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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Jun 15. 2024

LES NOUVEAUX EXPLOITS DE SHAFT

<샤프트> 할렘의 경찰관. 탐정 샤프트의 새로운 모험

[SHAFT 1971] MOVIE POSTER


그룹이 형성되면 무리가 생긴다. 진보와 보수, 개혁과 안정, 좌파와 우파, 반동과 순응.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권역의 벨트에 속한 이상은 어디론가 편승해서 다수와 소수의 위치에서 믿음이 가는 성향의 계파로, 후천적인 정체성을 알려주는 부서로 자신을 밀어 넣는 것이 편안한 삶을 사는 지름길일 것이다. 영화 역시 인간이 만든 것이라 그런지, 인간들의 삶과 비슷한 패턴을 유지한다. 주류와 비주류가 있고 할리우드와 반(反) 할리우드가 있고 특급 블록버스터와 개성 B급이 있고 제작시스템영화가 있고 독립영화가 있다. 자본에 의지하는 매체 특성상, 미국적인 시스템을 무시할 수 없어 자주 접하게 되지만 거대한 군집에서도 소수의 의미 있는 목소리는 색다른 음성을 내며 뒤를 돌아보게 만든다.


60-70년대 할리우드영화를 보다 보면 그 뒤편에는 정치색이 짙게 음영을 드리우면서 논의의 중심에 기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 문화, 사회적으로 유색인종에 대한 다양한 억압과 반발이 작용하고 있음은 단지 그들만의 문제인지 되묻게 된다. 그런 대표적인 영화 중에서 유심히 보았던 작품으론 <초대받지 않은 손님 Guess Who's Coming To Dinner 1967>과 <밤의 열기 속으로 In the Heat of the Night 1967>가 기억에 남는다. 소외된 주장을 내부로 흡수시키는 노력은 시대의 그물에 깜짝 선물을 던지는 것 같다. <샤프트 SHAFT 1971>, 껍질은 총을 들고 뒷골목을 쏘다니는 탐정놀음을 그리고 있지만 이중적인 조소 하나는 갈지 않은 창 끝의 무딘 맛을 골고루 내는 영화다.


얼마 전, 신문에서 색채를 표현하는 명칭을 바꿔보자는 시도로, 인종 차별의 어감을 가진 살색은 배제하고, 색상 권역을 넓히기 위해 수박색, 토마토색, 키위색, 살구색, 호박색 등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용어로 바꾸자는 소식을 보았다.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언어적인 개화(開化)가 표면적인 법개정이나 캠페인으로 바꾸는 데 순풍을 탄다고 해도, 의식적인 개화(開化)는 눈길로 감지할 수 없는 기간을 통해서 조류를 바꿔야 하기에 어려운 일이다. 단일 민족의 권역에서 민족적인 차별은 아직 별다르게 경험한 바 없다. 그러나 단순노역을 하러 외국에 나가거나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적인 공간에 버려졌을 때, 고정된 눈길로 사람을 보는데 익숙해진 입술은 나를 이렇게 부르고 말 것이다. “어이, 계란 껍데기!” 아니면, “바나나 껍질”. 소수의 설움은 약자의 허리춤에서 덜렁거리기 마련이다. 황당무계한 액션물은 SF가 가미되지 않으면 재미없게 느껴진다. 1971년 제작된 <샤프트>는 2000년판보다 과장을 배제하고 있는 점이 마음에 든다.


“혁명을 일으키려면 제대로 해야지, 뭔 개죽음이야!”


샤프트가 내뱉는 퉁명한 말투는 보는 내내 입을 좌우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욕설은 쉽게 배운다. 사건 구조상 도덕적인 윤리의식이나 거창한 주제는 뚜렷이 나타나있지 않지만, 흑인 영가와 소울의 진한 색채감은 거칠고 풍부한 화면에 주류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암묵적으로 살포한다. 백인의 조력자나 서빙보이, 주방보조, 엘리베이터 수행요원, 한없이 굴대 받는 고분고분한 약자의 역할을 벗어던지고 레밍턴 스틸(Remington Steele)처럼 느글느글한 재치로 사건을 해결하는 동시에, 흑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처럼 여겨지던 거친 욕설과 현실적인 분별이 함께 드러나는 캐릭터를 보고 있자니 특수효과가 별로 없는 육탄적인 줄타기와 느릿한 발차기도 재미에서 속도감이 붙기 시작했다.


할렘 뒷골목을 장악한 흑백 마피아 간의 마약전쟁 사이에서, 백인 형사 반장과의 친우밀약에서, 영악한 사 가제트(Gadget)로서 지략과 육체의 성능을 업그레이드한 사설탐정 샤프트의 기지는 현란한 액션에서는 한발 굼뜨고 사건을 풀어나가는 육감적인 대응에서는 정상적인 인간의 속도감을 지니면서 밀림의 도시를 종횡무진 싸돌아 다닌다. 외부에서 내부로 잠입하는 기결방식은 흑인이 주인공이라는 주동적인 역할과 더불어 그가 벌이는 행위, 배경이 되는 노래, 사용하는 언어에서 조감되어 드러난다. 무엇이 악(惡) 인지도 분별할 수 없는 동족의 상대와 거래하는 방식은 흑인이든 백인이든 남자라면 똑같은데 지금은 이런 모습이 놀랍지 않지만 70년대에는 논란이 될 만하다.


결혼하지 않는 독신남이 애인과 소파에서 뜨겁게 뒹구는 모습이나 흑인과 백인이 뒤섞인 샤워신을 보면 샤프트는 흑인이건 백인이건 여인들과의 자유로운 섹스라면 마다하지 않는 007 제임스 본드와 같은 전위적인 표현주의자로 그려진다. 한마디로 매력적인 남자의 섹스. 사건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여자들과의 육탕질이 무슨 의미인가 싶어서 웃었지만 고든 팍스(Gordon Parks)는 이 장면을 삽입하면서 백인과의 보이지 않는 내밀한 접촉을 시도한 것이 아니었는가 싶다. 하긴, 마이크 피기스(Mike Figgis)의 <원나잇 스탠드 One Night Stand>가 1997년에 등장했으니 근 20년 전에 싸구려 짓을 뻔질나게 하고도 모두가 애인이라며 눈물 없이 마무리한 샤프트는 흑백 갈등에서도 전화 한방으로 땜질할 만큼, 수완이 좋은 사람인 건 틀림없다. 남자들에겐 무한한 이상형일 수 있지만 지금도 그처럼 행동을 저지른다면 웃겨도 한참 웃긴 사과일 거다.


이익분쟁이 빈번하고 몫을 할당하는 곳에서 분주하게 뛰는 건 재미가 없다. 세기의 반 토막이 지난 현재는 어떤가? 숨통은 열렸는가? 인종과 문화의 용광로라고 선언한 팍스 아메리카나. LA 시장에 스페인계가 당선되었고, 흑인에게 참정권도 주어졌다. 그럼 내 안의 선택권이 고려되지 않고서 태어날 때부터 인식의 지문을 새기게 되는 인종적인 차별이나 뿌리에의 부담감은 모두 사라졌는가? 영상과 노래의 잔상효과가 퍼진다. 샤프트가 빈민가를 걸을 때 흐르던 노래를 듣다가 이상하게 뒷골목의 세월만은 나라와 민족과 사회를 막론하고 예전과 그렇게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속박했던 족쇄는 알아볼 수 없어

함께 걸어보지 않았다면

그가 살았던 곳은 빈민가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고

살기는 힘들어

범죄율은 높아지고

방세는 두 달 치가 밀려있고

50달러에 마약을 구해서

현실을 피해 높은 곳을 향해 달려가지만

결국 손 닿을 수 없는

높은 하늘임을 보게 되지


보이지 않는 곳은 감춰져 있기에 늦게 변할 것이다. 변하는 속도도 감지할 수 없기에 더욱더 느릴지 모른다. 전반적인 계절의 순환이 시작되면 눈도 녹고 비도 마르겠지만 같은 계절에서의 응달은 한층 싸늘하다. 그런데 그것이 추억의 과자나 불량식품을 사면서 순수나 돌아가야 할 종착지로 불릴 수 없게 타락한 창구가 되거나, 고질적인 하수구로 변해 쓰레기나 받아먹고 산다면, 자정 (自靜)의 시간은 오물을 버리기 시작한 세월의 몇 배가 걸려야 되지 않을까. 닿기 힘든 것들은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노래를 부르며 마무리를 해야 하는가 보다. 사랑도 희망의 불빛도 영원히 타오르면 얼마나 뜨거울지 기대를 가진다는 것이 두려움도 앞서지만 조용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달콤한 노래를 부르고 싶은 감정이 생길 때가 있다. 팠다가 생그란 눈으로 영화를 보니 잠도 오지 않는다. 여기저기 기분 좋게 눈짓해 봤다가 맥주병에 머리가 박살 나서 꿈을 저지당하지 않는다면 나도 좋고 너도 좋고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것은 해볼 만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500% 위스키 원액을 꿀꺽거리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나 들어야겠다.


음악을 듣고 어깨를 들썩이며 계속 음악을 듣고

별빛 아래서 사랑을 하고프면 계속 사랑을

계속하고픈 말이 있으면 계속 이야기를

어쩐지 노래를 부르고 싶다면

노래가 적성일 테니 노래를 부르고

사랑하고 싶고 그게 옳은 일이라 생각되면

계속 사랑을


2005. 6. 5. SUNDAY



영화는 하루를 달래고 삶을 버티게 하던 친구였다. 화면 속으로 빠져들다 보면 현실에서는 닿을 수 없는 다양한 이야기가 가득했고, 잠시 웃다가 괴로움도 무색해졌다. 누군가 죽어도 살려면 밥은 먹어야 하듯이 영상을 섭취하다 보면 삶에 대해 생각을 움직이고 의식이 돌아가게 하는 자극제가 되곤 했다. 그림만 보면 자동머신처럼 술술 흘러나오는 감상을 가졌던 시절이 있었다. <샤프트>를 보면서 탐정을 직업으로 삼아 살면 어떨까 생각했다. 당시엔 탐정과 같은 행위를 하였으나 이는 직업도 아닌 사건 해결을 위한 부득이한 선택으로 인해 긍정적인 감상을 가지지 못했다. 의뢰자에 순응하는 탐정보다는 시니컬한 괴도 뤼팽(Arsène Lupin)에 더 끌렸다. 사설탐정이라면 거대한 정치사건이나 경제사범들의 부도덕에 휘말리기보다는 바람피우는 유부남이나 육덕지게 놀아나는 유부녀의 개인사를 캐는 것이 스릴은 적겠지만 개인들의 불편한 판단에 논리적인 생활의 위협을 가해가며 돈을 뜯어내기에 좋을 것 같다. 다만, 위험한 삶이 존재하지 않으면 인간의 외면만이 아니라 내면 또한 발전이 없으므로 남의 뒤를 캐는 삶으로의 전환은 선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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