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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인 Jul 11. 2019

신은 죽었다

영화 <행복한 라짜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드디어 고대하던 영화를 보았다. <행복한 라짜로>다. 지난 해 열린 제71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작품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했는데, 상영관이 마땅치 않아서, 위치도 시간도 애매한 압구정 CGV의 오후 9시 30분 타임을 보게 됐다. 16mm로 투박하게 촬영한 아름다운 그림과 특별한 서사 기법, 그리고 무겁게 던지는 메시지에 매료됐다. 막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내내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이 영화는 1980년대 초반 이탈리아에서 한 후작 부인이 외부와 단절된 채 살아가던 농부들을 노예처럼 착취했다는 실화를 차용한 이야기다. 놀랍도록 잔악한 이야기지만, 그로부터 30년 후인 2014년, 지구 반대편인 대한민국에서도 신안군 염전노예 사건이 떠들썩했다. 인간의 잔악성은 사회의 진보를 막론하고 되풀이됨이 틀림없다. 한편 이 영화는 장르적으로 판타지에 가깝다. 위 실화를 통해 얼핏이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의 초반은 이렇게 흘러간다. 과거 목가적인 소작 농가의 풍경을 그리는 듯하다가 (심지어 너무나 아름답다), 세련된 자동차, 힙합 노래를 등장시키며, 영화가 현대의 이야기였음을 관객으로 하여금 인식시키고, 지주인 후작부인에 대한 분노를 끄집어낸다. 관객인 우리는 마을 사람들의 탈출과 해방을 소망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행복한 순수 청년 라짜로가 있다. 라짜로는 이탈리아판 돌쇠 같은 존재다. 어린 아이부터 노쇠한 할머니까지 궂은 일이라면 연신 라짜로를 불러대는 모양이 우습게도 그려진다. 문제는 이 라짜로가 마을 외곽에서 어찌하다 (영화의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생략한다) 발을 잘못 디뎌 절벽에서 추락해 기절하는 것이다. 마침 그때가 경찰에게 마을 실상이 발각되는 시점이다. 부인의 대사기극이 세상에 알려지고 마을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는데, 라짜로는 이에 낙오된다. 애석하게도, 행방이 묘연한 라짜로를 마을 사람들은 찾지 않는다. 마을에서 가장 인정 있는 인물로 그려지는 안토니아만이 라짜로를 걱정할 뿐이다. 사람들은 농간의 피해자이지만, 그와 동시에 이기적인 인간 군상의 연장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경찰의 인도 아래에 마을을 떠나는데 여기서 재밌는 장면이 하나 있다. 도시로 가는 길목의 얕은 물웅덩이에서 사람들이 건너지 못하고 서성인다. 위험하다며 입을 모아 불평한다. 경찰은 답답해하며 시범을 보여주고, 그제서야 사람들은 주춤대며 웅덩이를 건넌다. 나는 이 영화가 ‘우습지만 편히 웃을 수 없는’ 블랙 코미디적 요소가 많다고 느꼈는데, 이 장면에서 그랬다. 공포정치로 작용한 그동안의 세뇌와 착취에서 그들이 얼마나 실재 없는 불안에 시달렸는 지 잘 보여준다. 동시에, “이 사람들 좀 봐. 모든 걸 무서워하고 있어”라며 답답해하는 경찰의 모습은, 그들을 마을에서 꺼내 준 것이 국가의 진심 어린 사죄나 위로가 아니라, “선진적인” 사회 시스템의 의무적인 적용에 지나지 않음 보여준다. 도시로 나가서 마을 사람들은 사회의 연민 대신 불통이라는 피로적 상황에 놓일 것임을 예견하는 것 같다.


어쨌든 모두가 떠나고 마을은 텅 비게 된다.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라짜로가 끔벅거리며 눈을 뜨게 되는데 여기서 영화의 장르가 판타지로 바뀐다. 라짜로는 원래 모습 그대로 일어났는데, 저택 밖은 넝쿨로, 안은 거미줄로 그득그득 하다. 그새 십수년이 흐른 것이다. 라짜로는 두 발로 도시까지 걸어 가고, 그곳에서 우연히 안토니아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을 하나 둘씩 다시 만나는 내용으로 이후 스토리가 전개된다.


찾아보니 이렇게 환상과 현실을 묘하게 결합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예술적 기조가 있다. 인물과 행동은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판타지적 설정을 섞는 것이다. 관객을 낯설게하고 객석과의 안전 거리를 유지할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판타지적 상황속에서도 현실 문제가 스크린을 덮치며 공포심을 자아내고 사안의 중차대함을 강조하는 것 같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좋아하는 영화 중에 <루비스팍스>라는 작품이 있는데, 이 영화와는 아주 다르지만 왜 두 영화에 매료됐는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아이러니에서 오는 특유의 짜릿한 미학이 있다.


사람들은 나이만 먹고 얼굴만 변했지 실상 그대로다. 사회화되지 못한 채 도시로 내던져진 사람들은 도시에서 범죄를 일삼으며 여전히 궁핍하게 살고 있다. 후작부인의 하수인이었던 자는 낮은 임금을 부르는 자에게 일감을 경매처럼 낙찰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여기서 바뀐 건 노동의 대가로 ‘돈’이 주어진다는 것일진대, 그것만으로는 평등한 기회와 합당한 보상을 보증해주지 못함이 명백하다. 과거 마을 사람들을 억압했던 건 분명 후작부인이라는 권력자의 농간이지만, 그녀가 사라진 후에도 사람들의 생활상이 여전한 이유는, ‘착취’라는 것이 몇몇 극단의 권력자들이 저지르는 부조리이기 전에,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고질적 병폐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옛날 모습 그대로 과거에서 튀어나온 순수 청년 라짜로를 매개로 과거와 현재를 재치 있게 연결하며, 그 속의 구조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음을 훌륭하게 보여준다. 시대가 변해도 결코 달라지지 않는, 달라지지 못한 것에 대해 말하기에 꼭 맞는 서사 기법이다. 최근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계급 문제를 자본주의 시대에 “시의 적절하게” 다뤘다면, <행복한 라짜로>는 계급 문제의 트리거가 되는 인간의 이기심이 시대와 시의성을 막론한 본성적 문제임을 말한다.


라짜로는 절대선이다. 곧, 종교적 의미의 초월자로 은유된다. 영화에 종교적 소재가 자주 나오기 때문에 종교적으로 해석함이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심지어는 “라짜로”가 성서에 나오는 인물인 ‘라사로’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영화는 ‘늑대’라는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 메타포를 통해 ‘신’을 말하는데, 엄밀히 따지자면 늑대가 신이고 라짜로가 대변인 정도인 이다.


앞서 밝히지 않은 것이 있는데, 추락하여 기절한 라짜로가 다시 일어날 때 그를 깨웠던 것이 늑대다. 나는 이 장면에서 늑대가 라짜로를 해하는 게 아닌가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같은 모습으로 ‘부활’하게 한 셈이다. 이 장면에 겹쳐져 마을을 떠나는 안토니아가 고전동화를 들려주듯 하는 얘기가 나레이션으로 쭉 깔려 나오는데, 영화에서 늑대를 유일하게 직접 묘사한 부분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아쉽게도 짧게 지나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마을의 농작물을 망가뜨린 힘 없는 늑대를 사람들이 흉악한 모습 때문에 두려워했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여기까지는 늑대가 허상과 같은 부정권력을 상징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내 나오는 나레이션에서 그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라짜로가 깨어나는 찰나에 ‘유유히 다니던 늑대가 죽은 자의 선한 사람 냄새를 맡았다’는 내용의 나레이션이 나온다. 늑대는 신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신’이라는 존재를 ‘힘 없는’ 늑대라고 했을까. 영화의 전체적인 서사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오히려 신이 있다고 하기에 더 이상한 상황이고, 사회다. 인간을 징벌하던 흉악한 신을 사람들은 두려워했지만, 결국 신조차 인간 사회의 악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죽은 자를 데려가려던 신이 라짜로의 선한 사람 냄새를 맡고 부활시켰지만, 절대선도 결국 사회를 구원하지 못다.


라짜로는 결말에 가서 죽는다. 라짜로가 자본주의로 대변되는 ‘은행’에 찾아가 사람들로부터 가져간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게 되는 해프닝이 벌어지는데, 은행털이범으로 오해한 사람들이 그를 구타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다. 절대선이 죽음을 맞이한다. 바닥에 쓰러져 웅크리고 있는 그의 얼굴이 피로 물든다. 그 얼굴 면면에 사람들을 악으로부터 구원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들어차는 것 같다.  짜로의 죽음 곁에 다시금 나타난 늑대는 그의 시신을 뒤로한다. 도시 도로 위를 내달는 모습이 힘이 없음에 도망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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