 숙소를 찾을 거라면 상관없지만, 쉬기만 하고 다시 나오면 순례자들이 더 많이 보일 것이다. 그것은 절대 내가 원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언제까지 더 걸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이 마을에는 들리지도 않기로 결정했다. 순례자는 물을 시원하게 들이켜고 짧게 스트레칭을 한다. 이제 막 하루 이틀 걸어본 순례자들은 내 상대가 될 수 없다. 몸통보다 큰 배낭을 메고 산길을 뛰어오르기 시작한다.


정오가 다 되었을 때 나를 멈춰 세운 것은 예리였다. 선엽과 지훈도 있었다. 그들은 아침에 포르토 마린에서 출발한 뒤 Palas de Rei 인근에 위치한 숙소에 도착해서 체크인 시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렇게 금방 만나게 될 줄 몰랐던 우리는 서로 당황한다. 무엇보다 내가 여덟 시간 가까이 쉬지 않고 걸었다는 사실에 지훈은 혀를 내두른다. 다리가 그렇게 아프지는 않다. 배가 엄청 고프거나, 피곤하지도 않다. 오히려 걷는데 집중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 재밌기까지 하다. 예리와 대화를 나누다가, 이미 이 앞쪽으론 모든 숙소들이 예약이 찼다는 사실을 확인된다. 체력이 남더라도, 7월의 순례길은 정오가 지나면 극악하게 더워진다. 나는 이 숙소에서 그들과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함께 체크인을 기다리면서 너스레를 떤다. 예리는 피곤함 하나 없는 태연한 내 모습에 한량 같다며 사진을 찍는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뭘 그렇게 까다롭게 파고드느냐고? 이런 태도는 사실 아무것도 좋게 만들지 못할 뿐 아니라 더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안 좋은 상황에 처하면 '나는 이럴 의도가 아니었다'며 행여 결과가 최악으로 치닫더라도 본인은 좋은 마음이었으니 똑같이 피해자일 뿐이고,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회피한다. 그것은 좋은 사람의 정의가 아니다. 좋은 사람의 시작점은, 수단의 옳고 그름이나 결과의 이해를 떠나서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아쉽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 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당장 눈앞의 책임을 피하면 어떤 형식으로든 다시 당신 앞에 떨어지게 된다. 빌어먹을, 심지어 우리는 우리가 한 행동뿐 아니라 하지 않은 행동에도 책임을 질 때가 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좋은 선택을 하는 사람과, 그걸 부정하며 상황을 더 거지같이 만드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남들의 책임지지 않는 모습을 비난할 필요 없다. 그건 당신의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신은 저 두 가지 옵션에서 당신만의 선택을 찾으면 충분하다. 무엇이 더 좋은 사람일지 고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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