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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Jun 02. 2024

PYGMALION EFFECT

A FLOWER GIRL: 피그말리온 효과 | 순간에서 지속으로의 길들임

[The Woman with the Chrysanthemums]  2024. 6. 2. PROCREATE. IPAD DRAWING by CHRIS


사람들은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을 보면 귀여운 커트머리를 발랄하게 휘날리며 스쿠터를 타던 <로마의 휴일 Roman Holiday>을 떠올릴 것이다. 아니면, 티파니를 고급 예물의 중심에 두게 만든 <티파니의 아침을 Breakfast at Tiffany's>에서 커피와 크로와상을 들고 보석을 유심히 응시하는 장면을 연상할 수도 있다. 나는 그녀를 보면 욕설과 사투리를 방자하게 섞어대며 분주하게 꽃을 팔던 엘리자 두리틀(Eliza Doolittle)이 생각난다. 기가 막히게 천박한 변두리 태생의 소녀를 새로운 연구 겸, 재미 삼아, 내기 삼아 고상한 숙녀로 변신시켜 보겠다던 언어기호학자의 경박한 마음도 모두 빼앗아 버린 순박한 시골의 꽃 파는 소녀 말이다.


조지 버나스 쇼(George Bernard Shaw)의 희곡 피그말리온 Pygmalion을 각색해서 내놓은 작품 <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는 연극으로도 봤고 영화로도 여러 번 봤다. 하지만 언제나 생각하듯, 영화든 연극이든 본체의 모습인 피그말리온 신화의 감흥만큼 강렬하진 못한 것 같다. 여인들을 끔찍이 싫어하던 피그말리온의 마음을 한 순간에 녹여 사랑에 푹 빠지게 할 만큼 아름다웠던 갈라테이아(Galatea)의 모습이 감질나게 설레어서 그럴 수 있다.  


한 남자의 자기애가 만들어낸 형상이자 거울의 모습을 지닌 또 다른 여인, 주연 배우를 대체할 존재를 만든다고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이용해 자기가 탄생시켰던 '시몬'에게 혼을 다 줘버린 영화 <시몬 S1m0ne: Simulation One> 속 영화감독 빅터 타란스키(Viktor Taransky)럼,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와 닮은 꼴의 존재에게 관심을 표하고 애정을 주다가 결국엔, 그 존재에게서 자신보다 더 깊은 자기애의 우물을 발견한다.

석정을 두드리는 한 조각가의 손을 본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는 대리석 덩어리를 보면 하얀 돌의 표면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숨겨진 어떤 존재를 먼저 보게 된다고 했다. 그 존재를 찾아 돌의 사면을 긁어내다 보면 다비드 상이 되기도 하고 말 형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가 사랑했던 것이 미소년이었기에 다비드(David) 상이 되었겠지만 말이다.


어떤 존재를 다듬는다.


그림이든 조각이든 영화든 글이든 일이든 사랑이든 자신이 쏟는 것에 기울이는 정성과 애정은 그 사람이 던지는 시간과 노력의 일부가 된다. 지울 수 없는 습관이나 버릇처럼 자신의 행동이 매일의 숨 쉬는 공기가 되고 발 담그는 흙이 될 때 이미 그 사람은 대상에 깊이 빠져버린 상태에 놓여있게 된다. 삶의 끌을 던져 타인의 몸을 만지는 순간 떨어져 나가는 먼지들은 그의 피와 땀이 될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몸을 주면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길들임이라는 단어가 두렵다. 길들여지면 더 이상 날아갈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피해 갈 수 없는 길들임이 도처에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해보고 싶고 느끼고 싶고 펼쳐내고 싶은 것들과 또 얽어매고 있는 것까지 모든 것이 나를 길들이고 있다.


사람만 봐도 그렇다. 웃음소리, 말투, 찡그린 얼굴, 몸짓 하나하나에 익숙해지고 그것이 존재의 기억으로 남아버리면 그것 또한 사랑이란 이름의 길들임이 될 수 있기에 길들임이란 좀처럼 피하기가 쉽지가 않다. 한 사람을 길들인다는 것은 자신도 상대방에게 길들여지는 과정이 아닐까. 피그말리온 효과가 되는 거겠지. 길들임이 영원한 열망으로 피어나길 바랐던 한 사람의 마음처럼 그 마음 닿은 곳에서 한 떨기 꽃이 피어날 것이다. 아프로디테의 숨결을 받아서 깊은 형상으로.

2004. 9. 10. FRIDAY




바이오컴퓨터의 출현과 신인류의 사랑

살아있는 뇌세포로 만든 바이오컴퓨터(Bio Computer)가 현실화되고 있다. 복잡한 네트워크와 생체 신호를 전달하는 신경세포를 이용하여 생체적인 컴퓨팅 시스템을 구축하면 현재의 전자식 컴퓨터보다 에너지 효율성이 높아지고, 데이터의 병렬이나 분산처리를 속도감 있게 진행할 수 있다. 바이오 컴퓨터시스템, '브레이노웨어(Brainoware)'는 인간의 목소리를 인식하고 수학적인 계산도 가능하다. "Brainoware"는 "Brain"과 "Hardware" 또는 "Software"의 합성어로, 생물학적 뇌와 컴퓨터 기술을 결합한 개념을 나타낸다. 주로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 Brain Computer Interface)와 신경 네트워크 컴퓨팅이나 신경조절장치 등을 설명할 때 사용된다. 바이오컴퓨터는 의료적인 신경질환 치료만이 아니라 인공지능, 재활공학, 로봇공학, 인공 뇌 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기 위해 개발되고 있으며, 뇌의 기능과 이해에 대한 밀도 있는 접근과 함께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에 대한 새로운 장을 마련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으론, 인간의 뇌 신호를 읽어서 인간 대신 다른 기기를 제어하거나, 신경 네트워크를 활용한 컴퓨팅 시스템을 사용하여 특정 신경회로를 자극해 뇌기능을 조절하고 개선하는 '브레이노웨어(Brainoware)'는 이제 인간과 같은 모습의 AI의 출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뜻한다. 특수 세라믹 골조로 인간의 형태를 만들어 피복껍질을 입힌 신경망을 구성하고 뇌를 복제한 뒤에 컴퓨터 칩을 심고 인공피부를 씌우면 나와 같은 인간이 세상에 돌아다닐 수 있다. 캡슐에 누워서 감정만 맛보고 육체는 분리된 상태에서 타인과 만난다면 인간과 사이보그의 역전현상으로 봐야 할까? 가끔 인간이 아닌 기계와도 사랑이 가능할까 생각해 보곤 한다. 피그말리온의 석상이 에로스의 키스를 받아 사람이 되었듯이 과학으로 만든 기계가 AI의 키스를 받아 사람이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기대하던 사랑의 해피앤딩일지 문득 궁금해진다.




감정적 길들임 Emotional Taming

나는 사랑을 하더라도 상대에게 길들여지지 않기를 바라곤 했다. 스무 살 성인이 되어 나이의 제한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자유(自由)'는 이상적인 단어였다. 생활에 얽혀서 생존을 위해 살아야만 했던 시기엔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거나 활동이 구속받지 않고 지낼 권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살아갈 궁리와 해결할 일만이 덩그러니 놓인 세상에서, 당면한 현실을 타개할 책임이 무거웠다. 마음이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 나는, 새롭게 밀려드는 감정에 마음이 떨리긴 했어도 자유와 사랑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무조건 자유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가올 때면 상대의 좋은 모습보다는 흠을 찾았다. 상대가 못나 보이거나 미워 보이면 핑계를 대고서 이별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한번 감정을 싣고 나면 그런 감정의 무게를 내려놓는 것도 쉽지 않았다. 동시에 시작되었건 뒷북을 쳤건 간에, 한 사람의 감정이 사라지고 한 사람의 감정이 남아있다면 그 불균형은 어디엔가 상처를 남기면서 쉽게 해소가 되지 않는다.


사랑에는 책임이 따른다. 내가 시작한 사랑에는 선택할 권리도 있고, 선택한 것에는 책임이 있음을 인정한다. 이제와 돌아보니 미래를 바라보며 세계를 구축한 뒤에 사람들을 돌보았어도 문제는 없을 것 같다. 그랬다면, 내 주변의 생명은 일찍 종결되고 좀 더 세상으로 나가는 자유를 빨리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 대한 도리와 현실의 괴리감 속에서 고민하다가 스스로를 종결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당시 순간의 결정에 있어선 후회가 없어야 했기 때문에 내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랐다. 굳이 타인의 인간사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었지만, 가슴속에 번민할 것을 알고 있어 삶의 방향을 선택해 놓고는 탓할 바가 나 자신 밖에 없다는 모순에 괴로워했다. 삶에서 지기로 한 책임의 부담감을 내려놓자고 해도, 막연하게 내 삶을 찾아야겠다고 생각만 했지 실제적인 방법은 알지 못했다. 탁 놓는 그 마음! 이렇게 글을 쓰는 것처럼 쉽게 해결되는 것은 극적인 인생사가 아니다. 뜨거우면 내려놓으면 될 것을 컵을 꼭 쥐고서 심하게 흔들리는 차 안에서 흘러넘치는 뜨거운 물에 허벅지를 데이는 것이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이다. 사람들과 함께 살면 적막에 사로잡혀 천장만 바라보는 외로움은 없겠지만, 조용하게 사색할 시간이 줄어드는 불편함은 벗어나기 어렵다.




창작적 길들임 Creative Taming

무엇인가를 만들기 위해선 대상을 정확하게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시각적인 사고가 어려운 이에겐 세상의 소리를 듣는 인내가 필요하다. 청각적으로 인내가 힘들다면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각이 예민한 나에게는 보는 것이 먼저였다. 사물의 형태와 내용을 흡수한 뒤 감각기관의 정리를 통해 하나의 사고관을 만들어내는 작업은 생각이 주어지면서 습관처럼 해온 일이었다. 타인의 말을 흘려듣는 것은 주제에 관심이 없을 때 가능한데, 집중해서 들을 때 한 고집이 있어선지 타인의 말에 그대로 순응하는 것은 아직까지 잘 되지 않는 태도이다. 타인과의 토론에서 반론을 가지는 것은 수긍하는 이해가 부족해서 일수도 있고 아직까지 내 안의 반항기가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신만의 목소리를 쏟아내기 위해선 그 안에 쏟아붓는 시간이 요구된다. 보통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선 만 번을 지속적으로 반복해야 숙달이 되고 변화가 이뤄진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은 1일을 24시간으로 고려했을 때 416일이고, 1년 1개월 20일이라는 시간적 계산이 나온다. 보통의 인간이 일상을 살아가는 패턴을 감안해서 하루 8시간을 평균 숙련기간으로 정리하면 3년 4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남들처럼 쉬거나 노는 날까지 따진다면 4.8년 정도 걸릴 것이고, 8시간이 길어서 4시간이나 2시간으로 줄이면 10년이나 20년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것보다 적은 시간을 투자하면서 단시간의 습관과 장시간의 바람이 타인에게 반향을 일으킬 정도로의 울림이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물론 만 시간이건, 천 시간이건, 백 시간이건 한 시간이건, 오랜 시간을 연마하고 관찰하는 습관을 기르면 시간을 꿰뚫는 예지가 생길 수도 있다. 보통 세월을 거슬러 명작으로 불려지는 작품들과 달리, 현대에서 급조된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시간을 할애하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의 바스락거리는 공허와 가벼운 내용이 공감이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는 게 너무 답답해서 잠도 자지 않고 머리를 게걸스럽게 정리했던 이전의 시간은 사고의 샘물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우물물은 계속 퍼야 솟아 나오지, 물을 걷어내지 않으면 말라버린다. 거의 1년 반은 미친 듯이 보면서 하루의 절반을 써댔다. 쓸수록 꺼낼수록 넘치도록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스스로도 감당이 안 됐다. 훈련을 계속하면 생각의 근원까지 파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생활의 숙련을 위해, 자유를 얻기 위해 삶의 정기만 흡수하고는 정리하는 시간은 점차 반비례로 줄어들었다. 그렇게 생각도 조용해졌고, 괴로운 순간이 아문 줄 알고 세상 밖으로 나간 나는 그 시간을 잊었다.


감정을 잊긴 했어도 괴로움은 응어리로 남아있었다. 번민과 괴로움을 날려 보내기 위하여, 그리고 스스로 얽매였던 시간들을 놓아주기 위해서, 지금에서야 나의 작업을 하기 위한 밑작업으로 다시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창작적인 길들임의 시간과 과거를 돌아보는 작업은 뜨거운 열정보다는 냉정한 판단과 분석이 필요하다. 스스로를 발현하는 시간까지 하루를 짧게나마 정리하는 습관을 가지는 시간의 길들임은 내벽을 두텁고 풍요롭게 만들 것이고, 과거로부터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 것이다. 어제를 돌아보며 차분해지는 자각이 들었다. 깊이감 있는 내벽을 쌓는 것에 현재의 시간을 길들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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