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을 결심하지 않았다면, 이력서를 쓸 생각을 하지 않을 테고 저를 돌아볼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번 이력서를 작성하며 처음으로 저의 회사 생활 11년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특출 나게 잘하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보고서를 멋지고 화려하고 눈에 확 띄게 잘 쓰고,어떤 사람은 능글능글하게 싫은 소리도 다른 사람들 기분 상하지 않게 하면서 본인이 얻을 것은 얻고, 누구는 영어를 엄청 잘하고, 누구는 꼼꼼하고, 각자 자신만의 강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아무리 생각해도 남들보다 나은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보고서도 잘 못쓰고, 글솜씨도 없이 보고서 하나를 쓰기 위해서는 다른 보고서를 최소 10개는 참고합니다. 또한 남자들이 많은 조직에서 여자인 제가 나서기가 쉽지도 않습니다. 괜히 잘못하면 의도치 않은 의심을 받을 수 있기에 굉장히 조심했습니다. 그러니 회사 사람들끼리 사적인 모임을 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싫은 소리 하는 것에는 재주도 없고 괜히 한마디 했다 더 욕먹는 스타일입니다.
그럼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직장 생활 11년을 해왔을까 생각을 해보니 제 경쟁력은 딱 2가지였습니다.
'눈치'와 '성실함'이었습니다.
저는 '눈치'를 무척 많이 봅니다. 이것은 태생적인 저의 성격인지 아니면 직장 생활 11년을 통해 습득한 것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남들에 비해 엄청나게 신경을 씁니다.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살까 생각하여 눈치 안 보려 노력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저의 몸에 배어서 인지 안 보면 훨씬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호구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것이 마음이 편합니다. 눈치를 봄으로써 생기는 강점은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회사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지를 빠르게 파악합니다. 팀장님께서는 "네가 정보력은 정말 좋다" "어떻게 딱 내가 필요한 정보들을 빠르게 가져오지?"라며 칭찬을 해주시고는 했습니다. 게다가 웬만해서는 다른 사람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기에 의사결정에서도 우위에 서있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성실함'입니다. 이것도 타고난 성격인지, 아니면 자신감의 부족함을 성실함으로 커버하려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을 단 한 번도 지각, 결석을 하지 않았으니 조기교육의 효과로 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입사원 시절, 저의 능력에 비해 엄청난 양을 일을 받고 있던 시절 저는 주말마다 출근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무서운 부장님과 같이 일하는 시절이라 오늘은 혼나지 말자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한 번은 제가 금요일 퇴근 전에 보고서를 퇴짜 맞고 주말에 '내가 정말 뭔가 보여주겠어'라는 결심을 하고 혼을 담아 보고서를 만들어 월요일 출근 때 보여 드렸는데 아무도 "너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 했어? 주말에 나왔어?"라는 말은 안 하고 의심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더 열심히 해야 하는구나", "내가 한 것을 생색내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저의 힘이 되어 주었던 것은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였습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정말 열심히 일하던 안드리아가 실수 한 번에 혼이 나자 우울해 나이젤에게 상담을 합니다.
안드레아 "미란다는 잘한 건 당연한 거고, 조금만 잘못하면 생난리를 쳐."
나이젤 "그럼 그만둬"
안드레아 "그건 불공평해 , 나는 그저 내가 잘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거야"
나이젤 "너는 노력하는 게 아니야, 그저 불평하는 거고, 그녀는 그저 자신의 일을 하는 거야"
"You are not trying, you are whining. She's just doing her job."
그 후 꽤나 열심히 했습니다. 새벽까지도 하고, 주말에도 나왔습니다. 그래도 "너는 여기가 체질에 안 맞는 것 같아. 다른 팀을 찾아보는 건 어때?" 이런 얘기도 듣고, "다른 사람들 하는 것 좀 봐라" "신입이 너보다 잘한다"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근데 저는 오히려 그런 얘기를 들으면 승부욕 같은 것이 생겨서 더 열심히 했습니다. 지금 생각을 해보면 제가 진짜 못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저를 트레이닝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 후 대리가 되고 나서부터는 조금씩 칭찬도 받기 시작했습니다.
남자들이 많은 회사에서 일하는 여성은 특출 난 것이 전혀 없어도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상대를 모르지만, 대부분은 제가 누군지 알고 있는 상황이 여러 번 발생을 합니다. 이 상황에 주목을 받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잘 이용하여 강점으로 만들곤 하지만, 저는 반대로 '여자'라서 주목을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 이름을 얘기하면 "아 그 여자분?" 이라기보다는 "아 그 일 잘하는 분?"으로 기억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남직원들과 차별 없게 일을 하기 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두 번의 임신과 출산에도 내가 엄마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제 업무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모두 출산 이틀 전까지 일을 했었고, 출산 휴가 3개월 만에 복직을 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또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만일 내가 3개월 만에 복직하면 나쁜 선례를 만드는 걸까?'
'근데 만일 1년 쉬고 복직해서 승진에서 밀리면 어떡하지?'
그러나 '눈치'를 워낙에 많이 보고 '성실해야 한다'는 저의 성격상 결국 3개월만 쉬고 나오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그것이 저는 마음이 편했습니다. 아마도 1년을 쉬었다면 그동안 내내 마음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제가 임신과 출산을 했을 때는 3개월 쉬고 복직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기에 나쁜 선례고 뭐고가 없었고, 다음 후배가 출산을 했을 때는 출산 휴가로 1년 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져서 저의 선례로 후배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나름대로 저의 존재감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능력이 충줄했던 제 후배는 육아휴직 1년 후에도 바로 승진하여 멋진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력서를 쓰면서 저의 11년을 돌아보니 그래도 열심히 했구나 생각이 들었지만 서류 통과를 하기 전까지는 내가 잘하고 있나 의구심이 많이 들었습니다. 비록 팀장님께서 칭찬을 해 주셔도, '내가 잘 못해서 당근을 주시려고 칭찬을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많이 했고, 매일매일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서류 통과가 되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그래도 내가 열심히 해온 것을 다른 사람들도 알아봐 주었고, 잘해오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며 안도감이 들며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전에 한 상무님께서는 이렇게 얘기를 주셨습니다.
"저는 2년에 한 번씩 이력서를 써서 경쟁사에 제출을 했어요. 꼭 제출을 안 하더라도 이력서는 써봐요.내가 아직 경쟁력이 있는지 2년 전과 대비해서 내 이력이 어떤 것이 늘었는지 확인할 수 있고 그럼 더 성장해야겠다는 자극이 됩니다."
가끔은 우리에게도 그런 자극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직장 생활 10년이 흐른 지금 우리의 이력서에는 신입 때와는 달리 어떤 이력들이 추가가 되었고 그 이력들은 나를 계속 경쟁력 있게 만들어 주고 있나요? 나의 강점은 어떤 것이고, 단점은 어떤 것일까요? 저도 이런 기회가 없었다면 생각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