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몇 살이에요?”
“그건 알아서 뭐 하게요?”
“그냥요.”
“보자, 22년에 1986년을 빼면.”
26이라는 숫자가 화면에 딱 떨어졌다. 나는 36을 크게 읽었다.
“36”
“선생님, 36살이에요? 우리 엄마는 42살이에요.”
36이라 읽어버리고 나서 1년을 더해서 37이라는 다음 말은 속으로 삼켰다. 내 나이가 벌써 37이라니.
2022년의 3월이 벌써 끝났다. 37살의 4분의 1이 지나갔다. 벌써 완연한 봄이다. 친구가 봄맞이 커튼을 바꿨다고 사진을 보내왔다. 사이트를 소개받아 나도 회원가입을 했다. 이름, 생년월일, 전화번호를 필수로 기입해야 하는데, 생년월일은 2022년 4월 달력부터 시작해 그 달력 안에서 숫자를 선택해야 했다. 바로 숫자로 기입하는 란은 없었다. 몇 번쯤 손가락으로 달력을 휙휙 넘기다가 아무 날이나 찍었더니 14세 이상만 가입이 가능하다는 메시지가 떴다. ‘그래, 한번 가보자’란 마음을 다잡고 달력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1986년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달력쯤 넘기는 거야 식은 죽 먹기지 뭐.’
2011년까지 왔다. 동아리 친구의 야외 결혼식이었다. 차로 4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라 그냥이라면 참석하지 않았겠지만 헤어진 남자친구의 차를 얻어 탈 수 있어 가고 싶었다. 오랜만에 동아리 친구의 결혼식을 핑계 삼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들고 헤어진 연인의 차에 올라탔다. 아무 의미 없는 멋쩍은 대화만이 드문드문 오고 갔다. 물론 내 커피를 마시지도 않았다. 작은 호의도 내쳐지는 순간을 느끼며 다시는 상대를 힘들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눈을 마주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할 필요가 없는 엉뚱한 말을 할 수도 있고, 괜히 슬퍼 보이는 눈빛이 되어 버릴 수도 있고 서로 꼴 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무엇이든지 예방하자는 차원에서 사전에 합의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했다. 이처럼 모든 행동이 부자연스럽다. 무너진 신뢰에 남아있는 매력은 무쓸모. 오히려 더 깊은 원망과 거절을 불러올 뿐이다. 우리가 사랑을 시작할 때는 사랑이 온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헤어지고 나니 사랑은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겠다는 결심. 다시 말해서 자신의 의지로 사랑하던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듯이, 사랑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부수고 다시 상대를 사랑해 보겠다고 마음먹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예전과 달라진 눈빛은 그런 의지를 내볼 생각이 없다. 그 눈빛이라는 것은 나오지 않는 걸까 아니면 나오지 못하게 막았던 걸까? 상대의 허락이 없기에 혼자 여전히 연애 중인 눈빛을 하고 있는 건 이상한 짓이다. 헤어진 연인의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나는 왜 그런 걸까 곰곰이 고민했었다. 애정 어린 눈빛은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보여주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다정함이 거두어진 눈빛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서러운 마음도 들었다. 사라지고 나니 알겠다. 내가 그 눈빛을 가졌었다는 걸. 단골가게에 내걸린 폐업간판을 보듯 마음이 씁쓸했다. 이러이러한 내부사정으로 가게 주인은 자신의 가게를 내놓고 더 이상 영업을 하지 않겠지. 폐업을 결정하는 건 정당한데 이제 더 이상 들어오지 말라고 하니 마음이 섭섭해지는 거다. 왜 폐업하는지 어디로 가게를 옮기는 건지 아무런 설명도 들을 길이 없고 간단하게 내 걸린 폐업 안내문과 텅텅 빈 가게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지 않는가, 그래서 섭섭해지는 거다.
야외테이블에서 식사를 마친 하객들이 하나둘 씩 자리를 떠나자 어디선가 커다란 떠돌이 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듬성듬성 털이 빠지고 뱃골은 말라붙었지만 덤덤하게 음식을 찾아 천천히 두리번거리는 순진한 눈. ‘진짜 많이 배가 고파 뭐든지 먹고 싶지만 나는 음식을 달라고는 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에게 달려들지도 않아요. 그런데 음식을 좀 주면 좋겠어요.’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된 건지 이 강아지에 대해서 알 길은 없었지만 이렇게 식탁 위에 버려지는 음식이 많은데 음식을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 더운 날씨에 저 큰 몸을 하고 털은 또 얼마나 길었는지 얼마나 목이 마를까 물부터 한 사발을 따라주고 싶었다. 하지만 삼류드라마의 여주인공처럼, 내 앞이라 짐짓 좋은 사람인 척 연기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건 아닌지 걱정이 스쳤다. 주최 측에서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렇게 한 사람 두 사람 밥을 주다가 떠돌이 개들이 몰려오게 되면 곤란해지겠지, 별의별 생각이 복잡해져서는 강아지에게 아무것도 챙겨주지 못하고 식이 끝나고 다시 차에 올라탔다. 엄마가 언젠가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는데 동네 아줌마가 친구 딸의 결혼식에 일하다 말고 장화를 신고 왔단다. 일꾼들 일정은 잡혀있고, 그날 꼭 감자도 심어야 하고 친구 딸의 결혼식도 가야 되겠다고 그 꼴을 하고 참석을 강행했다. 진흙이 묻은 장화를 신고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 축의금 봉투를 내고 식을 구경하고 뷔페도 먹었다. 나도 여기 결혼식에서 장화에 덕지덕지 묻은 진흙을 뚝뚝 흘리고 다녀서는 안 된다. 그러니 이상한 짓은 하지 않도록 한다. 오는 길 내내 그 개의 모습이 떠올랐다. ‘물이라도 시원하게 먹이고 올 걸.’ 계속 후회했다.
2005년. 나는 05학번이다. 그 해에는 대학에 입학했다.
2001년까지 왔다. 그때 나는 고1이었다. 그냥 좋게 넘겨줄 걸 그랬다고 후회를 했었다. 이 후회는 더 오랫동안 했었다. 내 뒷 번호라 모의고사를 치는 날이면 항상 내 뒤에 앉았던 아이. 시험 종료시간은 가까워오고 오엠아르 정답카드 수정 스티커를 움켜쥔 몇몇 아이들이 고칠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내 마음도 타들어갔다. 때마침 내 손에 수정스티커가 들어왔다. 떼어져 나간 동그란 수정스티커 자리가 덩그러니 더 많았다. 그 순간 뒤에서 나를 날카롭게 잡아당기는 손길이 있었다. 빨리 수정스티커를 넘기라며 재촉했다. 신경질을 부리는 손길에 나도 기분이 팍 상해 ‘자, 여기’하고 툭 책상에 원하던 것을 놓아주었다. 그날 이후부터였다. 상대방의 자존감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소심한 복수의 시작. 수업시간, 내 이름이 호명되거나 내가 대답할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욕설을 해댔다. 그 목소리는 아주 작아서 그 욕설의 대상만 겨우 들리는 수준이었다. 복도를 걸어갈 때, 화장실에서 나올 때 어김없이 얼굴을 마주치면 욕을 했다. 그러다 나에게 언제 그랬냐는 듯 내가 잠시 후순위로 미뤄지기도 했는데, 그건 바로 새로운 복수상대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 아이의 목록에서 내 이름이 지워지지는 않았다. 똥파리도 이런 똥파리가 있을까? 손사래 치면 잠시 물러났다가 다시 무섭게 쫓아 붙는다. 그러나 나도 손사래만 칠 뿐, 파리채로 잡진 않는다. 똥파리를 죽이기까지 할 건 아닌 것 같아서다. 아니 모기라고 하는 게 더 맞을까. 야금야금 내피를 빨아 제 배를 채우고 알도 낳고 번식을 하는? 빼앗긴 피는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차오르겠지만 손상된 자존감은 회복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모기도 아니다. 나라는 존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보려 하지만 또 각자의 자유의지를 가진 타인들을 만나 이리저리 건드려졌다가 보담아 졌다가 이런저런 사정을 만들어낸다.
이쯤이면 14세 이상은 넘은 거 같아 아무 날짜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래서 당첨된 날짜는 1994년 9월 1일. 이 사이트에서 내 생년월일은 1994년 9월 1일이다. 초록색 시폰 커튼을 주문했다.
나는 지금이 좋다. 남편과 삼시 세 끼를 함께 먹을 수 있는 지금이 좋다. ‘5만 원 돈인데 그냥 사자’라고 말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좋다. 출근 격식은 벗어버리고 아무 옷이나 세탁해 나온 순서대로 편하게 입고 다닐 수 있어서 좋다. 상대를 적으로 만들지 않고 호구도 되지 않는 처세술 같은 글은 딱히 클릭해서 보지 않는다. 뭇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게 되니 자연히 관심에서 멀어졌다. 내가 일을 할 땐 당신이 아기를 보고, 당신이 일할 땐 내가 아기를 본다. 아기가 곤히 잠들어 짬이 나면 글을 쓴다. 서른일곱이면 어떻고 마흔이면 어떻고 나이를 하나하나 세어 올해 내가 몇 살이냐 생각을 그만둔 지도 한참이 되었다. 지금 나에게는 아기가 있고 남편이 있고 송이가 있다. 나는 37년 묵은 무엇이 아니고 그냥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