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리 Jun 29. 2019

참사, 그 후

중앙지 기자들이 떠나간 뒤, 포털에서 찾기 힘든 기사를 최초보도한 이야기

수습기자 딱지를 붙인 지 딱 2달째 되던 날 새벽, 전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지역에 큰 사건이 벌어진 것 같으니 나가보라는 전화였다.

비몽사몽으로 현장으로 출동하기 위해 차를 빼다가 옆 차를 긁었다.


면허를 따고 차를 몬 지 보름도 안 된 시점이었다.

서울에서는 차 없이도 잘만 지냈는데 지역에서 차 없이 기자 생활하기는 사실상 불가능이었다. 입사하자마자 면허부터 땄다.

눈곱만 떼고 현장에 나가겠다는 나에게 아빠는 급할수록 운전은 침착해야 한다고 당부했지만, 결국 옆 차에 기스를 내고 말았다.

한시가 급한 상황, 옆 차 차주를 불러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여유 따윈 없다.

아직 이른 시간이기도 해 날이 밝아지면 전화해야겠다며 얼른 차 상태와 연락처 사진만 찍고 액셀을 밟았다.


현장은 처참했다. 처음에는 별로 없던 기자들도 시간이 갈수록 몰려들었다. 

현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채 팔을 빙빙 돌리며 영상용 컷을 따내는 방송 기자, 주차장 한편에 걸터앉아 노트북으로 바로 기사를 송고하는 통신사 기자, 인터뷰에 응하는 사람한테 벌떼같이 달라붙은 기자들. 온갖 기자 군상을 다 봤다.

항상 경찰서 기자실에서 매일 보는 기자 몇 명만 마주했는데 이 지역 여기저기 다른 곳으로 출입하던 기자, 근처 타 지역에서 활동하는 기자까지 다 봤다. 지금 내 핸드폰에 저장된 기자 8할은 이때 알게 돼 인사를 나눈 이들이다.


함께 현장에 출동했던 사수는 아침 회의 시간에 맞춰 회사로 들어가고 나는 현장을 계속 지켰다.

나중에 들어보니 회의 중에 다른 기자들을 더 투입할까 얘기도 나왔지만 결론적으로 사수랑 나 둘이서만 맡기로 이야기가 되었단다.

사건이 난 첫날은 선배 기자 한 명이 지원을 나왔지만 이후에는 사수와 나, 두 명이서 이 사건을 다뤘다. 간혹, 이 사건을 두고 서울발 대책 혹은 정치·교육 등 타 분야 연계 사안이 나오면 담당기자들이 기사를 쓰긴 했지만.


개인적으론 특별취재팀을 만들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해도 간다.

아무리 이 지역의 대표 신문이 우리라 한들, 인력 사정 넉넉지 않은 지역 신문이 유용할 수 있는 기자란 한정돼 있으니.

이 사건을 중앙지 중 가장 대대적으로 보도한 한 언론사는 신문기자 8명에 계열 방송사 기자 3명까지 해서 총 11명을 보냈단다.

너무 사적인 부분까지 들어간 그들의 자극적인 보도는 우리 신문의 지향점과는 맞지 않았지만, 사건과 관련해 필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에 얼마든지 인력을 투입해 충분한 취재를 할 수 있는 그 시스템만은 부러웠다.

다뤄보고 싶은 부분이 많았지만, 다 할 수 없는 현실이 서글펐다.

물론 내 실력이 아직 그만큼 되지 않는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고. 아직 글이 많이 느려 걸핏하면 혼이 나니까. 내가 더 빠릿빠릿했다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꼭지를 쓸 수 있었겠지.


전국에서 온갖 기자들이 다 몰려든 탓에 경찰서도 난리가 났다.

지금까지 브리핑은 늘 소강당에서만 진행해오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대강당을 개방했다.

취조하듯 몰아세우는 질문 공세에 형사과장은 넋이 나간듯했다.


사건은 순식간이었으나 피해자들의 울부짖음은 바로 멈추지 않았다.

비탄에 빠진 그들을 매일 같이 만나러 나갔다.

몇 벌 없는 새카만 옷을 돌려 입으며 그들과 가장 가까이에 서있었던 탓에 관련인이라 생각하고 내게 질문을 건네 오는 이도 여럿 있었다.

휴일 따윈 무시하고 눈 뜨자마자 차를 몰고 나가 자정 넘은 시간까지 피해자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애썼고, 근무일에도 기사 마감 후 현장으로 달려 나가 밤늦게까지 자리를 지켰다.

격무에 시달리는 게 걱정됐는지 바로 집으로 퇴근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날, '혹시라도 내가 안 간 사이에 진척이 있으면 어떡하지' 싶은 마음에 현장으로 달려갔다가 선배에게 들켜 한참 혼나기도 했다.

하긴 의욕은 계속 넘쳤지만 몇 날 며칠의 강행군이 이어졌기에 체력적으로 무리가 되긴 했을 것이다. 그즈음 밤늦게 집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 거의 넉다운이 된 채로 운전을 하다 '이러다가 사고 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으니.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외지에서 온 기자들은 하나둘 떠나갔다.

국장님은 중앙지의 관심이 이곳에서 멀어진 이 시점, 계속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리만이 다룰 수 있는 기사를 쓸 수 있도록 계속 주시하라고 주문했다.

쉽지는 않았다. 굵직한 기사거리는 다 이슈가 됐고 지역은 조금씩 평온을 찾아가고 있으니.


큰 기사는 쓸 수 없더라도 사건이 벌어진 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그들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자그만 행사가 열릴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현장을 찾았다. 

사전에 관계자들에게 물었을 땐 취재가 가능하다 들었는데, 막상 현장에 가보니 "기자는 싫다"는 사람이 있어서 행사를 지켜보지는 못했다. 관계자는 "케이블 방송에서는 싫다고 해도 막 뚫고 들어가던데 너무 물렀네. 내 권한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 주겠다"라고 말했지만 아직 사건으로 고통받는 이가 원치 않는다면 굳이 들어가 그들을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관계자에게서 기사거리가 될만한 이야기 하나를 들을 수 있었다. 평소 전화로 대화할 때는 듣지 못했던 소재가 직접 얼굴을 마주하니 흘러나왔다. 한 시간을 듣고 나니 '이건 써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사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고, 여러 경로로 사실 확인을 하고, 이 내용이 기사화되었을 때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피해자는 없을지 파악하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다. 한참 전부터 잡혀있었던 다른 취재 현장에 나가 해당 기사를 써야 하기도 했고.


마침내 기사가 나갔다. 마음 같아서는 기사와 관련해 여러 기관에 더 문의한 후 기사를 쓰고 싶었지만, 언제나 글이 느려 기사 언제 완성되냐고 혼이 나는지라 더 미룰 순 없었다.

점심을 먹고 회사에 들어오니 부국장님이 "모 통신사 기자가 니 기사 보고 썼네"라고 했다. 읽어보니 맥락은 비슷하지만 확실히 대형 통신사 기자라 글을 잘 썼다. 기사에 등장하는 관계자 발언도 내 기사와는 다른 것이 본인이 직접 접촉해 이야기를 들은 듯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게 이 사안을 알려줬던 관계자가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해당 기자에게 직접 연락을 했다고 한다. 우리 신문에 실리기 전날 저녁 해당 기자에게 연락을 해 다음 날 아침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단다. 다음 날 아침 우리 신문에서 해당 기사를 발견하고 읽고 있는데 들어온 해당 기자는 내 기사가 먼저 나간 걸 알고는 맥 빠진 표정을 지었다고.


어찌 됐든 연륜이 넘치는 해당 기자가 쓴 기사는 좋았다. 나 같은 병아리보다 문장, 구성 등이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다. '이 소재를 이렇게 쓰면 더 좋겠구나' 생각하며 따라 써볼 용도로 그의 기사를 프린트했다.

분량 제한이 없는 통신사다 보니 한정된 지면 사정상 이야기를 잘라내야 했던 우리와는 달리 깊숙하게 담아낼 수 있던 점은 부러웠다. 나 역시 제일 처음 기사를 작성했을 때는 안타까운 사연, 당사자가 받고 있는 고통 등을 더 세밀하게 다뤘으나 "줄여"라는 지시에 절반 가까이 덜어내야 했다.


나는 언제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기사를 길게 써서 혼난다. 유능한 기자는 한정된 분량 안에 압축하고 또 압축해서 필요한 이야기를 다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데 아직 부족하다. 담아내고 싶은 것도 많고, 그를 위해 취재하고 싶은 곳도 많아 여기저기 많이 접촉한다. 연차가 쌓이면 인터뷰할 때도 기사에 담길 부분이 어딘지 딱 감이 와서 필요한 질문만 하고 얼른 철수한다는데, 나는 아직 그런 감이 잘 안 와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시간에 허덕일 수밖에 없다. '생산성' 낮은 '비효율적'인 기자다.

인력이 넉넉한 회사에서는 언제든 한 기자가 한 사안을 심도 깊게 파고들어 대형 기사를 만들 수 있겠지만 우리는 아니다. 소수의 기자로 매일매일 정해진 면을 채워야 하니 쉽지 않다. 주간지나 월간지에 가면 조금 느린 호흡으로 긴 기사를 쓸 수 있진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찌 됐든 나는 취재를 완료하고도 기사를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인 것도 사실이라 일단 내 역량을 먼저 키운 다음 생각해 볼 문제일 테다.


늦은 오후가 되자 회사로 나를 찾는 전화가 자꾸 걸려왔다. 

방송 3사 뉴스데스크부터 라디오까지, 취재원 연락처를 알려달란다. 우리 회사 출신의 타사 기자에게서도 사수를 통해 연락이 왔다. 사수는 그가 얼른 연락 달라고 했다며 바로 연락처를 넘기자고 했지만, 안 된다고 본인 동의 먼저 구해야 한다고 다소 강하게 못을 박았다. 한참 뒤에야 본인과 연락이 닿아 동의를 받고 연락처를 넘겼다.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통신사 기자가 쓴 글이 메인에 떠있었다. 그 기사를 보고 리라이트 한 기사가 연관 기사로 줄줄이 따라붙어 있다. 모 포털에서는 랭킹 2위를 해 댓글이 수도 없이 달려있다. 최초 보도였던 내 기사는 한 번에 보이지 않는다. 여러 번 클릭을 더 하면 비로소 볼 수 있지만 누가 그렇게 정성을 들이겠는가. 취재를 해야 하는 언론사들만 기사를 최신순으로 정렬한 후 가장 과거 기사로 거슬러 올라갈 뿐. 대부분의 매체들은 'OO에 따르면'이라며 통신사발 기사를 인용해 후속 보도를 했는데, 두어 개의 매체만은 우리 신문을 출처로 언급하며 인용보도를 해주더라. 괜히 고마웠다.

어쨌든 전국적으로 꽤 크게 화제가 됐음에도 지역 언론을 배제하는 포털의 검색 알고리즘 탓에 인터넷에서 내 기사를 본 이는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포털을 타고 우리 신문 홈페이지로 유입됐더라면 댓글이 포털에 떠 있는 통신사 기사처럼 네 자릿수는 아니더라도 한두 개 정도는 달렸을 법한데 단 하나도 없었다. 회사 홈페이지에도 많이 본 기사 순위에 내 글이 없었고. 

지인에게 이 이야기를 해줬더니 "그 기사 네가 쓴 거였어?"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포털에 뜬 기사를 보고 '아, 얘도 이런 문제를 짚는 기사를 써야 할 텐데. 대형 매체 기자는 역시 뭐가 달라도 다르네'라는 생각을 했단다. 지역 신문사의 숙명일 테다.

보도 이후 기자실에서 만난 공영방송 기자는 나에게 "덕분에 그 문제 알게 돼 잘 보도했다"라고 했다. 이 사안이 수면 위로 떠올라 결국 일정 부분 좋은 방향으로 해결되자 지역 의회 의원들이 기사 참 좋았다고 정치부 선배한테 칭찬을 했단다. 선배는 '한 건 했네'라며 칭찬을 하며 이 기사로 지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에 한번 도전해보라고 했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결국 대형 매체가 물어야 전국발로 퍼져나가고 큰 이슈가 된다. 대중은 최초보도를 기억하지 않는다.

작가의 이전글 매일 저녁 경찰서에 들르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