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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Jun 16. 2024

LORD OF THE FLIES

윌리엄 골딩 《파리대왕》 | 상대성이 사라진 집단 생존의 참혹한 결과

《Lord Of The Flies》 MOVIE IMAGE PHOTOSHOP. DESIGNED by CHRIS


"사회 형태는 개인의 윤리적 성격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지, 외관상 아무리 논리적이고 훌륭하다 하더라도 정치체제에 따라 결정되지는 않는다. 상징적 성격의 이 글 중, 마지막 장면에서 어른의 세계는 의젓하고 능력 있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섬에서 어린이들이 보여줬던 상징적 생활과 똑같은 악(惡)으로 얽혀있다. 장교는 사람사냥을 멈추게 한 후, 어린이들을 배(巡洋艦)에 태워 섬에 데려갈 준비를 한다. 그러나 그 배 안의 모습은 이내 똑같이 무자비한 방법으로 적을 사냥질 할 것이다. 표류하는 어른과 아이의 선박은 누가 구조해 줄 것인가." 파리대왕, 윌리엄 골딩 


"The moral is that the shape of a society must depend on the ethical nature of the individual and not on any political system however apparently logical or respectable."

William Golding  Lord of The Flies 



윌리 골딩이 파리대왕 Lord Of The Flies》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파리대왕의 모럴(Moral)은 결함에서 출발한다. 음침하고 외진 곳에 떨어졌을 때 인간의 본성은 어떤 형태를 보이는가. 이 무서운 책은 2차 세계 대전 후의 참상을 그렸다는 분석으로 들여다보고 싶지 않고 정치적인 해석을 들이밀며 우리의 사회가 통탄스럽다는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면 파탄난 폐허에 들끓는 파리의 빨간 눈이 적나라하게 비치니까 말이다.


파리대왕은 내용도, 두께도, 크기도 중간정도 되는 어린이 명작동화였다. 초등학교 때 읽었는지 유치원 때 읽었는지 자세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삽화가 몇 컷 들어있고 내용이 산발되어 있는 평이한 이야기라서 읽으면서 무척 지루했다. 글은 이해되지 않았고 재미도 없었다. 다만 두 패거리로 나뉜 아이들이 서로를 죽이기 위해 야수보다 더 잔혹하게 변하며 살인을 저지르거나, 동굴 속에서 기거하던 알 수 없는 괴물의 존재가 인간 본성을 탈피한 아이들을 하나 둘 잡아 죽일 때 굉장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리고는 잊었다.


대학 시절, 여느 날처럼 집에 돌아오는 길에 비디오 대여점에 갔다가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을 발견했다. 진흙을 묻힌 얼굴에 창을 겨누고서 무섭게 노려보고 있던 아이들을 몇 번 외면했다가 한 번쯤 지루해 보자고 마음먹고는 변덕스럽게 옛 생각이 나서 그날 밤의 손님으로 정했다. 그런데 내가 손님이 된 걸까? 무인도에 떨어진 아이들의 해석할 수 없는 행동은 하숙집 주인처럼 익숙한 바디랭귀지였다. 자연상태에 놓이면 선하리란 생각과 달리 인간은, 아이들은, 배움을 탈피한 아생은 결코 선하지 않았다. 좁은 공간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식은 서로를 할퀴고 억누르는 체계를 만들어갔다. 소라껍데기를 불며 구조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아우성치는 소음은 묵직한 트럼펫의 살인귀로 돌변했다. 자신을 구해주는 사람조차도 갑자기 미친 파리 소리를 내며 뜯어먹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남겨두었다.


나는 정치적 인간이 되고 싶진 않다. 놓인 그대로의 삶을 만끽하고 싶고 본성대로 살고 싶다. 그러나 세상에 다가가면서 발견했던 모습은 파리대왕 Lord of The Flies》, 이 소설이나 영상과 다르지 않았다. 야만이 과연 자연 속에서 어울리는 말이던가. 오히려 정리된 세상에서 야만성이 폭발하는 건 아닌가. 내재된 동물적 감성을 좋은 말로 포장하지만 격이 높은 사람들에서 풍기는 냄새는 역겹도록 구리다. 집단으로 모여 서로를 보호해 주기보단 군집을 이루며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는 사람들과 밝은 날에도 어두움이 흐르는 세상은 약육강식이란 말이 무색하게 사악한 모습으로 현실에서 꿈틀댄다.

지금 추락해 있는 한 사람이 있다. 외떨어진 무인도에서 표류하는 바다를 내다보며 살려고 분투한다. 그런데 갈라지는 마음은 의식을 갉아먹으며 조용히 파도에 머무르는 한 인간을 서서히 죽이고 있다. 외부의 압박은 채찍으로 몸을 때리듯이 강하다. 한 때 정치적 인간보단 놀이하는 인간이 되리라고 생각했던 기본 다짐도 잊은 채 길들여진 사회성에 얌전을 떠는 한 명의 인간과 충동적이고 울분에 젖는 야성의 인간이 충돌한다. 누가 살아남을까? 스스로 통나무를 잘라 구조선을 만들지 않는 이상 둘 다 죽을지 모른다. 오 년 전 안경을 벗었는데, 이젠 이 결심이 단순히 미적인 감각을 추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동물보다 못한 아이들을 꾸짖는 뚱보 소년의 짓밟힌 지식에 애도를 표하는 동감이 아니었나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 정도다. 이 순간 사람들의 무서운 본성에 울어 젖힌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나도 괴물인데? 지푸라기라도 잡기 힘든 생활에서 생존 문제는 제일 먼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오랫동안 나에겐 보호막이 없었다. 홀로 뗏목을 만들고 벽을 쳤고 불도 피웠다. 살려달라고 아무것도 없는 바다와 하늘에 외친다. 되돌아오는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뇌리를 스치고 가슴만 철렁거린다. 무리를 짓는 것은 고민이 된다. 어째서 뭉쳐야 산다는 말이 나오는가. 좋은 인간들만 모이면 살겠지만, 뭉쳐도 그 떡고물이 상해있으면 목에 넘기는 순간 기도를 막아 질식하고 말 거다. 먹을 걸 갖다 주고 이걸 먹으면 오늘은 끼니를 때울 수 있다고 유혹하는 인간들이 있다. 맛이 없다. 먹어도 뭔 맛인가 중얼거린다. 오늘 사냥한 멧돼지 한 마리 갖다 놓고 머리와 몸통, 꼬리에 순서를 매기면서 족장과 병사가 먹어야 할 부위와 순서와 계열을 정하는 세상에서 정당성이 존재하던가. 무슨 합리성이 보인단 말인가. 칼을 들이대고 눈앞에서 코를 베어 가는 도둑놈의 심보가 많다.


원시인들이 용맹하게 보이려 사용하는 의식적인 변장술(Ritual Makeup)이나 전쟁화장술(War Paint)로는 제사를 지낸 동물의 피를 몸에 바르는 방법이 있다. 사냥감을 태운 재로도 몸을 장식한다. 죽인 동물보다 더 살벌한 형상으로 상대에게 위압감을 발휘하도록 가장놀이를 한다. 사람들은 더욱 강력해지기 위해 희생양을 살해하고 그 피와 그 재로 자신을 그려나간다. 육체적인 전투가 주 목적인 강력한 적에게 둘러싸여 있는 개방된 원시의 공간에서는 희생양을 이용한 변장술이 적에게 두려움을 주거나 전사의 정체성을 강조하는데 사용되지만, 현대에서 이런 형태를 취한다면 미친 행동이다. 그런데 그걸 보고 주변인들은 멋지다며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지껄인다. 자신의 목을 따는 줄도 모르고 똑똑하다고 자부하며 사기 치는 놈들의 근성을 보면 천박하기 그지없다. 대체 정신이 제대로 박히지 않고선 어떻게 입을 모아 그런 모습이 좋다고 공언할 수 있단 말인가.


조직화된 폭력은 영화에서 그려지는 멋쟁이 조폭을 부르지 않는다. 멀리서 보면 현란한 움직임이 꽤나 환상적으로 보이겠지만 실제로 맞아보면 그 몽둥이는 굉장히 아프다.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는 놈에게 맞대응하며 욕도 하고 싶고 그들처럼 창자를 가르고 싶다. 그게 바로 쌍방향이 부르는 폭력이다.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짓거리에다가 결코 멋지지 않다. 죽음이란! 폭력이란! 조직이란! 우매함이란! 문명의 광기란! 그리고 찬사 받는 지식이란! 무인도에서 홀로 괴물이 되어서 파리 같은 잔혹한 떨거지 인간성을 하루 사이 수십만 마리로 분양한 채 눈 속에, 코 속에, 귀 속에, 몸속에, 그리고 온갖 구멍에 자신을 넣고 죽이는 결과밖에 낳지 않는다.

개별화되는 게 고립일까? 집단화되는 것이 고립일까? 차라리 이 순간 죽더라도 그 더러운 집단에서 고립되고 싶지 않다. 말도 안 되는 사상에 동조하여 인간을 판단하고 싶지 않고 더 이상 나를 죽이고 싶지 않다. 그런데 파리대왕이 자꾸 기생하려고 한다. 해충약이라도 뿌려대면서 격투를 신청해야 할 텐데 악마의 알은 누구의 몸에서 부지런히 꿈틀대며 살아남을지 모르겠다.


2004. 10. 26. TUESDAY




《Lord Of The Flies》 MOVIE IMAGE PHOTOSHOP. DESIGNED by CHRIS


1954년 출간된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 Lord Of The Flies》은 발간 당시에는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다가 점차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읽히게 되면서 전 세계 필수도서로 퍼져나갔고, 그 심오함과 철학적인 이야기로 인해 근 30년이 지난 1983년, 윌리엄 골딩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제2차 세계대전, 철학교사를 하던 윌리엄 골딩은 해군중위로 복무를 하면서 동료들의 잔인한 행위를 목격하고는 폐쇄된 곳에서 솟구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의문을 느끼게 된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강대국이 핵무기를 통해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서 서로를 파괴하고 자멸시키는 폭력의 세계로 치닫는 이유에 대해 탐구하게 된다. 그는 로버트 밸런타인(Robert Michael Ballantyne)의 산호섬 The Coral Island 1857》을 읽고서 '무인도에 표착한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소설을 쓰게 된다. 이것이 바로, 어두운 욕망이 내재된 인간성이 무인도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폭발하는 파리대왕 Lord Of The Flies》이다.


파리대왕 Lord Of The Flies》은 대니얼 디포(Daniel Defoe)의 《로빈슨 크루소 Robinson Crusoe 1719》와 달리, 군집된 인간이 무인도처럼 고립된 장소에 놓이게 될 때 어떻게 사회무리를 짓고 시대의 관습에서 익힌 사회성에 따라 검은 박쥐 같은 존재로 변하게 되는지에 대한 군집과 개인의 상호고찰이다. 아름다운 산호섬을 배경으로 야만으로 변한 달콤한 악들은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어린 소년들이 문명의 사회에서 배운 문명화된 교육은 그들이 무인도로 떨어지게 된 핵 수송선에서 이탈할 때부터 거대한 욕망의 힘에 의지하여 폭력의 필연성을 낳고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의 내면은 존재에 대한 믿음과 냉철한 이성, 한줄기 양심이 실타래처럼 뭉쳐있다. 그러나 외부적 환경이 모종의 충격에 의해 변화되고 이로 인해 내면의 결정체가 부서지게 되면 인간은 문명화되기 이전으로 돌아가 오직 생존만이 중심인 짐승의 모습으로 변한다.   



고대 가나안 일대에서 숭배되던 바알(Baal)은 다신교인 셈족의 바알(Baal)의 호칭 중 하나로, 폭풍과 전쟁, 풍요를 담당하는 신을 가리킨다. 셈족은 고대 근동지역에서 살며 셈어(Semitic languages)를 사용하는 여러 민족들을 가리키는 말로, 노아의 세 아들 중 하나인 셈(Shem)에서 유래되었다. 셈족은 아카드인 (Akkadians), 아람인 (Arameans), 아시리아인 (Assyrians), 바빌로니아인 (Babylonians), 히브리인 (Hebrews), 페니키아인 (Phoenicians), 아랍인 (Arabs)을 아우르며 이들은 아랍어와 히브리어를 사용하면서 중동의 역사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셈족의 '바알(Baal)'은 성경에서 대척점을 지닌 우상으로 적대시되어, 신약시대에는 악마들의 두목이나 사탄, 마귀들의 두목으로 지칭되었다. 원래 바알은 '높은 거처의 주인'(The master of high dwelling)이라는 뜻의 '바알즈불'로 불리다가, 이 이름이 위대한 왕 솔로몬을 연상시킨다는 유대인들의 주장에 따라 파리와 비슷한 발음의 'Zəbûb'(즈붑)을 붙여 '파리의 주인(The master of flies)'이라는 뜻의 '바알즈붑'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중세에선 '바알즈붑'은 거대한 파리로 묘사되었기에,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 Lord Of The Flies》의 제목은 원래의 뜻과는 한참은 멀어진 이민족 신의 이름, '바알즈붑'을 풀어쓴 것이다.


가끔 책을 읽다 보면 작가들의 철학적 내용의 신선함과 인간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처럼 강력한 특장점에도 불구하고, 서양문화 사상에 근저하고 있는 성경, 즉 기독교 사상 속 다양성에 대한 거부나 유일신에 대한 강조가 서양인들이 총칼과 쇠에 대한 장악을 완성한 근대로 접어들던 시기, 극적으로 인간사의 편견을 가르게 만든 이유가 아닌지 묻게 만든다. 이 파리대왕 Lord Of The Flies》조차도 성경에서의 지적하는 악의 상징성을 파리라는 해충 위로 차용했지만, 제목의 기원에서 알게 되듯이 기독교 신앙의 모태인 유대교는 세상의 금전 논리만이 아니라, 지식의 고찰면에서, 무기의 변용이나 사용력 면에서, 인간의 믿음을 이용한 신앙의 결집에서도 세계의 핵심적 권력과 지위를 장악했지만, 타민족에 대한 이해 없이 그들의 역사를 곡해하고 자신이 최고라는 아집을 경전에 수록하여 후대에 전승하는 모순을 안고 있다. 니체의 자라투스트라에서도 보이듯이, 타민족 배타주의를 내세우는 보수적인 원리주의 형태의 기독교사상은 이천 년 역사를 가진 유일신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보다 앞선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세계 인류사와 타민족 포용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핵심적 교집합의 오류에 봉착해 있다.


성경의 가장 중요한 말씀인, 믿음 사랑 소망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한다면, 이 사랑은 어디까지의 사랑인 것인가? 타인을 포용할 수 없는 사랑은 자기애적일 뿐 본래 신이 가리키는 인류애적인 사랑은 아니다. 성경의 예수 말씀 또한 인간이 백번 이상 물은 질문에 다만 세 번 정도 대답했다고 전해질만큼 현대의 성경교리에 진리의 말씀은 숨겨져 있으며 성경에 쓰인 신의 말씀이란 글 전달자들의 당 시대의 의견을 반영한 본래와는 다른 내용이다.


서양정치사상을 연구하면서 서양문화의 지식체계와 정치권력 및 사상적 구조를 해부하다 보니 언젠가부터 문화의 포용지점에서 더 이상의 긍정적인 신호를 보이기가 어려웠다. 인간에게 '절대'에 대한 믿음은 가장 위험한 화염이다. '상대'적일 수 없는 '절대'에 대한 믿음은 상대방을 볼 수 없고, 오직 자신에게만 눈을 돌리는 맹목적인 사랑이며 적나라한 파괴의 시선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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