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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인 Aug 30. 2019

관객의 판타지와 영화의 신기루

영화 <오아시스>

영화 <오아시스>


    이창동은 감성적이면서도 사회성 진한 영화를 만든다. 많은 이들이 '믿고 보는 감독'이다. 보지 못하고 있던 그의 2002년작 <오아시스>를 감상했다. 문소리, 설경구 주연이다. 2002년 당시 이창동은 이미 <초록 물고기>와 <박하사탕>으로 명감독 반열에 오른 후였고, <오아시스> 촬영본이 눈에 차지 않은 감독이 초반부를 재촬영했다는 소식이 이슈가 되기도 했다.


    그만큼 공들인 이 작품은 베니스 영화제에서 특별감독상과 여우신인상을 수상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베니스 영화제 2개 부문 본상을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다.


    한편, 뇌성마비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한 이슈와 불편한 설정 때문에 당시 국내 평단의 갑론을박이 활발히 이뤄졌고 씨네 21에서도 반박/재반박의 평론이 연달아 기고되었다. 지금까지도 리뷰어들의 상반된 피드백을 양산하고 있다. 나도 그만큼  말이 은 영화다.



    종두(설경구)는 뺑소니 교통사고로 징역형을 살고 나온다. 제 나름의 미안한 마음을 덜기 위해, 반길 사람 없는 피해자 가족을 찾아가고, 그 집 딸 공주(문소리)를 만난다. 공주는 거동과 대화가 불편한 뇌성마비 환자다. 종두는 피해자 가족에 쫒겨 나지만, 다시 찾아와 공주에 꽃을 주고 가기도 한다. 어느 날 종두는 공주 혼자 남은 집에 찾아가 구애하다가, 신체가 불편해 저항하지 못하는 그녀를 추행한다. 공주는 기절하고 종두는 그녀에 물을 끼얹어 깨운 후 도망간다.


    혼자 남겨진 공주는 외롭. 공주의 가족은 그녀를 돌보긴 하지만, 그녀의 장애인 신분을 이용해 아파트를 특별 분양 받고 공주는 혼자 허름한 집에서 지내게 한다. 밥 챙겨 주러 온 옆집 부부는 공주의 집에서 정사를 나누고, 공주가 이를 목격한다. 이후, 공주는 종두가 두고 간 연락처로 전화를 걸고, 종두는 공주를 다시금 찾아와 돌보며 둘은 사랑을 키워 나간다. 사이가 돈독해질때쯤, 종두와 공주는 서로가 원하는 성관계를 맺게 되고, 집을 찾아온 공주의 가족이 이에 발견해 깜짝 놀라 경찰에 신고한다. 말 못하는 공주는 진술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종두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괴로워한다. 종두는 수감되고 공주는 종두를 기다린다.




관객의 판타지와 영화의 신기루
- 이 영화는 범죄 미화 인가?


    영화는 불편하다. 범죄자 종두가 공주를 추행하는데, 결국 그들이 사랑에 빠진다는 끔찍한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왓챠에서는 <오아시스>가 “범죄 미화 영화”라는 비판을 많이 볼 수 있다. 나부터도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에 변명을 허락하며 힘을 실어주는 폭력 미화 영화들을 싫어한다. 남편의 학대 속에서도 그와의 사랑을 키우며 훌륭한 화가로 성장한 장애 여성 이야기의 영화 <내 사랑>(2016)은, 당시 “아름다운” 영화로 큰 호응을 받았지만 내겐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감독의 도덕성과는 별개의 문제로,) 예술에도 어느 정도 윤리적 잣대가 필요하다고 생각다.


    그런데 <오아시스>는 미화라고 보기엔 복잡하다. 그들의 사랑이 이미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충분히 문제적으로 다루고 있다. 대놓고 불편하다. 몇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관객인 우리는 ‘종두’라는 인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종두는 폭행과 강간미수 전과가 있고, 걷는 모양새부터 양아치 같다. 행동마다 시종일관 반사회적이다. 한편 종두가 공주를 성추행함은 자신의 성욕 해소를 위해 그녀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끔찍한 행동인지 알기엔 너무 어리숙한 그에게 일종의 사랑표현이다. 영화는 추행 전 “꽃”이라는 상징을 통해 종두가 진심이었음을 관객에게 설득하고 있다. 심지어 영화 후반에는 그가 징역살이 하게 한 뺑소니 사건이, 종두의 범행이 아니라, 사고친 형 종일(안내상)을 위해 전과가 있는 본인이 희생하여 감옥에 들어간 것으로 밝혀진다.


    결론적으로 종두는 순수한 사랑의 마음을 가진 성범죄자이다. 또 자신을 교화시키지 못하고 처벌만 가한 국가 사회의 피해자이자, 가족 사회의 피해자이며, 동시에 끔찍한 폭력의 가해자이다. 


    영화는 우리가 그를 측은하게 바라보길 바란 것일까? 단언컨대 아니다.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어리숙함이 범죄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통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그 통념을 뒤집고자하는 (폭력 자체를 축소하고 포장하고자 하는) 시도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후반부에는 여고생의 핸드폰을 쓰기 위해 종두가 강압적으로 제압하는 장면으로 그가 여전히 흉악범임을 영화는 재차 강조한다.


    그렇다면 그런 남자의 사랑을 왜 굳이 순수하고 행복하게 그렸냐고 되물을 수 있다. 영화는 불편하다. 불편하라고 만든 영화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창동은 한 인터뷰를 통해, <오아시스>를 보는 관객들이 “영화”라는 것에 기대하는 판타지를 의도적으로 비틀어 불편하게 만들고자 했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현실에 도피해 아름다운 판타지를 기대하고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들로 하여금, 오히려 현실보다 더 불편한 현실을 마주하도록 설계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영화는 관객을 시험대에 올린다.




    요컨대 는 "사회에서 충분히 교화되지 못했고, 사랑의 감정만큼은 순수했다는 사실과 관계 없이 그 범죄가 추악함은 너무도 당연한 통념이다"를 전제로 한다. 이로써, 이 영화는 추악성과 사랑의 행복이 공존하는 불편한 현실을 관객이 마주하도록 한 것이지 추악성과 사랑의 경계를 흐뜨리고자 한 것이 아니다. 내가 이 영화가 명작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인물의 행동에 모종의 설득력을 부여하면서 캐릭터에 대한 양가 감정을 들게 했다는 것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양가 감정'이 캐릭터의 행동이 미화되어 가치판단이 불가하기 때문에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관객이 종두라는 캐릭터의 가치를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눈 앞에 그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에 대한 괴리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영화가 범죄를 미화한다고 여기는 것은 위의 차이가 교란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 긍정적인 인물’, ‘사랑 영화 = 아름다운 것’이라는 관객들의 판타지가 영화에 대한 판단을 좀먹은 결과다.


    영화는 종두를 긍정적으로 그리지도, 그들의 사랑을 칭송하지도 않았다. 영화는 ‘어떤 범죄는 사랑의 표현이더라’, ‘어떤 범죄자는 어쩔 수 없었다더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랑은 아름답지 않더라’라고 말하는 것에 가깝다. "못 배워서 그렇지 애는 착해"류의 메시지가 아니다. 이 영화는 현실 어딘가에 있을 법 한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우리는 판타지를 바라고 극장 들어가 의도된 불편을 느껴야 하는 방관자일 이다.




영화, 이래도 괜찮은가

-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



   그 아름답지 못한 사랑이 왜 시작되었을까. 공주는 외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족까지도 그녀를 외면했다. 그녀는 옆집 부부의 정사를 목격해 성의 실체를 직면하고, 이후 종두가 자신을 추행했음에도 자신에게 예쁘다고 한 종두에게 애정을 확인 받고자 한다. 그를 사랑하고, 그와 성교한다.


    앞에서도 계속 "있을 법하다고" 말했듯이, 사회가 만든 히스테리적인 외로움 때문에 생긴 이런 비극적 상황이 크게 비현실적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영화가 도덕적 비판에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위에서 말한 모든 관에서 ‘비장애인을 위한 장애인 영화’라는 것이다. 뇌성마비 환자들 그저 "불편한 현실"을 담은 영화의 알레고리 안에서 "사회적 피해자"라는 서사적 장치로써 기능하기 위해 차용된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결국 사회의 피해자인 그들을 이해하고 위로하기 보다, 상처를 수면 위로 끌어올고 심지어 왜곡해야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영화인 것이다.


    "소수자 영화"가 가져야 할 모종의 대표성과 도의성은 애매하고 예민한 문제지만, 장애인 영화가 장애인연대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은 것은 달갑게 보기에 굉장히 이례적이다.


    영화 스스로가 "옳고 그름을 분별키엔 사회가 너무 타락했음"을 서사적으로 증명하면서도, 이를 바라보는 관객에게 올바른 통념적 판단을 하기를 바랬다는 것이 모순으로 남는다. 또, 판타지를 비틀어 현실의 어두운 단면을 비추고자 한 노력을 이해함에도 불구하고, 소수자 영화에 관객들이 지당 기대하는 것을 배반했다는 비판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이 영화가 명작이면서 망작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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