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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Jun 01. 2024

THE SILENT CRY

오에 겐자부로, 《만엔원년의 풋볼 萬延元年のフットボ-ル》

[THE SILENT CRY : One Hundred Years of Wounds] 191217-240601. DIGITAL WORK. PHOTOGRAPHY by CHRIS


이 여름이 끝날 무렵, 내 친구는 머리와 얼굴을 온통 붉은색 페인트로 칠하고 항문에 오이를 쑤셔 넣고 벌거벗은 채 목매 죽었다. 나는 질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내 육체가 부재의 시간을 체험하는 동안 친구의 눈이 그것을 지켜보고 그 정당한 의미를 이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엔원년의 풋볼 萬延元年のフットボ-ル,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

 


지혜로운 자는 책 속에서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다 죽는 법이네. 백 년만 지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이 어떤 식으로 죽었는지 캐내려고 하지 않아. 그러니 자기 맘에 드는 방법으로 죽는 게 제일이지.”


백 년이 흘렀다. 적막한 산 위에서 흩어진 물줄기는 콩가루 집안으로 스며들었다. 여름 내내 잘 익은 수박을 쪼개듯이 피범벅 된 의식은 속삭인다.


‘나는 진실을 말했다.’


거짓으로 기워진 기억의 감각을 공유해 본다. 비밀스러운 사실과 함께 했던 오랜 세월 동안 고통스러운 그늘 속에서 사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대가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한 인간의 뻔뻔스러운 전통은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를. 별것 아닌 용서로 마무리되는 고통에 대한 결말은 무작위로 생겨난 증오에 돌팔매를 뿌릴 수도 없게 만든다. 그렇지만 갓 짜낸 마늘냄새처럼 퍼지는 머나먼 나라의 폭력성은 어두운 밤에 피어난 소리 없는 비명을 꺼낸다.


"나는 쥐새끼 같다."


자신을 비하하는 미천한 상태로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타자의 언어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갈비뼈 깊숙한 곳의 황량한 상실감은 피부로 둘러싸인 육체의 껍질 밖에선 경험할 수 없지 않은가? 폭력의 세계는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다. 친숙한 굴레에 현혹돼 비상을 거부당한 새들은 끝없는 그늘에 몸을 사리고 살아보겠다며 숲으로 도망친다. 차라리 추방당한 자의 자유를 선택하는 게 좋겠다. 토사물로 비벼진 육체를 탐닉한 파리떼가 내 영혼을 갉아먹었다고!


"절망 속에서 죽는다. 그대들은 지금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은 결코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것을 후회하면서 침묵과 증오와 공포 속에서 죽는 일이라는 것을." <장 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


거대한 사건에 휩싸인 사람들에게 장난스럽게 돌을 던지는 아이들의 놀이에 연못에 노닐던 개구리가 맞아 죽었다는 것은 뉴스거리도 안 된다. 어릴 적 품었던 화려한 꿈이 사라진 것은 더더구나 그렇다. 애드가 앨런 포(Edgar Allan Poe)가 호숫가 언저리에서 중얼댔다.


"보거나 보이거나 했던 모든 것들은 꿈속의 꿈에 지나지 않았던 걸까?"


자연히 지나가버리는 청춘의 한 소절처럼 비대한 노년을 향한 젊음의 분리는 비바람에 뿌리 한 끝이 침식되는 돌처럼 서서히 진행된다. 하강하는 인생에서 쥐새끼처럼 웅크린 철학자의 어깨 위로 한 모금의 위스키를 뿌리는 건 위로에 적합한 태도이다. ‘붉은 도롱뇽의 눈부신 배 같은 땅이 맨 살을 드러내는 초겨울’에 우리가 할 일은 비참한 오늘을 향해 절규하는 것보다 해 뜨려면 한 시간이나 기다려하는 인내를 키우는 것이다. 기억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므로 깊이 슬펐던 날들에 조의를 표한다. 거창한 죽음도 지워지는 별스러운 날, 친구나 형제의 부재도 어느 순간 사라지리니.

2007. 10. 25. THURSDAY



오에 겐자부로(おおえ けんざぶろう)의 《만엔원년의 풋볼 萬延元年のフットボ-ル 1967》을 읽을 적에 출시된 책 제목은 만연원년의 풋볼이었다. 발음규칙이 바뀌어서 지금에 맞춰 본다. 책 제목이나 외국 작가의 이름이 개정된 발음표기법에 따라 바뀌어 있을 땐 기억의 비틀림이 고민스럽긴 하다. '만엔원년의 풋볼'의 영어 원제는 The Silent Cry》이다. 철학가들만이 아니라 소설, 시, 그림 등에서 발견하는 작가들의 말속에서 침묵은 가장 강력하게 발휘되는 진실의 코드이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의 고독감은 그저 짜디짠 시절의 비애와 어디에서든지 흡수되어 버릴 맹물 같은 사실을 포함하고 있다.


한국을 떠나기 전, 하루에 한 권씩 의미로운 책을 읽기로 했던 약속처럼 서점에서 거쳐간 책이었다. 당시 책을 읽으면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ía Márquez)의 《백년 동안의 고독 Cien años de soledad |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을 떠올렸다. 19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은 변질된 신화적 요소인 근친상간과 만연화된 살인, 거짓된 부조리가 뒤섞인 집단적인 광기의 현장을 조망하면서 전체주의의 폭력과도 같은 전제적 억압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묻는다. 과거와 현재의 시점이 혼재된 서술을 통해 벌거벗은 세상에 놓인 인간이 왜 뜨겁도록 조용히 울음을 흘려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고찰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세계는 다름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냉혹한 시선을 보낸다.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의식이 굳어진 사회에서 거친 언어와 함께 기괴한 삶의 종말을 종용하는 정신적인 자극은 사회에 어떤 경고의 메시지를 줄 수 있을 것인가.



축구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구기종목이다. 사실 축구만이 아니라 농구, 배구, 야구 등 집단적인 친목행위를 하기 위해 훈련된 코드로서의 스포츠에 관심이 없다. 초등학교 2학년까지는 애들하고 집 근처에서 축구도 곧잘 했다. 포물선으로 날아가는 공을 보던 어느 날, 골대를 향해 골을 넣어야 하는 집단적인 몸싸움이 지겨워지면서 실행자만이 아니라 관객으로서의 흥미 또한 급속도로 떨어져 버렸다. 2002년 월드컵 때 광화문을 꽉 채운 붉은 물결을 보면서 월드컵이 지구촌 축제라기보다는 집단적인 광기의 깃발 같아서 섬뜩했다. 조기축구 모임이나 축구동아리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며 삶의 생기가 넘치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집단화되기는 힘든 인간인가 싶다. 그냥 폭동으로 휘몰아치듯이 훌리건(Hooligan)으로 대변되는 감정 과잉의 집단주의에서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솟는다.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또한 축구에 미쳐있는 이탈리아 사회의 모습이 일상의 파시즘(Fascism)으로 귀결될 수 있는 집단주의의 시작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는 모두가 축구를 좋아한다고 해서 축구를 싫어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사실을 비판하는 현실에선, 인간의 자유보단 규칙적인 통제가 집단 속에서 합리적인 수단으로 인식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어떤 대상을 자신이 좋아한다고 해서 타인이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비단 일상에서만 보이는 현상이 아니다. 통치자의 입장에서의 사회 발전의 추동력은 질서 정연한 난동이기를 바란다. 개성 발산보다는 집단적인 결속의 형태가 제도적인 지배에 효과적이다. 개인의 사회화가 추구하는 목적은 집단과 동일한 시선을 따라야 한다고 권유하는 결속주의(結束主義)는 전체주의 사고의 강력한 권고로 파괴적인 힘을 발휘한다.


인간에게 내재된 폭력성을 집단 속에서 익명으로 발산하고 싶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성찰할 여유가 없다. 육체에서 발산하는 땀의 향기가 매력적인 땐 탄력적인 살결과 싱싱한 근육이 매칭되는 젊은 시절일 것이다. 그러나 구릿빛으로 흐르는 매끈함은 단체의 규칙 속에서 생채기가 쓸리고 속뼈까지 부러져버릴 것만 같은 상상으로 직결된다. 자신의 부재를 증명하기 위해 기괴한 죽음을 선택하는 인간의 자유는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신을 믿는 자들에겐 천벌처럼 인식될 것이고, 신화를 믿는 사람에겐 신들의 응징으로 여겨질 것이며, 신성을 믿는 자들에겐 신성이 살해된 인간성의 패배로 자각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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