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승 Aug 21. 2023

33. 강자와 약자의 합리적인 세상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Palas de Rei에서 Melide까지 약 15km


우리는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숙소에서 나온다. 이미 걷기 시작한 순례자들이 많이 보이지만, 오늘은 목적지까지 멀지 않아서 충분히 여유를 부려도 괜찮다. 팔라스 데 레이 Palas de Rei 시내에서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길을 나서기로 결정한다. 성당이 가까워지는 만큼, 나는 어느 정도 앞으로의 일정을 정해둔 상태였다. 별 일이 없다면, 일단 멜리데 Melide까지 도착하고 수업을 진행한 뒤, 십여 킬로미터를 더 걸을 생각이다. 그리고 내일 다시 멜리데로 돌아와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50km 정도를 한 번에 주파할 계획이다. 식사를 마치고 길에 다시 오른다. 어제 이미 40km를 쉬지 않고 걸어본 나는 일행들에게 오늘 목적지까지 약 15km를 쉬지 않고 가보자고 제안한다. 순례길에 오르기 전에도 운동을 꾸준히 했던 지훈과 나는 신나는 음악을 틀고 배낭을 멘 채로 뛰어간다. 방의 무게는 줄지 않았지만, 낑낑대던 나는 더 이상 없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선 나이나 국적과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마주치고, 각자가 가진 경험들을 공유한다. 각자만의 이유로 길 위에 있고, 때문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새로운 발견이다. 가 더 뛰어난 사람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모두가 다른 삶의 모습일 뿐이다. 여기서 경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밝은 에너지를 가지고 서로 응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꿈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문명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좋은 사람이 무엇인지 고민한다는 것은, 누군가는 좋지 않은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뛰어난 인재가 있다는 말은, 누군가는 그 반대편에 위치한다는 뜻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격차가 존재한다. 어떤 것들은 선천적인 요인이나 환경에 의해 발생하고, 다른 것들은 개개인의 역량이나 이룩한 업적에서 비롯된다. 그중에서 강자와 약자라는 구분은 이 단어가 생기기 전부터, 지성체가 등장하기 전부터 존재했으며, 현대까지도 가장 화자가 되고 있는 개념 중에 하나이다.   


나는 짧고 직관적인 문장을 좋아하지만, 아직 두 단어를 구분시켜주는 핵심적인 요인을 어떻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자본의 차이, 빈부격차가 그 둘을 구분 짓는가? 돈이라는 요소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부유하다고 무조건 강자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때론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파멸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영향력은 어떨까? 영향력이 큰 사람일수록, 즉 더 많은 사람들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칠수록 강자라고 할 수 있을까? 영향력이라는 요인은 단순 자본력보다 더 포괄적이기에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하지만 큰 영향력을 가지고도 안 좋은 선택에 떠밀려가는 사람들을 종종 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사람은 스스로를 세상의 피해자고, 약자라고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에 대비되는 강자는 과연 누구인가? 말마따나, 기득권인가? 기업 총수와 재벌들인가? 나와는 다른 정치 이념을 가진 사람인가? 다 집어치우고, 우리는 어떤 강자를 추구해야 하는가? 혹은 어떤 부류의 사람을 강자라고 인정해야 하는가?





Melide까지 도착은 순식간이었다. 두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이 도시는 순례자들 사이에서 삶은 문어 요리가 가장 맛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순례길을 걸으며 지나치는 여러 마을에서 삶은 문어를 먹어볼 수 있지만, 여기가 진국이라는 것이다. 일을 마친 뒤엔 우리 넷은 한샘, 광석과 함께 문어 요리를 먹기로 했기 때문에 내 가방을 예리와 일행이 묵는 숙소 앞에 잠시 내려둔다. 숙소까지 오면서 츄로스를 파는 카페를 발견했다. 그곳으로 돌아가 테라스에 앉아서 이제 막 시내에 도착하는 다른 순례자들을 구경한다. 지쳐보이는 한 꼬마 아이가 건너편 벤치에 드러눕는다. 온 몸의 힘이 쭉 빠져있는 그 모습이 영락없이 조각상 피에타 같아서 웃음이 터졌다. 스페인에서는 츄로스에 찐득한 핫초코를 찍어먹는다. 이 카페의 튀김은 바삭하고 녹인 초콜릿은 묵직하다. 만족스러운 나와 예리는 츄로스 몇 개를 더 주문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수업을 마친 두 시 무렵에 이미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감사하며 가장 유명한 문어 요리집으로 향한다. 늦은 점심임에도 여전히 식당은 부산하다. 큰 솥에서 삶고 있는 문어의 냄새가 코 끝을 간지럽힌다. 우리는 삶은 문어와 고추 튀김, 맥주 몇 병을 시킨다. 다 같이 잔을 부딛히고 잘게 조각난 삶은 문어를 하나씩 입에 넣는다. 어디에서도 먹어보지 않았던 맛이다. 무엇보다 그 부드러움이 내가 알던 문어가 맞나 싶을 정도다. 다른 곳에서 먹어본 적이 없으니 여기가 정말 가장 맛있는 곳인지 알 길은 없다. 접시가 금새 동나는 것을 보며 우리는 급하게 문어 한 접시를 더 주문한다. 술이 들어가니 나는 점점 더 긴장이 풀리면서 피곤함을 느낀다. 오늘은 그냥 이렇게 즐기고, 여기서 묵는 것은 어떨까? 광석과 한샘은 본인들이 예약해 둔 숙소에 침대 한 개가 빈다며 여기서 같이 묵는건 어떻냐고 제안했다. 나는 이들과 나누는 대화가 즐겁기 때문에 그러자고 했다. 여기서 묵는다면 내일의 계획이 틀어질 수 있지만, 차선책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왜 굳이 강자가 되는 것을 추구해야 하는지 묻는다면, 나는 그럼 약자가 되는 것을 추구해야 하는 거냐고 반문할 것이다.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 생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할 순 없다. 두 가지 상반되는 가치가 있을 때, 둘 중 하나만 반드시 선택할 필요는 없지만, 극단적으로 가지 않는 선에서 둘 중 어느 한가지를 추구할 것인가는 본질적인 문제다. 그렇다면 자발적으로 자기의 삶을 갉아먹는 약자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끽해봐야 극히 드물 것이다. 요즘의 세상은 약자 갑질 사회인지, 자기 자신을 약자라고 포장하고 그러니 자신을 향한 양보와 배려가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정말이지 신물이 난다. 사람의 모든 행동에는 동기와 목적이 있다. 나는 그런 부류를 관찰하며, 왜 스스로를 계속 무력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인지 자문했다.


예를 들어, 가정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유년 시절에 피해자였던 경우가 압도적으로 다수다. 즉, 가정 폭력이나 아동 학대는 대물림이 일어나는 유형의 악행이다. 이로 인해 고통받는 아이들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사실이지만, 이런 불안정한 가정환경에서 자라온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대물림을 하는 경우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즉, 같은 위협적인 환경 안에서 자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대로 머무르지 않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이다. 대다수가 가정 폭력의 대물림을 멈추지만, 여전히 같은 악행을 물려받는 사람들은 자신의 성장 환경을 탓한다. 자신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핑계한다. 가정 폭력은 이해를 돕기 위한 강렬한 예시일 뿐, 더 사소한 일들에도 성장 환경에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들은 차고 넘친다. 왜 스스로를 계속 무력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인가?



그게 편하니까. 그냥 편해서. 다른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세부적으로 파고들면 당연히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모든 이유들은 본질적으로 '편의'에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동물은 편의를 추구한다.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생존을 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문명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야생과 달리 문명에서의 사람은 발전을 추구할 줄 안다. 발전이라는 가치는 편의의 정 반대쪽에 위치하고 있다. 왜냐하면 발전을 위해선 자신이 만든 안전 구역에서 벗어나야 하며, 이 과정은 반드시 스트레스와 무력감, 바보가 되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다. 존 스튜어트 밀이 역설한,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배부른 돼지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강자와 약자를 분류한다면, 스스로의 영적 발전,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위치가 아무리 낮다 하더라도, 더 강한 사람이다. 자신의 안전 구역을 넘어 발을 뻗는 법을 배워나가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무리 높은 사회적 위치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안전 구역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점점 삶을 후퇴시킬 수 밖에 없고, 그렇게 삶의 주도권을 빼앗기면서 점점 약자로 전락한다. 아니, 그런 태도 자체가 스스로 약자라는 것을 증명한다. 삶을 이끌고 주도하기 위한 결정을 하는 사람들을 강자라고 여기고, 육체적 편의라는 늪에 빠져 스스로의 삶을 점점 위축시키려는 사람들을 약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광석과 한샘의 숙소에 같이 묵을 수는 없게 되었다. 숙소 측에서 거절했기 때문이다. 침대가 남았고, 비용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 하더라도 예약하지 않은 인원은 안된다고 한다. 이미 이 도시에서 묵을 생각으로 저녁 늦게까지 같이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나는 예리와 지훈, 선엽이 머무르는 숙소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내일 동선을 위한 기가막힌 차선책이 떠올랐다. 오늘 여기서 묵은 뒤 내일 대성당 방향으로 더 걸으면 마지막 날이라고 계획한 모레에는 필연적으로 40km 내외 밖에 걸을 수 없다. 하지만 만약, 오늘 지나쳐 온 마을 다시 돌아간다면 어떨까? 마지막 날 50km가 아니라 60km 정도를 걷기 위해 역행을 해보는 것이다. 어차피 대성당 방향으로만 걸어야 한다는 규칙은 없다. 각자의 순례길은 그저 각자의 순례길일 뿐이다. 나는 이런 어이없는 계획에 헛웃음을 들이키며 짐을 정리하고 잠에 빠진다.


날이 너무 더워서 저녁 대신 먹은 화채


현재 당신이 사회적 강자인지 약자인지와 별개로, 삶의 발전을 추구하기 위해 더 많은 짐을 짊어지려 노력하면 당신의 정신은 점점 강해지고, 귀찮음과 편의를 추구할 수록 점점 약자에 가까워진다. 신의 삶에 어떤 문제가 봉착했을 때, 쉽고 단순한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된다. 무작정 어렵고 번거로운 방법을 찾으라는 것이 아니라, 쉽고 어려움을 떠나 가장 본질적으로 보이는 해결책을 쫒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또한 본질적인 방법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의 문제를 고쳐나가고 삶을 확장함에 의의가 있지, 타인과의 경쟁과 우열 다툼을 강조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런 관점을 전제로 가져간다면, 사회적 위치로 결정되는 강자와 약자는 사실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다. 더 많은 발전을 실현해서 이미 어느 반열에 오른 강자는 약자를 억압하지 않고, 오히려 약자 중에서 강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건강한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능력이 뛰어난 인재들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켠다. 그들의 잠재력에 투자를 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이 걸어온 길 위에서 새로운 동료를 만났다는 반가움, 그들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다는 기쁨, 그리고 그들의 성장이 다시 나 자신의 성장에 기여한다는 설레임과 더 나아가 세상을 한 뼘 만큼은 더 좋게 만들 수 있다는 안도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32. 좋은 사람의 정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