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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Jul 29. 2019

피렌체에서 노을 바라보며

미켈란젤로 언덕, 노을과 사랑의 성지


Firenze(Florence)!

오랜 호스텔 생활의 고단함을 달래기 위해,

나름 호텔로 잡았다. 사실 호텔이라고 하기 좀 그렇고, 굉장히 전형적인 이태리 가정집 느낌이었다.

연세가 지긋하신 이태리 할머님이 직접 운영하시는 공간이었는데 할머님은 매우 친절하시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넘치시는 멋진 황혼이셨다. 혹시 피렌체에 간다면 꼭 들러보길 바란다. '카사 코르시(casa corsi)'이다. 오랜 여행 중에 이 곳을 들른다면 고향 생각나게 하는 할머님의 포근한 정에 울컥할 수도 있다. 할머님은 영어로도 원활하게 소통이 가능하셔서 큰 불편함 없이 생활했다. 그곳에 4박을 하는 손님이 드물었는지, 내게 자신의 단골 카페에서 무료 빵과 커피를 제공해주셨고, 한국인 손님이라는 걸 파악하시고는 내 방에 한국어로 된 이태리 관광 책자를 준비해주셨다. 뿐만 아니라 정말 로컬들만 알 법한 맛집, 600년 넘은 향수 가게 같은 곳들을 추천해주신 덕분에 풍요로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사실 피렌체는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때문에 꼭 한 번 머무르고 싶은 도시였다. 고등학생 때 우연히 그 영화를 보고 어찌나 울었던지.

매듭짓지 못한 첫사랑의 추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물 찔끔할 영화다. 한 때나마 어딘가 있을 나의 쥰세이를 떠올리며 내가 그의 아오이이길 바랐던 적이 있었다. 길게 이어진 끈에 매듭을 짓고 나니 나는 그에게 잊지 못할 첫사랑 아오이가 아닌, 잠시 스쳐갔던 메미같은 존재였단 걸 깨달았지만 말이다.

가장 슬픈 사실은 아오이도, 메미도 쥰세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거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재회 장소였던 피렌체 두오모만 알고 떠났던 피렌체였다. 두오모는 물론 아름다웠다. 다만 올라가느라 종아리 터질 뻔했다. 아오이처럼 스커트에 굽 있는 신발 신고 올라갈 곳은 못된다. 영화는 영화다.

두오모보다 나의 마음을 빼앗았던 곳은 바로

 '미켈란젤로 광장'

피렌체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황홀한 뷰뿐만 아니라, 맥주 한 병 기울이며 아마추어 음악가들의 버스킹을 듣고, 난간에 기대어 노을을 기다리는 모든 여행객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기다림 끝에 바라본 노을, 그리고 밤의 피렌체는 태어나 경험한 모든 도시의 석양과 야경보다도 아름다웠다.

이 곳에 반해 이틀이나 이 곳을 찾았다.

아름다운 피렌체를 배경으로 사람들의 삶을 가만히 바라보자.

이틀 동안 나의 레몬맥주 병뚜껑 오픈을 책임져 준 조지 클루니를 닮은 맥주 트럭 아저씨. 아저씨가 너무 젠틀해서 이틀 내내 이 곳만 찾았다. 여자 혼자 이탈리아 여행의 가장 큰 단점은 시도 때도 없이 꼬이는 이태리 남자들인데, 트럭 아저씨는 보기 드물게 젠틀하셔서 편안했달까.

중국인 친구들도 만났다. 나와 함께 나란히 서서 노을을 바라보던 친구들이었는데, 내가 먼저 카메라를 꺼내며 "너희 찍어줄까?" 하니 흔쾌히 포즈를 잡길래, 열심히 찍어 이메일로 사진을 보내주곤 서로의 행복한 여행을 빌어주었다.

유쾌한 친구들도 만났다. 혼자서 풍경만 찍고 있는 내게 다가와 내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먼저 호의를 베풀었다. 내 카메라를 맡겼더니 결과물이 영 신통치 않은지, "내 여자 친구 아이폰 인물 모드 돼! 이걸로 찍으면 기가 막혀. 이걸로 찍어서 메일로 보내줄게!" 하더니 정말 열심히 찍어줬다.

멕시코 친구가 찍어준 사진

그러더니 내게 "Where are you from?"이라 묻길래 "South Korea"라고 답하니, 갑자기 매우 매우 놀라고 기뻐했다. 무슨 영문인가 했더니, "We're from Mexico!"라며 월드컵을 언급하며 코리아에게 격렬한 감사를 표했다.

태어나 처음 나가본 월드컵 거리 응원이 하필 출국 직전 광화문에서 관람한 멕시코전이었다. 1리터짜리 맥주를 들고 버럭버럭 성질내며 본 경기였는데 고맙다고 하니 머쓱했다.

여행 기간이 하필 월드컵 경기 기간과 맞물려서 즐거웠던 경험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비록 독일에서는 한국인 아닌 척하고 다니려 애썼긴 하지만 말이다.

이 곳에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이면 더욱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위스에서는 엄마가 떠올랐고, 파리에서는 친구들이 떠올랐고, 피렌체에는 연인을 그려보았다.

뜨거웠던 한낮이 서서히 식어 저녁이 오면, 더운 낮의 열기를 머금은 듯 잔뜩 상기된 분홍빛 하늘이 찾아온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내 뒤에 앉은 연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내 귀에 명확하게 들린 한 마디, "Will you marry me?"

슬며시 고개를 돌리니 남자는 여자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고 있고, 둘은 눈이 그렁그렁하더니 이내 백허그를 하고 노을을 바라보며 행복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쩝..." 괜히 봤다. 나도 노을이나 봐야지. 맥주와 함께.

해 질 녘엔 한국인 친구들을 만났다. 한 분은 퇴사 후 여행으로 이탈리아를 오신 여자분이었고, 다른 한 분은 따가운 눈총 각오하면서 일주일 정도 연차를 내고 이탈리아로 오신 남자분이었다. 두 분은 내 나이를 듣더니 부러워하셨다. 그리고 똑같은 이야기를 하셨다.

부디 더 많이 여행하세요.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즐기고, 더 많은 걸 배우세요. 책 속엔 없는 배움을요.


그 날의 내가 그 말을 어른들의 잔소리라 여기지 않고 100% 동의했음을 천운이라 생각한다. 더 넓은 세상 속의 나는 아무것도 아닌 여행자 1이었다. 다만 그 여행자 1은 일상을 벗어남으로써 더욱 내면에 골몰해질 수 있는 시간을 얻었다.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흘려들었을 인생 선배들의 조언을 꽉 붙잡았다. 사회에 나가기 전에 최대한 내 힘으로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겠다고 결심했다.

그 날 미켈란젤로 광장의 아름다운 노을과 환상적인 분위기, 그리고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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