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모교인 광주 전남고교에서 2021년 12월 ‘푸른숲’이라는 학교 신문 창간호를 내면서 동문인 나에게 고교 후배들에게 ‘미래를 위해 현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주제로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쓴 내용입니다. 괄호( )에 들어간 글들은 당시 원고분량의 한계로 못 썼던 이야기를 '브런치'를 위해 추가한 것입니다.
저는 1991년 영화감독으로 데뷔해 30여년간 영화를 만들어 왔고, 동시에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로 22년째 재직하고 있습니다. 교수로서 정년 퇴직을 앞 둔 요즘, 종종 학교 복도를 걷다가 멈칫하며 과거의 나를 반추해 보곤 합니다. ‘아니, 고교 시절 콤플렉스 덩어리에 자존감도 바닥이었던 시골 촌놈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라는 생각을 하며 신기해 하죠.
45년이 지난 고교 시절을 돌이켜 보자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우울한 때였지만, 동시에 내 삶의 방향을 정한 중요한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방황하다, 도중에 1년 휴학하는 바람에, 4년만에 전남고를 졸업(1977년 2월)하게 되었지요. 그런 나의 고교 시절과 그 이후 살아온 이야기가, 당시의 저와 비슷한 시기를 겪고 있을, 현재의 여러분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며 글을 써봅니다. ‘고교시절엔 공부만 열심히 해라, 그래야 좋은 대학 가고 돈많이 버는 직장에 취업할 수 있다’ 라는 식의 뻔한 충고는 지겹게 들었을테니 안할께요. 그저 제 경험을 토대로, 청소년기를 어떻게 보내야 미래가 행복할지에 대한 몇 가지 조언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내 콤플렉스도 내 것이니 받아들이되, 그것을 역이용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고교시절 자존감 높고,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면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히려 지독한 콤플렉스 덕분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선 더 노력해야 한다는 절박함에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당시만 해도, 내가 나중에 영화감독이 되고, 대학교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당시에 누군가에게 그런 꿈을 얘기했다면 다들 코웃음쳤겠죠. 한번은 대학가기 직전 형님께 영화감독의 꿈을 얘기했더니, '네 분수에 맞는 꿈을 꿔라!'라고 피식 웃더군요.) 전남 보성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시골 중학교를 졸업한 내가, 광주라는 큰 도시의 명문 전남고에 입학한 것만 해도 대단한 사건이었으니까요.(솔직히 그 당시 고교입시가 있던 시절, 난 전기 고교를 떨어지고, 후기로 전남고를 봤는데 처음엔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운좋게 보결-요즘으로 치면 예비 후보- 5명 안에 들어간 덕분에, 아슬하게 합격한 것입니다. 그렇게 극적으로 전남고에 입학한 후 첫 시험이 끝난 3월말에 겪은 사건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때 담임 선생님께서 우리반 학생들 중 다섯명을 교무실로 부르더군요. 왜 부르지? 했는데, 알고보니 반에서 성적이 제일 낮은 학생들이었는데, 내가 거기에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충격이었죠. 시골 중학교에선 공부를 대충해도 반에서 5등 안에는 들어갔는데, 공부 꽤나 한다는 학생들이 모인 전남고에선 꼴찌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목소리 콤플렉스로 인해 수업시간에 출석부를 땐 대답도 잘 못했습니다. 목소리가 허스키한데다 작아, 선생님들이 내 대답을 잘 못듣곤 하기에, 옆 친구들이 ‘대리 대답’을 해줬을 정도였죠. 또한 표현력이 부족해 공중전화도 잘 못걸었어요. 미리 손바닥에 써둔 메모를 보고 겨우 더듬거리며 말 할 정도였으니까요. 온갖 콤플렉스로 시달리며 방황하던 어느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은 어차피 나중에 죽어 한 줌의 흙이 될텐데, 살아있는 동안 죽도록 열심히 해서 크게 되어 보자’는 거였죠.
둘째, 교양서적도 읽고, 내가 좋아하는 취미 활동도 하라는 겁니다.(중고교 시절 내가 다른 학생들에 비해 공부를 그렇게 잘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책은 상대적으로 많이 읽은 편이었습니다. 물론 교과서가 아닌 소설이나 철학 서적이었지만) 그 시절 낮아진 내 자존감을 위로하고 치유해준 두 인물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당시 유명한 홍콩의 액션배우 이소룡(李小龍)이었고, 또 한 사람은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였어요. 그 당시 영화는 나의 우울감을 해소하는 청량제 역할을 했는데(그 시절 광주 시내에 있던 20여개 극장을 안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영화광이었죠, 나에겐 영화관이 치유 공간이었고, 학교나 마찬가지였어요.) 특히 당시 1970년대초에 나온 이소룡의 액션 영화는 나를 매혹시켰어요. (나는 중학 시절까지만 해도 학교 태권도 대표선수였고, 격투기를 무척 좋아했기에) 이소룡 영화로 인해 내가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물론 처음엔 액션 배우를 꿈꿨지만,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며 포기했죠)그리고 니체의 철학 책은 큰 자극을 주었어요. 다 이해는 못했지만, 그의 철학의 핵심 사상중 하나인 ‘초인 사상’에 매료되어, 나는 수시로 ‘별 볼일 없는 나도 평범한 자아를 극복해 초인이 될 수 있다’는 식의 자기 암시를 무수히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내가 콤플렉스가 없었다면, 영화관보다는 도서관을, 철학자 니체보다는 교과서에 더 충실했겠죠. 물론 그렇게 해도 얼마든지 행복한 미래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난 지금 영화로 철학하는 내가 너무 행복합니다.
세 번째, 좋은 친구가 때로는 내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으니, ‘친구를 잘 만나라’고 하고 싶네요. 고교시절 몇몇 친구가 그나마 위로가 되었죠. 내 고민을 잘 들어주던 ‘홍필’이라는 친구와 송창훈, 나승룡 등 다른 좋은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 중 내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친구는 ‘상옥’이라는 친구였어요. 광주 출신인 그 친구는(원래는 1년 후배였는데, 휴학후 복학해서 한 반이 된 친구였죠)문학이나 철학, 예술에 대해 조예가 깊은 특별한 친구였어요. 연극도 그 친구 덕분에 평생 처음으로 보러갔을 정도였으니까요. 나중에 나는 이 친구 만나려고 내가 휴학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답니다.
고등학생 치고는 상당히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상옥이는 시골 촌놈인 나를 그야말로 예술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고등학교 졸업 직후, 혼자 무전여행을 하다 사고로 일찍 세상을 등지고 말았답니다. 내가 감독의 꿈을 갖고 대학을 연극영화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게 바로 그 친구 때문이었기에 요즘엔 많이 그립습니다.
네 번째, 밝은 미래를 위해선 좋은 습관, 긍정적인 중독에 빠지라고 말하고 싶네요.
미래의 습관은 청소년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죠. 솔직히 내가 현재 행복감을 갖고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은 당시부터 갖게 된 습관 덕분이라고 봅니다. 나는 고교시절 이후 현재까지 술, 담배, 도박, 게임 등 중독성 있는 것들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도박은 중학교 때 이미 망한 경험도 있고(사실 당시 고등학교 전기를 떨어진 것은 중학시절 태권도 선수 생활과 시골 친구들과의 상습 도박으로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던 탓이었던 것 같아요.), 술은 애주가셨던 아버지가 보여준 부정적인 모습 때문에 싫어했고, 담배는 고교 시절 한번 시도했다가, 중독될까 두려워, 하루 만에 끊었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술 같은 경우 나쁜 건 아니지만, 그런 중독은 나를 노예화시키는데다, 시간과 돈의 낭비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지요. 대신 저는 그런 욕망을 다른 중독으로 대체했습니다. 바로 영화입니다. 고교시절 시작된 그 영화에 대한 중독을 나는 철저히 즐겼고, 그 덕분에 콤플렉스가 치유되었고, 지금의 미래를 안겨주었다고 봅니다. 자신의 미래를 갉아먹을 나쁜 중독은 피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채 자기가 즐길 수 있으면서, 먹고 살길까지 열어주는 전문 분야에 대한 중독을 권합니다.
(무엇보다 나는 청소년들에게 낙천적인 세계관을 가지길 권합니다. 나는 그 힘들었던 청소년 시절이나 첫 감독 데뷔작 실패후 인생의 바닥에 떨어졌던 30대 중반의 시절에도, 단 한번도 내가 불행하다거나 실의에 빠져 죽고싶다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럴때마다 오히려, '오, 그래? 그런다고 내가 포기할 줄 알아? 흠, 지금의 힘든 시절은 나중에 좋은 추억거리가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보냈던 것 같아요.)
다섯 번째, 자기 마음을 통제하고 절제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사춘기 시절은 본능적인 욕망이 분출되는 시기라 잠시 나쁜 중독에 끌리는 건 이해합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그때 무릎 꿇고 노예가 돼 버리면 평생 해방되기 어렵다는 건, 주변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죠. 지금의 제가 가진 많은 습관들은 고교시절의 혹독한 시련을 거쳐서 만들 것들입니다. 고교시절 초기엔 도서관에만 가면 졸립곤 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어떻게든 집중해보려고 애쓴 덕분에, 입학초 뒤에서 다섯번째였던 나는, 나중에 앞에서 5번째까지 가기도 했었죠.
고교시절은 온통 내 나약한 정신력과 싸우다 보냈어요. 그 시기를 이겨낸 덕분에, 대학가서 영화 감독이 되기 위한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고, 나중에 그 분야에서 나름의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감독이 된 후에 영화를 학문적으로도 열심히 공부하고 책도 집필하다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영화과 교수도 겸하게 되었네요. 내 인생의 3분의 1을 보낸 교수 생활은 멋진 제자들을 둔 덕분에 너무 행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성공은 노력이 다는 아닐 수도 있다는 냉정한 충고도 해주고 싶네요. ‘운칠기삼(運七技三)’이란 옛말이 있죠. 세상사가 자기 뜻대로 되기 보다는, 워낙 다양한 이해 관계가 먹이 사슬처럼 얽혀 있어 혼자의 힘과 노력도 중요하지만 주변 환경이 잘 맞아야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인데, 운이 7할이고, 노력이 3할이란 말이죠. (그런데 고등학생 나이가 되면, 이미 출생과 유전자 및 지금까지 자라온 환경과 노력으로 이미 5할의 운과 노력은 썼다고 봐야 하니, 나머지 5할에서 '운삼기이 運三技二'가 남았다고 볼 수 있겠죠? ) 하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인생은 ‘기칠운삼(技七運三)’이라고 얘기하고 싶네요. 노력이 7할, 운이 3할이라고요. 내가 단지 운(運)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고 하기엔 너무 억울한 측면이 있는 것 같아서요. 살다보니 삶에서 운이 큰 역할을 하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노력이 운을 이긴다고 생각합니다.
얘기하다 보니, 마치 제 자랑 하는 것 같아 민망하지만,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우울하고 힘든 환경이 있더라도, 오히려 기회라 생각하고, 철저히 싸워 이겨내길 바랍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내에서)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철저히 즐기면서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전문 분야에 중독되십시오. 그러면 미래가 행복해질 거라고 확신합니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인상적으로 읽은 한 스님의 글로 마무리 할께요. “내 마음을 고쳐먹지 않으면 현실은 죽어도 달라지지 않는다. 내 마음이 곧 현실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