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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Jun 07. 2024

THE ART OF LOVING

CRITIC PARADOX | 비평가의 역설, 극이 본 것은?

[THE ART OF LOVING : MATERIAL IS LOVE] 2024. 5. 10. PROCREATE. IPAD DRAWING by CHRIS



- 영화영상 및 문화비평, 그림 그리기


초창기 직업전선을 구할 때 취미와 특기란에 썼던 몇 가지들이다. 대학교 때 씨네 21, Films, Film2.0, Max Movie, KBS 라디오 등 다수 투고란에다 영화비평이나 연극, 뮤지컬 및 공연 영상에 대한 감상을 쓰고, 공짜표를 받으면 도돌이표처럼 문화생활을 즐기곤 했다.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 국어전공이었는데, 어느 날 따로 부르셨다.


"너 글은 좀 쓰냐?"

- 아뇨.

"괜찮은 거 같은데. 놀지만 말고 꾸준하게 써 봐라."


국어시간에 강독이 있었다. 아이들이 번갈아가며 조선시대 가사(歌辭) 문장을 읽어 내렸다. 연속적으로 읽는 분단별 대항이 있었다. 판소리나 시조도 읽었다. 아이들은 한자가 섞인 글을 읽기 어려워했다. 내 순서가 오면 길게 읽어 내렸다. 이기면 청소를 면제해 준다던지, 오분 정도 일찍 수업을 마칠 수 있는 혜택이 있었다. 아이들이 귀찮다고 눈짓으로 미루기도 했고, 선생님께서 강독하라고 지목하기도 했다. 목소리가 좋다는 평을 자주 들었던 나로선 읽던 책을 밑에 숨기고 목소리를 뽐내곤 했다. 성대로 음역을 굴려야 하는 노래가 아니라면 평이한 선율의 가사(歌辭)는 읽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회나 도덕, 국사 등 인문학 계열의 과목은 쉬웠다. 당시, 일반 학생들이 읽는 범위의 이상을 읽고 있었다. 선생님이 마음에 들면 수업에 응하고, 꼴 보기 싫으면 선생님의 이론에 태클을 걸었다. 모든 것을 놀이로 치부하며 비판적 시각은 가벼웠던 학창 시절, 벼락치기로 마감했던 시험들 중에서 국어는 공들였던 것 같다. 객관식이 80% 이상이던 중간이나 기말시험의 마지막 하나의 문제만 스페셜로 반 페이지 이상 쓰는 주관식이 있었다. 길게 적어 내려가는 글에서 만족감을 가졌다.




영화사에 다닐 때 주변 사람들은 '영화빠'였다. 영화에 빠져서 평생을 건 사람들은 겉으론 체면은 있지만 속은 공갈빵과 같았다. 다들 한가락하는 공갈 지식인들이었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한 성깔 하는 나는 항상 한 소리를 듣곤 했다.


"독하다. 어째 한 마디도 질 줄 모르냐?"

- 콜! 청기백기 게임으로 전환할까요?  


어이로 범벅된 사람들 사이로 나 혼자 웃으며 그들을 열받게 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생의 열망이었던 감정적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한 감성의 세계에서 나의 신랄한 비평적 감각은 전천후 장벽에 부딪히게 된다. 건조하게 가슴을 후벼 파는 비판과 독설에 사람들은 상처받기 일쑤였다. 주위의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말했다.


"뭘 그리 따지냐?!"


결국 이렇게 비판하고 분석하는 성향은 미지의 사람들과 교류를 하는 무역업이나 숫자를 맞춰야 하는 회계, 설계적인 경영과 잘 맞았다. 사진과 글과 그림과 시와 영화와 같은 감성만이 아니라 촌철살인(寸鐵殺人)이 빛나야 하는 사고의 장소에서 비판적인 혀는 숨겨야 하고, 생활에 실질적인 것들과 맞아 들어갈 때 분석적인 성향이 맞다니 모순적인 열망과 모순적인 세계이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공동 창작작업에서 격려와 응원은 필요하다. 사람들은 잘한다는 말을 들으면 신이 나서 열심히 하려고 한다. 그러나 상업적인 창작시장에서 '잘한다'는 말과 '뛰어나다'는 다른 말이다. 자기만족의 작품은 돈을 벌어들이긴 어렵다. 상업적인 기준에서 돈이 되지 않는 것은 모두 바닥에서 기어야 한다. 한때 잘 나갔던 감독들이나 작가들, 배우들도 팬데믹의 재림이 재현된 듯이 본업으로 먹고살기 어려워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쿠팡 배달업으로 뛰어들고 있다. 거대 제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소규모 일인기업이든 그 안의 설계직이나 기술직이나 연구직이나 관리직 인원을 감소해야 하는 입장인 것은 판로를 뚫어내지 못하면 저렴한 생산값만으로 타인의 선택을 받는 물질세계의 영광을 누리긴 어려운 현실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현실은 냉혹하다. 창작자라는 심리적인 만족과 동반되는 현실의 비판적인 시선은 재능에 대한 회의와 빈곤에 대한 괴로움을 줄지도 모른다. 돈을 투자하는 입장에선 돈을 벌어들일 촉을 자극할 정도로 눈에 띄는 작품이 아니면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돈을 벌어들일 정도로 뛰어나지 않으면 개인의 노력가치가 무색하도록 그 시도조차 매도할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상업의 세계에 올려진 문화예술은 비평의 선상에 올라가는 것 자체가 수면에 묻힌 수많은 잔류들에 비해 감지덕지한 타인의 집적거림으로 여겨야 한다. 그 안에 놓인 소위 창작자라면 타인의 시선에 따갑도록 몸을 찔리더라도 계속적인 자신만의 작업을 진행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한 번씩 의식의 경기가 발작하듯이 예술을 하겠다고 던지면, 주변의 백이면 백 모두가 말했다.


"왜? 지금 잘하고 있으면서. 예술하지 마! 예술이 밥 먹여줘? 일단 돈 벌어. 살고 봐야지."

"작가로 살면 뭐해요. 모두 뭐 하는 줄 아세요? 다 쉬고 있어요. 뭐라도 팔려야 새로 만들지."


자칭 타칭 나름 전문 기술과 감각적인 재능을 가진 한 분야의 예술가들인데, 돈을 버는 포지션을 가진 나를 팔 걷어붙이고 말릴 만큼 돈 버는 수단이 없으면 스스로를 구제하기 힘들 정도로 위기의 시대가 도래했다. 나의 독설과 비판적 감각을 사랑하고 견뎌내겠다는 사람들이 많은 고로, 우물 속에 숨어 있는 감각을 찾고 감성을 다듬는 겸 머리를 좀 더 쓰기로 했다. 아직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나의 의식과 감성체계는 빅터 프랑켄슈타인(Victor Frankenstein)처럼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어 합치가 되지 않는 상태이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The Art of Loving》. 이것은 '사랑의 예술'이 아닌, 사랑의 기술이다. 감성적인 사람들에게 부족한 것은 자기 것을 챙기고 시간을 돌아보는 냉철함이다. 아트를 하기로 했으니 'ART', 예술(藝術)의 다른 말인 기술(技術)에 대한 연마로 오래된 시간 동안 기술(記述)된 서술(敍述)의 기술(技術)을 다시 챙겨본다. 예술은 대상에 대한 집중적인 연마와 인내의 시간이 투자된 기술(技術)만이 아닌, 언어와 생각이 조합된 내면의 사고를 종합하는 기술(記述)까지 포괄하는 확장자의 개념이지 않던가.




SCRIPT CONTRADICTION : 극이 본 것은? 대립과 대조의 세계


소설과 극을 연구한 18세기 영국의 평론가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은 이렇게 말했다.


"내러티브가 존재하는 어느 곳에든지 사랑이 존재한다. 이야기에서 사랑을 제거한다는 것은 주재료 없이 부차적인 재료로만 상을 차리는 것과 같다."


살을 붙이고 의역을 하긴 했지만 뜻은 간단하다.


"사랑이 없다면 삶에서 핵심을 잃어버리게 된다."


- 사랑? 사랑! 사랑. 왜 이렇게 사랑을 말하는 거지?


요 며칠 고민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시와 소설에 빠져들고 연극을 퍼뜨리며 영화에 심취했던 내가 이처럼 자주 사랑을 말하는 것은 어색한 일은 아니라 생각된다. 인생의 마찰로 인해 성격이 독하게 변해도 말이다.


거짓의 오명은 길게 지속되고 진실은 짧게 커튼을 내린다. 삶의 바퀴를 돌리며 고되게 땀을 흘려본다. 명예롭고 부유하고 아름답게 산다 해도 그 누가 사랑 없이 밋밋하게 살아가길 바라겠는가? 늘어진 감정과 대사, 공백을 제거하고 극적인 장면을 단계화시킨 소설이나 영화, 연극, 시. 소재나 인물과 전개되는 내용은 다르지만 압축한 사상은 거의 비등하다. 최고아(最高我)를 지향한다.


죽기 전에 눈을 닳게 하고 심근(心根)을 저벅 밟는 기억이란, 내가 살던 어느 자락에 두고 왔던 사랑이다. 많은 이들이 알면서도 소홀하게 여기고 마는 사실이다. 사랑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를 이 땅에 내려준 부모님과 나와 더불었던 형제와 나와 동락했던 친구와 나를 나눠가진 연인과 나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들과 함께 들어있다. 서로의 가슴 사이에 놓여있기에 시간이 지나 하나가 떠나면 사랑이 어디 있었는지 안다.

허리로 뻗는 머리칼이 다시 무겁다. 무성한 여름 나무 잎사귀처럼 얼굴 덮은 곳엔 틈이 줄어들고 있다. 피부는 도끼질 한 빙판이다. 낱낱이 비늘이 일어나는 살갗엔 수분이 없다.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다. 부서진 외관보다 조각난 마음이 황량하다. 내버려 두기도 지친다. 극(劇)을 만들까 한다. 주인공이 필요하다.


2005. 1. 24. MONDAY




다리를 꼬고 머리를 기울인 채 이런저런 상상을 하기 좋아하면서도 아직까지 극(劇)은 만들지 않았다. 너저분하게 심상만 흘려댔다. 그런 단편적인 어근을 보니 새롭다. 기초적인 시놉시스(Synopsis)만 적어둔 것은 있다. 인물 캐릭터만 만들어놓고 다들 등신불(等身佛)같이 내버려 두었다.


주위를 돌아보면 나와는 전혀 다른 이들에게 둘러싸인 것을 발견한다. 감정이 풍부하고 생활이 지저분하고 정리정돈은 제로에 눈물도 많고 울화와 열불에 휩싸이고 사건해결은 미지수에 복잡한 머리에다 밥그릇을 내미는 사람들.


나는 나 아닌 것들을 사랑하는가.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사랑하는가.


나 같은 인간이 사랑 이야기를 쓰면 아마 감정 있는 사람들은 화딱지가 나서 환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사람들은 목매달고 잠도 안 자고 식음도 전폐하지 않은가? 여유가 있고 시간이 날 때 속 터지는 사랑이야기나 써볼까 생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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