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천천히 아침을 먹었다. 식빵을 두 장씩 네 장 굽고, 내가 바를 블루베리 잼, 크림치즈, 따뜻하게 우려낸 캐러멜 향이 나는 루이보스, 남편을 위한 딸기 잼, 버터 그리고 커피, 좋아하는 슬라이스 치즈 한 장씩, 거봉만큼 커다란 알을 한, 딱 거봉 색의 어느 나라에서 온 지 모를 포도 한 송이와 필수 품목인 사과. 아무것도 듣지 않고, 보지 않고 식탁에 앉아 따뜻한 차를 조금씩 들이켜면서 포도 씨를 정성스레 발라내면서 천천히 아침을 먹었다.
한 시간 전 상황은 이렇게 우아하고 여유롭지 않았다. 알람 소리에 일어나야 했지만, 찌뿌둥한 몸을 뒤척이다 더는 안 되겠다 싶을 즈음에 놀래는 것도 없는데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오븐의 온도부터 올리고 냉동 생지를 꺼내고 오래 쓰지 않았던 도시락통들을 꺼내고 아이들이 혹시 먹을까 손질한 과일을 식탁에 올려 두었다. 옷을 입고 내려온 아이들에게 로션을 발랐냐고 물었더니 역시나 아니었고, 바르라고 했지만 한 번에 바르지 않아 잔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로션을 강조하고, 한국에서 온 마스크에 마스크 걸이를 걸어 하나씩 나눠주고 목도리와 모자, 물통, 챙겨야 할 것들을 죄 확인하고 차로 큰아이들을 등교시켰다. 원래 둘이 걸어서 등교했지만, 집에서 공부하는 동안 모든 책이 집으로 돌아왔고, 한꺼번에 다 욱여넣은 가방이 너무 무거웠다. 학교 앞에서 길을 건네주고 다시 얼른 집으로 돌아왔다. 형들과 나갈 때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던 막내는 빼꼼히 열린 현관문 앞에서 나를 보자마자 “빨리 오기로 해 놓고, 왜 이제야 오냐.”며 울음 섞인 투정을 부린다. 아이를 다정하게 위로해 주지 못하고 빨리 왔는데 뭘 징징거리느냐고, 핀잔하며 전날이나 등원이 확정되었을 때 준비 해 뒀어야 했던 물건들을 그제야 떠올리고 찾기 시작했다. 체육관에서 신는 Turnschuhe(발레 신발처럼 생긴 밑창이 고무로 된 실내용 운동화)가 보이지 않아서 굳은 표정으로 여기저기 뒤지며 기어이 또 아이에게 한 소리 했다. “가지고 놀아야 하는 것만 가지고 놀아야지. 찾을 수가 없잖아.” 미리 물건을 챙겨놓지 못한 내 잘못까지 모두 아이에게 뒤집어씌우고 모자를 씌우는데 마빈의 표정이 굳어있다. 아차 싶어 그제야 찌푸려진 미간에 힘을 푼다. 조금 춥긴 했지만, 햇살과 바람을 맞자 마음이 상쾌하다. 마빈의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재잘재잘 마빈은 쉬지 않고 떠든다. 환상과 현실을 맘대로 넘나들어 완전 현실에 절인 내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지만, 신경 써서 귀를 기울이며 유치원까지 걸어갔다. 오랜만에 북적북적한 유치원 교실 앞에서 아이는 마냥 들떠 보였다. 막내가 가장 예뻐 보이는 순간. 교실로 들어가 엄마는 안중에도 없이 놀 때. 그보다 더 예쁠 땐 창으로 내다보며 인사를 할 때. 엄마한테 작별 인사하는 것마저 잊을 만큼 친구들이랑 노는 게 재밌을까, 생각하면 그만큼 자란 것이 심장이 뻐근하도록 대견하다. 내다보며 인사할 때는 하트 삼종세트 -엄지와 검지를 교차한 가장 작은 하트, 손 전체로 모양을 만든 중간 하트, 머리 위로 팔을 올려 만든 큰 하트- 에 꽃받침과 엄지로 최고, 손 흔들기, 자기 결심 - 오늘은 낮잠을 자겠다든지(왜 그런 결심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 과 엄마를 향한 당부 - “엄마, 오늘 아이스크림 사줘” 같은 - 등 온갖 애교와 애잔함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아이가 창가에 나타나는 순간 내 눈은 이미 하트가 되어 있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게 정신없는 아침이 마무리된 것이다. 마무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풍성해진 마음으로 돌아왔는데, 마음과 달리 몸이 천근만근이다. 아침 따위 건너뛰고 바로 눕고 싶었지만, 집에 남아있는 마지막 사람, 남편을 생각해 겨우 아침을 차려 함께 먹었다. 오래 천천히 세상에서 가장 여유로운 사람처럼 하는 식사 한 끼가 간만의 단출함의 가뿐함을 실감하게 했다. 나를 위해서도 잘했다 싶은 선택이었다. 주방을 정리하고 방으로 올라왔다. 쓸까, 읽을까, 잘까.
몸이 무거웠다. 묵직한 몸에 통증이 더해져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남편에게 문자 메시지로 쉰다는 말 한마디로 점심은 알아서 드시라는 뜻까지 전하고 누웠다. 자면서도 몸이 아팠다. 정신이 들어도 일어날 수가 없어 몇 번이고 다시 잠들었다 일어나 보니 막내를 데리러 갈 시간이었다. 과자 몇 조각 집어 먹고 얼른 집을 나섰다. 2월이 원래 이랬었나 싶을 정도로 날이 좋았다. 날씨 때문에 우울할 일은 없도록 환하게 따사로웠다(개인의 문제였던 날씨는 이제 인류의 문제인 기후로… 일단 지금은 거기까진 생각하지 말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 잡아봐라' 하며 신나게 뛰어가는 마빈의 뒷모습은 햇살을 그대로 머금고 반짝인다. 집에 온 아이들은 가방만 던져 놓고 놀이터로 달려 나갔다. 얼마 전까지 게임 때문에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아이들은 벼르고 있었다는 듯 달리고, 날고, 굴렀다. 자느라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야 해서 마음이 분주했고, 남편은 외출이 예정되어 있었다. 남편을 보내 놓고 쌓여 있는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 식기세척기가 고장 났다!- 다급하게 나를 찾으며 둘째, 쪼꼬가 들어왔다. 앞도 뒤도 다 잘라먹고 엄마가 와 봐야 한다고 했다. 무슨 일인지 꼬치꼬치 캐묻자 누나들이 어쩌고, 우리한테 어쩌고, 내용을 상세히 알 수 없었지만 삼 형제 친구들 무리와 동네 누나들 사이에 분쟁이 생긴 모양이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가봐야겠다 싶었다. 잠바만 걸치고 나가려다 꼴이 우스워 보일 것 같아 앞치마를 벗고 열쇠를 챙겼다. 놀이터로 가 보니 아무도 없었다. 쪼꼬가 말한 누나들도 없고, 심지어 놀고 있어야 하는 우리 아이들까지 안 보였다. 조금 있으니 놀이터 옆으로 나 있는 골목길로 쭉 가면 처음 나오는 토끼 키우는 집 마당 바깥쪽으로 무리가 보였다. 분쟁은 어떻게든 종식되었고 아이들은 금세 바뀌는 관심을 따라 여기로 저기로 흘러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씻고, 밥 먹자며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뛰어간 아이들이 문 앞에서 기다리는데,
어, 열쇠가 없다.
분명히 챙겼는데, 챙긴 것 같았는데.
독일 생활에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 것이 몇 있는데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이 열쇠이다. 디지털 도어록에 익숙해져 있었던 나는 닫으면 잠겨버려 문이, 열쇠가 없으면 열리지 않는 문이 정말 어려웠다. 덜렁거리고 물건을 흘리기 일쑤인 내가 세 아이의 폭격 중에도 꼬박꼬박 열쇠를 챙겨 나오는 일은 난도가 너무 높았다. 그래서 열쇠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는 한두 개가 아니다. 그때마다 상황은 다르고 집 밖에 서 있는 나의 상태도 다르지만, 매번 똑같은 것이 있다. 문이 닫히는 순간 등 뒤의 싸한 느낌. 아이들이 집으로 달려가고 열쇠를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등 뒤에서 문이 닫히던 순간이 떠오르며 불길한 예감이 따라온다. 예감이 틀리길 바랐지만, 열쇠는 주머니에 들어있지 않았고, 어딘가에 흘린 것도 아니었다. 나올 때 분주하고 정신이 빠져 있었고, 챙긴다고 챙긴 열쇠는 머릿속으로만 챙긴 것이었고, 아마도 제자리에 가만히 놓여 있을 것이었다.
오늘 챙겨 나온 것, 핸드폰, 마스크, 민트, 쪼꼬, 마빈.
우선 남편에게 상황을 알리는 연락을 취했다. 낮 동안 따스해 가벼운 잠바만 입은 아이들은 이내 추위를 탔고, 해는 뉘엿 지고 있었다. 금방 지평선 아래로 떨어질 것이고, 그러면 기온도 급격히 떨어질 것이다. 친구 다음으로 먹는 것이 소중한 쪼꼬는 울먹이며 “배고프다.”를 되뇌었다.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2시간은 기다려야 했다.
어쩌지. 머리가 아주 빨리 돌았다.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
대안 1. 마을에 있는 포장 가능한 이탈리안 식당으로 가서 음식을 주문하고 사정을 얘기해 본다. 운이 좋아 주인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면 식당 구석에 앉아 저녁을 먹으며 남편을 기다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안 2. 빵집이 있는 근처 마트로 가서 빵과 따뜻한 음료를 사 저녁을 먹는다. 너무 추우면 마트 안에서 기다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했다. 우선 옆집에 가서 사정을 말하고 30유로를 빌렸다. 애 재울 시간에 문을 열고 나와 아무 질문 없이 돈을 빌려주는 옆집 사람은 얼마나 친절한가! 이탈리안 식당이 있는 마을 광장 쪽으로 가봤다. 식당이 이상하리만치 어둡고 유리 안에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민트가 말했다. “맞아, 저 식당 월요일은 쉬는 날이야! 내가 봤어.”
아이들을 격려해 조금 멀지만, 다음 대안인 마트로 향했다. 좀 춥고 서글픈 처지였지만, 아이들은 어쩐지 신나 보였고, 나도 자꾸 웃음이 났다. 왜 이렇게 인생이 시트콤인 거야?
빵집에서 케이크와 초코머핀을 고르려는 아이들을 설득해 식사 대용이 될 만한 빵을 고르라고 하자 배고픈 아이들은 순순히 케제 브레첼과 젬멜을 골랐다. 따뜻한 핫초코까지 한 컵씩 들려줬더니 아이들은 마트 밖 벤치에 앉아서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남은 돈 12.7유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고개를 들어보니 마트 주차장에 항상 서 있는 학세(Schweinshaxe)와 훈제 닭을 파는 푸드트럭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에게 “통닭 살까?” 하고 물었더니 모두 대 찬성이다. 마트 앞 벤치에서 저녁 식사하는 우리 모습을 보신 건지, 그냥 아이들이 귀여워서였는지, 막대사탕 하나씩 선물로 주시는 맘 좋은 아저씨.
이제 2.8유로.
아이들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 마트에서 2.8유로로 뭘 살 수 있는지 알아보자!”
“엄마, 우리 찾더라도 바로 사지 말고 계속 구경하다 나중에 사자! 그래야 마트에 더 오래 있을 수 있지.”
맏이답게 의젓하고도 귀여운 민트의 묘수였다.
마트로 들어가자 훨씬 따뜻했다. 아빠가 오기로 한 때가 마트 닫는 시간을 많이 지나지 않을 것 같아 참 다행이라 생각하며(마트 문이 닫히면 다음 행선지는 집 옆 은행의 ATM 창구다!) 구석구석 구경하다 매번 사려다 빼먹고 온 식초 에센스를 집어 들었다.
“엄마, 벌써 사면 어떻게 해, 그렇게 참을성이 없어? 나중에 사야 한다고!”
민트의 잔소리에 “괜찮아.”로 화답하는 나는 이미 긍정의 화신이었다. 아이들 셋과 추위와 배고픔을 제대로 경험할 뻔했는데, 이웃이 순순히 빌려준 30유로 덕에 배가 부른 아이들은 유순하고, 마트는 따뜻하고 쾌적한 최고의 장소였다. 그저 아이쇼핑을 하는 한가로운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남은 1.81유로로 무엇을 살 수 있을까, 정도만 고민하면 되니, 천하태평이다. 마침 걸려온 남편의 전화는 또 희소식이었다. 이미 출발해서 집으로 오고 있다고 했다. 마트 마감 시간을 30분이나 남기고 도착할 것 같으니 이젠 정말 제대로 장을 봐도 되겠다. 지나왔던 코너들을 되돌아가 머릿속 리스트를 체크해 가며 카트를 채우고 있었더니 마빈이 “아빠!”를 외친다. 양 손 무겁게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작은 닭 한 마리 식탁 가운데 놓고 밥 한 그릇씩(너네는 왜 아무것도 안 먹은 것처럼 이렇게 잘 먹는 건데...?) 먹는데, 어마어마한 모험을 마친 성장 서사의 주인공처럼 쑤욱 커 있는 느낌이다. (더 클 수 있다면!)
오늘의 행운은 30분 이른 남편의 귀가, 그리고 마스크!
오늘의 긍정 에너지는 다 쓴 것 같아. 그만 자자.
긴 락다운 끝에 아이들이 등교 등원한
첫날, 마스크 좋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