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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Jun 14. 2024

JACQUES DERRIDA

자크 데리다, 해체에서 영원으로!

[Jacques Derrida (Jackie Élie Derrida) 1930-2004] 2024. 5. 19. PHOTOSHOP IMAGE RETOUCHING by CHRIS


논리의 명료함을 따진다면 기억이란 해체된 몇 십장의 글이 전부인 지금, 기존에 인식했던 철학에 대한 의견과 사상적인 관념이 머릿속에 얼마나 남아있는지 알 수 없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글도 읽은 듯한데, 언제 무엇을 어느 계기로 읽었는지 머리가 백지장이다. 만약 나에게 지식적인 것들이 사라져 간다면, 이후에는 감각에 의존해서 생을 표현해야 할 수도 있다. 글을 다시 읽으면 이전의 기억이 회오리처럼 쏟아져 들어오기도 한다.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낀다. 특정 포인트에서 의식이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는 것은 고민 중에 하나이다. 이십 년 전의 책장을 보니, 자크 데리다가 영원의 세계로 넘어갔을 때 애도한 글이 있다. 현재 잠자리 눈알처럼 모자이크 조각을 닮은 기억들은 자크 데리다가 창시한 해체주의 철학(Deconstruction Philosophy)의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다. 세상과 맞지 않는 뒤틀린 언어적 교합은 세상을 비판하기에 적절하다. 나는 밤이 되면 답답한 머리가 발동해서 광기 어린 소리를 해대곤 했다.



자크 데리다, 해체에서 영원으로!

지구상 병마의 건더기에 혼비백산한 몸을 걸쳤던 처절한 사상의 흔적들은 하나 둘 전멸해 간다. 개인으로 분열되면서도 집단의 그늘에 묻혀 가는 모순적인 세상을 지적한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세상을 떠났다. 언어를 가지고 장난하기 좋아하는 나에게 그가 한 말이 있다.


"세상 보는 방식을 모자이크 놀이처럼 생각하라."


쑥개떡을 만들던 쑥절편을 만들던 속을 분해해 보면 쑥과 쌀이란 내용물은 그다지 다르진 않다는 것, 그게 어째서 모호하고 허무하다는 비판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속을 까보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인데 말이다. 도로 위를 덮은 아스팔트 흙이 더 잘 썩는다는 사실을, 그 썩은 흙이 산자락에서 썩은 흙과 다름을, 내가 던지는 말이 남이 뒤집어쓴 오목렌즈(Concave Lens)에서 퍼져감을, 볼록렌즈(Convex Lens)에서 모아짐을 절절히 말했던가. 매일 같은 시간을 산책하며 지팡이를 땅 위에 쳐대던 칸트(Immanuel Kant)의 명료함이 통일을 배격하는 이 사회와 마찰될 수밖에 없음을 말하기도 했다. 아, 그렇지! 코페르니쿠스적 혁명(Copernican Revolution)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경험치 않고도 분해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선 동일하지만 누가 이성이 던진 파편에 피를 흘렸는가.


나에게 혁명은 Revolution의 전복(顚覆)보단 Evolution의 흐름이다. 분출된 활화산보단 쉬는 휴화산이다. 잠자코 있는 땅을 발길질하는 무리배의 건드림에 괜히 억눌린 울음만 찔끔 짜며 몸만 배배 꼬는데, 철책 싸인 공간에서 땅땅거리며 인간을 규정하는 합리주의가 무슨 전통이랍시고 사람을 호리는가. 저 고삐 풀린 소도 아니라면 환호하는 사람들의 엄지 손가락을 따라 소리만 왁자지껄한 투우장에서 마장경기 펼치듯 무용하며 죽음으로 내모는 한 사람의 칼부림에 경기용 인생을 마감하고 말 것을.


자크 데리다는 이 땅 위의 소멸이란 햇빛에서만 보이는 먼지 되어 적막한 어둠 속으로 사라짐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잠이 들었다. 분명하지 못하게 점점이 분산되어 가는 의식을 태우려 깊은 잠에 들었다. 오래된 상상의 무덤을 만족시키려 더 이상 쪼갤 수도 없는 언어의 경배를 받으며 몸 누워 버렸다. 지(知)는 영원히 사랑받지 못함을, 몸을 감싼 흙만이 공기 속에 산산이 부서질 이름이 된 걸 알았기에 그는 깊이 몸을 숙여버렸다. 저 하늘 피안으로 날아가는 찬란한 떠돌이 입자를 입 안에 머금으려 갔나 보다.


2004년 10월 9일. 하나의 언어가 탄생했고 그 언어를 씹어대며 사람을 이해하고자 했던 한 사람이 기억에서 해체되었다. 그 이름은 자크 데리다. 책 더미에서 반가이 웃으며 나를 반겼던 그가 이젠 마음에 파묻혀 버렸다. 난 그를 참 사랑했다. 이 밤이 새도록 그에게 노래를 불러야겠다. 더 자유롭게 날기를 바라며.



<자크 데리다와 나, 추도문에 덧붙인 논외 잡설>


이성(理性)이란 나에게 이성(異性)이자 이성(異姓)이다. 같은 동성이 되지도 못하고 같은 성도 쓰지를 못한다. 몸속 어딘가 한편에 자리하는 듯 하지만 감정에 풀풀 젖어 사는 걸 오랫동안 바라왔는데 바람 같은 이 마음은 개 줄에 묶여 사나운 으르렁거림만 반복한다.


'내 속에서 일어나는 분열이 한 국가와 한 민족 속에 천착되는 내전(內戰)의 비극과 비슷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며 과연 그 모습은 어떠한지 관찰하던 시점부터 데리다에 대한 관심은 출발했다. 데리다도 나처럼 사상적인 이방인이다. 프랑스령 알제리내전의 무장충돌과 빗발치는 테러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9.11 테러에 대한 논의도 이성을 나래질하는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보단 더 구체적이지 않나 생각한다.

시선은 자꾸 쪼갤수록 분열되진 않는다. 하나만 들이밀며 끈질기게 사탕 빨라고 하면 지겹다. 점잔 떨며 주변머리도 없는 이성을 쪼개서 들이밀 때 괜스레 마음만 덜컥거리고 귀만 맹맹하다. 화씨 911에 몸을 후끈 덥히는 것도 좋지만 주절대는 데리다의 말에 잠시 귀를 귀 기울여보면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해 거짓된 욕망만 떨궈대며 영혼을 흔드는 악귀들과 악수하는 손을 본다.


나는 이제 면역기능을 상실했다. 모든 것에 욕지기를 해대고 자꾸 참지 못하고 심히 토한다. 가끔 둘러싸며 조여대는 삶의 기쁨조차도 쉽게 느낄 수 없게 자신들의 욕망만 들이미는 놈들과 더 이상 살기가 지겨워진다. 아무리 모태를 논하고 삶을 다시 보려 해도 하루의 끝이 안 보인다. 그렇다고 자살은 하지 않을 것이다. 끈질기게 살아남아 날 해체하고 자유로이 놓아줄 것이다. 이 유산(遺産) 없는 삶의 빚더미에서 자꾸 허리를 굽혀가고 있지만 그 놈들의 어둔 시선을 조각낼 거다. 재탄생을 바라보기엔 난 신이 아니니 힘들 것 같네.


2004. 10. 12. TUESDAY




자크 데리다가 보여준 다양한 사상가들과의 철학적인 연애는 가볍고도 진중한 노래였다. 연극, 정신분석학, 문학, 사회관, 인종차별, 핵 문제 등을 말랑하면서도 깊이 있는 언어로 설명하던 그는 롤랑 바르트(Roland Gérard Barthes), 발터 벤야민(Walter Bendix Schönflies Benjamin),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엠마뉴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를 그만의 목소리로 소개해 주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사람들의 이름만 맴돌 뿐, 그들이 말한 언어들은 선명하지 않다. 그저 누가 누구인지 모르게 실루엣만 남아있다.


기억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글들을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돌아온 탕아를 반기듯이 어제의 기억들은 생활에 물든 단어의 외피를 벗기면서 팔랑거리고 있다. 망각에 대한 고민은 미뤄두려고 한다. 일상에 바쁜 이유로 인해 동굴 속으로 파고든 언어는 다른 맛으로 기억을 감싸며 돌아왔다. 웅덩이 위에 놓인 스펀지를 누르면 그 안에 흡수된 물질이 흘러나오듯이 시간의 언어에 섞여 나오는 생각들은 이전보단 좀 더 짙은색이다. 뇌리에 농축질감에도 밀도가 있다 소리는 기억의 터널에도 빛이 깃들 만큼 숨 쉴 틈이 존재한다는 소리는 아닐까. 해체된 삶의 조각을 맞추는 것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만연체적인 서술에 관하여

만연체(Prolix Style)적인 서술과 하나의 쟁점에 서술하는 길이감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있다. 짧고 간결 보고서식처럼 감정과 내용을 간단하게 전달하는 글은 화자가 살아가는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기도 하고, 목차의 나열은 감흥과 연상이 안 생긴다. 우리는 이렇게 짧은 이야기들로 서로에게 다가가야 할까? 말이 길어지면 귀찮고 힘들고 짜증 나게 될까? 나 또한 일을 함에 있어서 타인에게 정리된 의견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내용이 채워져서 돌아올 때 핵심에서 벗어난 곳에 느낌표가 가득하면 어이가 없다.


핵심을 뽑아내기까지 수많은 대화를 통해 타자를 분석하고 삶의 배경과 현실의 상황까지 고려해서 인간을 읽어야 한다. 하지만, 현대의 시간은 조급하기만 하고, 플래시백(Flashback)처럼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순간 속에서 인간의 소통 또한 잔상의 환영으로 남는다. 처음에 AI가 전달하는 그림체를 써서 스토리보드를 작성했는데, 부족하더라도 졸라맨이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손놀림과 달리 AI가 그린 그림들은 감정전달이 불분명하고 금세 패턴화되며 빨리 질린다.


인생은 만연체와 같다. 서술의 호흡이 길고 상황이 장황하며 심정이 상세하다. 오늘을 묘사하기 위해 백지를 마주하는 태도를 바꾸겠다고 생각한 것은 사이버 공간의 익명성 때문일 수도 있고, 떠돌아다니는 방랑의 의식과도 결부되어 있다. 문장이 길어질수록 주체도 사라지고 서술만이 형용사를 휘몰아쳐서 길이감을 줄이긴 한다. 그래도 전체적인 서술의 길이감을 길게 하고 싶은 이유는 타인에게 접근하는 그 길이감조차 견뎌낼 수 없는 사람이라면 쉽게 의식을 나누고 싶지 않다는 내부 소리가 터트리는 불만이 주된 원인이기도 하다.


삶을 구술하여 후대에 전해야 하는 고전문학이나 내부의식의 소리가 많은 작가들에게서 발견되는 만연체는 좋아하는 작가의 태도이기도 다. 그렇게 끈질기게 붙어서 써 내려가려면 한자리에 앉아서 의식을 풀어내고 장황하고 파괴적인 형상의 스스로를 바라봐야 하므로 인내심이 없는 인간은 전혀 해당사항에 포함되지 않는다. 사랑이나 애정처럼 좋아하는 시점을 부여하지 않아도,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서로의 틀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고 서로의 교집합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시간을 요한다. 간도 쓸개도 줄 것처럼 서로의 범위에서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말로 서로를 이해하던가? 법과 철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인간사를 정확하게 규정해야 하는 서술이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장황하고 길지만, 그 안에서 설명하는 일들이 극적이면서 정보가 함축적인 동시에 복잡한 언어수식과 문장구조 속에 인간에게 필요한 내용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간결하게 나를 적어 내리는 것은 그림과 시로 족하다. 토막나지 않는 서사적이면서 진솔한 말들을 만들어낸다면 온전한 인간과 같은 형상의 글 하나쯤은 찬찬히 써 내려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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