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글: <시민케인>의 메인 캐릭터(주인공) 찰스 포스터 케인
영화에서 캐릭터는 스토리를 이끌어가고 주제를 표현하는 핵심 요소다. ‘걸작 고전영화나 유명국제영화제에서 각광받는 대부분의 영화는 캐릭터가 강하거나 새로운 캐릭터 중심의 내러티브인 경우가 많다. 이런 영화들은 관객들이 흥미를 느낄만한 인물들을 극적으로 잘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정서적인 반향을 크게 일으킨다.’
‘고전적인 시나리오에서는 대개 주인공, 즉 메인 캐릭터(main character)의 갈등과 변화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꾸며진다. 영화가 탄생하기 훨씬 이전의 민담이나 신화에서 한 인물의 행동은 최초의 질서가 교란되면서 촉발되고, 그 주인공에게 원상회복 임무가 부여되자,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떠나고, 도중에 수많은 장애를 만나지만 헤치고 나서 결국 임무를 완성해 보상받는다는 식의 내용들이 많다.’ 그런 점에서 결국 구성은 캐릭터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캐릭터(character)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을 말한다. 플롯(plot)이 스토리의 뼈대라면, 캐릭터는 그 뼈대에 살(contents)을 붙여나가 영혼(theme)을 불어넣고 영화를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때 캐릭터가 어떻게 작동하느냐에 따라 그 작품의 최종적인 질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앤드류 호튼은 [캐릭터 중심의 시나리오 쓰기]를 통해 ‘한때 할리우드의 많은 스토리는 캐릭터를 포기하는 대신 플롯 중심으로 구성되어 왔다.’고 언급했지만, 그것은 그만큼 할리우드 영화가 유럽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건과 액션이 중심을 이루는 플롯을 강조했기에 나온 오해다. 실제로 할리우드 영화가 플롯을 중요시 여긴 건 맞지만, <대부>, <더티 하리>, <인디아나 존스>시리즈 뿐 아니라, <배트맨>과 <슈퍼맨>, <스파이더맨>, 최근 <엑스맨> 등과 같은 슈퍼 히어로 영화들에서 볼 수 있듯이 캐릭터를 결코 소홀이 하진 않았다. 메인 캐릭터(main character)의 영웅적인 이미지를 강조해 관객을 끌어 모으는 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더 많았다. 특히 본고에서 주요 텍스트로 언급할 미국영화의 고전중의 고전 <시민 케인>(1941)의 ‘찰스 포스터 케인’의 캐릭터만 봐도 미국영화가 얼마나 캐릭터에 큰 관심을 가져왔나를 알 수 있다.
비록 플롯이 중심인 영화일지라도 캐릭터, 그것도 관객에게 가장 이입될 메인 캐릭터인 주인공에 대한 형상화는 매우 중요하다. 어차피 플롯과 캐릭터는 상호보완하며 영화라는 건축물을 완성해 나가기 때문이다. 히치콕의 영화처럼 강렬한 상황으로 인해‘서스펜스 안에서 등장인물들이 왜소해 질 수 밖에 없는’경우도 간혹 있지만, 많은 영화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통해서 스타를 배출하고, 강렬한 캐릭터로 인해 영화 그 자체가 관객들에게 오랫동안 각인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메인 캐릭터는 감독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보조 캐릭터 (minor character)들은 메인 캐릭터를 보좌하는 게 상례다. 타란티노 영화 <저수지의 개들>(1992)이나 <펄프픽션>(1994)처럼 드물게 다양한 캐릭터가 동등한 비중을 갖고 스토리를 구축해 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메인 캐릭터를 중심으로 여타 캐릭터들이 운용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메인 캐릭터가 어떤 원리로 구축되고 형상화되는가를 영화 역사상 최고의 캐릭터 중 하나인 <시민 케인>의‘찰스 포스터 케인(Charles Foster Kane)’(이후 ‘케인’)을 중심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오손 웰스(Orson Welles; 1915-1985)의 데뷔작 <시민 케인>(Citizen Kane, 1941)은 1962년 이후 영국 영화계간지 [사이트 앤 사운드](Sight & Sound)를 통해 매 10년마다 평론가들의 투표에 의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여러 번 뽑혔을 정도로 걸작이다. 그 영화는 시나리오와 촬영, 편집, 연기 등 모든 요소에서 대단한 업적을 남겼다고 찬사를 받았지만, 어떤 평론가는 그 중에서도 시나리오를 가장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실제로 <시민 케인>은 당시 영화의 주요 모델이었던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유일하게 각본상만은 받았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주인공 이름을 딴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작품의 핵심은‘케인’이라는 메인 캐릭터다. 그렇다면 케인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묘사되었기에 그렇게 걸작으로 오랫동안 평가받을 수 있었을까? 그 캐릭터는 어떻게 구축되었을까? 비록 그 캐릭터를 구축하고 드러내는 방식이 일반적인 할리우드 영화처럼 서사적인 구성이 아닌 회상방식에 의한 복합구성, 웰스에 의하면 일종의 프리즘(Prism)전략, 이긴 하지만, 그러한 인물을 창작하는 기본 원리는 동일하다고 본다. 그래서 ‘케인’의 캐릭터를 구축하는데 사용된 요소들과 창작 방법론을 탐구함으로써 일반적인 시나리오의 메인 캐릭터의 창작 원리를 추출하고자 한다.
2. 시나리오에서 캐릭터 구축의 기본 요건
영화에서 캐릭터를 창조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몇 가지 요소가 필수적이다. ‘리얼리티와 개성, 그리고 그 인물에 대한 매력과 공감, 그리고 캐릭터의 일관성과 최종적으로 스토리 전개를 통한 인물 가치관의 변화’가 그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인물의 개성과 매력일 것이다. 개성이 없이 너무 흔한 성격의 평면적인 인물은 스토리 진전을 약화시키고, 매력과 공감을 주지 못한다면 아무리 극적인 상황에서 행동하더라도 쉽게 정서적으로 빠져들지 못할 것이다. 관객은 결국 스토리 이전에 캐릭터를 통해 영화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특히 그 작품이 <시민 케인>처럼 캐릭터 중심일 경우 더욱 그러하다.
앤드류 호튼은 [캐릭터 중심의 시나리오 쓰기]에서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시나리오의 특성을 여섯 가지로 정리한 바 있다. 즉 1) ‘캐릭터를 인물의 정체적 상태가 아닌 생성의 역동적인 과정으로 이해한다는 것과 <델마와 루이스>(1991)의 주인공들처럼 2) 인물들이 끊임없이 모험을 시도한다는 것, 그리고 3) 서로 모순되는 정신적인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면서 <섹스, 거짓말, 비디오테이프>(1990)을 예로 든다. 나머지 세 가지는 종종 4) 할리우드 시나리오 쓰기의 법칙의 전부 또는 일부를 파괴한다는, 즉 고정된 법칙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카니발 정신과 캐릭터의 삶이 관객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크라잉 게임>(1992)의 주인공이나 <양들의 침묵>(1991)의 한니발 렉터 박사처럼 5) 남다른 특성이나 체험에 크게 영향 받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6) 그러한 특성과 체험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부분과 설명되지 않는 ,이해할 수도, 포용할 수도 없는 그런 캐릭터도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할 시민 케인의 경우, 적어도 여섯 가지 특성 대부분이 일정 부분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로버트 맥기(Robert McKee)의 경우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를 통해 영화 속에서 캐릭터를 창조하는 비결을 세 가지로 압축해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 배우가 개입할 여지를 남겨두라는 것이다. 이 말은 너무 많은 것을 시나리오에서 설명함으로서 나중에 캐릭터를 구현할 배우의 창의성을 제한하지 말라는 의미다. 두 번째, 자기 작품의 모든 인물들과 사랑에 빠져라. 그의 시각에선 작가가 인물에 애착이 가지 않으면 아예 그런 인물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감정에 이입해서 전형적인 인물을 만들어도 안 된다고 경고한다. 세 번째, 캐릭터는 작가의 자기 인식이라는 점이다. 인물의 깊숙한 성격을 이해하려면 관찰을 하고, 작가의 자기 인식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가 말하는 시나리오의 캐릭터 창조 요령은 기본적으로 최종적인 영화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시나리오가 아닌 영화에서 캐릭터를 이루는 요소는 사실상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시나리오 그 자체에 묘사된 캐릭터가 어떠냐이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 그것은 설계도 속의 기본 골격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배우의 연기다. 아무리 시나리오 상에서 인물이 잘 구축되었다 해도 배우가 적합한 이미지로 캐스팅 되지 않거나 연기로서 잘 구현해 내지 못한다면 캐릭터는 살 수 없을 것이다. 배우의 연기와 이미지는 건축에 사용되는 자재에 속한다. 얼마나 고급스럽고 적합한 제품을 쓰느냐에 따라 건물의 가치가 달라지듯이 배우의 역할은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감독의 연출이다. 감독이 어떻게 배우를 연출(blocking)하고, 카메라와 편집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배우의 약점을 감추고 장점을 부각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좋은 설계도와 자재를 쓰고도 현장감독이 지휘를 잘 못한다면 좋은 건축물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 면에서 <시민 케인>은 위와 같은 세 가지 요소, 즉 조셉 맨케비츠와 오손 웰스의 시나리오, 오손 웰스의 연기, 그리고 오손 웰스의 연출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뛰어난 캐릭터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고 본다. 결과적으로는 오손 웰스라는 천재의 거의 1인 3역에 의해 만들어진 캐릭터이지만, 도대체 어떻게 구축되었기에 영화사적으로 길이 남는 캐릭터가 되었을까? 이 글은 시나리오 단계에서의 캐릭터 구축 과정을 중심으로 하고자 하기에 연기와 연출 이전의 단계까지 만을 중심으로 연구 분석하고자 한다.
3. <시민 케인>의 주인공 ‘찰스 포스터 케인’의 배경
시나리오 창작의 시작은 특정한 모티프나 캐릭터, 또는 극적인 사건 등에서 비롯된다. 그중 가장 일반적인 창작의 동기 중 하나가 바로 캐릭터일 것이다. 대개 그 캐릭터는 비록 순수한 창작이라고 하더라도 실제 주변이나 과거의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해서 만들어 내는 경우가 많다.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 은 사실상 노골적으로 당대 실존한 인물을 모델로 캐릭터가 창조된 케이스다. 그 시나리오는 허먼 멘키위츠가 쓴 초고 <미국인>(American)을 오손 웰스가 <시민 케인>이라는 최종 각본으로 완성한 결과물이다. 평론가 폴링 카엘(Pauline Kael)은 1930년대 언론을 다룬 영화를 논할 때, <시민 케인>을 그 중 하나라고 하면서 할리우드 골수파 언론인이라는 명칭을 붙여줄만한 유일한 인물인 허먼 맨키위츠(Herman J. Mankiewicz, 1897-1953)의 역할을 부각시킨다. 영화 자막에는 각본에 맨키위츠와 오손 웰스가 나란히 올라가 있다. 맨키위츠는 완성된 영화를 보고 자신의 시나리오와 거리가 멀다고 비판하면서 웰스의 이름이 자막으로 같이 올라가는 걸 싫어했다고 한다. 시나리오 공헌도에 대한 논란이 일자, 나중에 미국의 영화학자 로버트 캐린저(Robert. L. Carringer) 각본의 7개의 초안들과 많은 메모들을 검토한 결과 “멘키위츠의 초안들은 전부 폐기시키거나 대체시켜야할 지루한 소재들이고, 특히 영화의 장점인 위트와 유연성이 없다.”며 멘키위츠를 사실상 소재만 제공한 거라며 혹평하고, 웰스의 천재성을 높이 샀다.
그 캐릭터에 영감을 준 것은 부분적으로는 당시 영화 제작자이자 감독 그리고 미디어 재벌이었던 하워드 휴스(1905-1976)이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1863-1951)이다. 허스트는, 영화 속 케인과 유사하게, 당시 8개 라디오 방송국과 1800만 명의 독자를 확보한 28개의 신문, 그리고 13개의 잡지를 보유한 당대 미국의 최대 언론 재벌이었다.
<시민 케인>을 촬영한 스튜디오였던 'RKO 281'을 제목으로 내세운 영화 <RKO 281>(1999, 벤자민 로스 감독)를 보면 그 ‘시민 케인’의 캐릭터 유래를 쉽게 알 수 있다. 말 그대로 <RKO 281>은 <시민 케인>이란 영화가 어떤 우여곡절을 거쳐 만들어 졌는가를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영화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시민 케인> 개봉을 둘러싸고, 당시 언론을 쥐고 흔들며 '언론의 제왕'으로 군림하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와 약관의 천재 오손 웰스가 치열한 다툼을 벌인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작가 맨키비츠를 다룬 데이비트 핀처의 최신작 <맹크>(2020, Mank)에도 영화 <시민 케인>의 배경이 나온다) <RKO 281>은 당시의 자료와 고증들을 통해 그러한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 영화에 의하면 시민 케인의 실제 모델이 된 것은 ‘이그재미너(Examiner)’의 소유주 허스트다. 그는 케인처럼 언론사를 문어발식으로 확장하여 언론 조작을 행할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이를 통해 얻은 부로 성(城)과 같은 대저택(샌시미언 성)을 지어 온갖 수집품들로 채워놓았으며,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온 데이비스라는 젊은 여배우와 동거했다. 웰스는 허스트 뿐 아니라 그의 애인 마리온을 모델로 해서 ‘수잔 알렉산더’라는 캐릭터를 만들기도 했다. 물론 케인과 수잔 알렉산더의 관계 설정은 당시 부인이자 여배우인 호프 햄프턴을 여류 성악가로 만들고자 했던 코닥 회사의 사장 쥘즈 브불래투어에서 착안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수잔 알렉산더의 캐릭터 많은 부분은 허스트가 1917년 알게 된 후 애인관계가 된 34살 연하인 금발의 여류스타 마리온 데이비스(1897-1961)에서 나왔다. 허스트는 그녀를 위해 코즈모폴리탄 픽쳐스라는 영화사를 설립해 자기 소유의 언론을 활용하면서 그녀를 스타로 만들려고 애썼다. 영화 속에서 매우 중요한 극적인 모티프인 ‘로즈버드’조차 실제로 허스트가 애인 마리온(일설에는 그녀의 중요한 부분)에 대한 애칭으로 사용하던 말이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캐릭터를 창조하는 것은 우리가 생명을 부여하고자 하는 존재의 개인적인 목소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성은 특정장소, 사회, 시대 등의 중심에서 창출된다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허스트는 감독인 오손 웰스에게 매우 적절한 캐릭터의 모델이었던 셈이다. 앞에 언급한 몇 가지 핵심 유사점 외에도 실제로 영화 속 케인과 모델 허스트는 겹치는 부분이 많다. 케인이 10대 초반에 부모를 떠난 시기(허스트는 19세에 떠난다)나 폐광에서 우연히 금광이 발견되어 부호가 되어 신문사를 인수하게 된 상황(허스트는 금광을 유산으로 받아 그 이익금을 신문에 투자했다), 그리고 대학을 퇴학당한 것(허스트는 하버드 대학에서 퇴학당했다), 나중에 주지사에 출마했다가 떨어진 것 등이 비슷하다. 평소에 허스트와 알고 지냈던 맨키위츠에 의하면, 허스트는 스스로를 종종 ‘미국인’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래서 웰스는 그와 유사한 ‘케인’이라는 인물의 재창조해 통해 당대에 자본주의 시스템이 확장되다 위기에 빠지던 시대를 살아가는‘미국인’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자 했는지 모른다.
4 시나리오에서 메인 캐릭터의 구축원리
시나리오에서 메인 캐릭터(주인공)는 스토리를 이끌어 가는 중심축이다. 그를 중심으로 보조 캐릭터들이 배치되고, 스토리도 그의 성격을 중심으로 이끌어 간다. 사실상 스토리와 캐릭터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이때의 연결 고리는 바로 그 캐릭터가 하고자 하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관객은 그 메인 캐릭터에 동일화된 후 그의 뒤를 따라가기에, 이미 언급했듯이, 그 인물이 매력이나 개성이 없다면 스토리에 대한 흥미는 잃어갈 것이다. 그리고 일관성이 없거나 끝까지 인물이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면 당혹스러워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인물을 생생하게 살아날 수 있게 하고, 공감과 매력, 그리고 개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물론 <시민 케인>처럼 이미 특별한 개성과 매력을 지닌 실제 모델로 캐릭터를 만들었을 경우 유리한 점이 많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주변에 수없이 매력적인 인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물을 모델로 막상 영화로 만들었을 때, 너무도 쉽게 평면적이고 전형적인 캐릭터로 전락하고 마는 경우를 많이 봐왔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매력적인 모델이 있더라도 그 인물을 시나리오를 통해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를 구축하고자 한다면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최소한의 창작 원리에 의거해야 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프랑시스 바누아(파리 10대학 교수)는 할리우드 영화 등장인물의 구성 규칙을 ‘스토리와의 조화, 인물간의 명확한 구분, 캐릭터의 일관성, 대립관계 활용’등 네 가지로 분류한다. 하지만 그 규칙은 다소 포괄적인 관점에서 분류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영화에 적용될 수 있는 정확한 공식 같은 원리는 있을 수 없다. 영화는 너무도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나리오 작법에서 전반적으로 통용되는 캐릭터 구축 원리들은 주요 작품들의 인물 분석을 통해서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프랑시스 바누아의 구성 규칙 뿐 아니라 이미 전 항목에서 언급한 바 있는 앤드류 호튼과 로버트 맥기, 그리고 이정국의 캐릭터 창작 요소를 종합적이고 세부적으로 정리해서 분류해보자면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욕망, 대립되는 인물, 딜레마 및 장애물, 과거, 에피소드, 아이러니, 모티프, 대사 및 경구, 유머, 습관과 외모, 일관성과 변화 등이 그것이다. 각 항목 별로 과연 합당한 원리에 해당되는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시민 케인>의 메인 캐릭터 ‘찰스 포스터 케인’과 그 외에 주요 영화들을 실례로 들어 분석. 검증해보고자 한다.
1)욕망- 목표가 강할수록 캐릭터도 강해진다.
‘영화 속 메인 캐릭터는 반드시 자신이 참여하게 될 스토리 속에서 분명한 목표와 동기를 가져야 한다.’ 목표와 동기는 인물이 갖는 일종의‘욕망’이다. 그것은 캐릭터가 이루고자 하는 꿈이거나 그가 행동하면서 사건을 주도하는 핵심 원인일 수도 있다. 그 욕망의 대상은 집중력을 주기 위해 되도록 하나로 통일할 필요가 있다. 많으면 산만해지기 때문이다. 인물의 욕망이 크거나 강할수록 캐릭터는 보다 극적이 될 수 있다. [멕베드]나 [오델로]같은 셰익스피어 비극이나 <시민 케인>이나 <대부>(1972)처럼 강한 권력을 가진 주인공들은 그 욕망이 크고 강하기에 그 파멸이 보다 극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살인의 추억>에서 범인을 잡고자 하는 박형사나 <말아톤>(2005)에서 마라톤 완주를 하고자 하는 자폐아 초원이처럼 평범한 인물일지라도 그 목표에 대한 집착(욕망)이 강렬하면 스토리의 흡인력 역시 강해진다. ‘인물의 욕망은 작가가 그것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순간 살아나온다.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 박사와 같은 복잡한 캐릭터의 경우 때로는 그의 내면에 잠긴 무의식적인 욕망까지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시민 케인>에서 케인의 욕망은 무엇인가? 그에게 주어진 욕망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고, 철저히 주변 상황이 모두 자기중심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일테면 모두로부터 사랑을 받고자 하는 강한 집착이다. 외면적으로는 처음엔 자기 소유의 신문사 인콰이어러지를 최고의 신문사를 만들고자 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결과 결국 경쟁지를 압도한다. 그 후로 그의 욕망은 더욱 커져 간다. 그는 대통령이 되고자 하고, 그 전단계로 주지사에 출마하지만 스캔들로 인해 좌절한다. 그는 자신의 욕망이 좌절되면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며 이어간다. 그는 정치적으로 실패하자, 둘째 부인인 수잔 알렉산더라는 무명 오페라 가수를 최고의 가수로 만들고자하는 목표를 새로 만든 뒤 자신의 신문과 부를 이용해 최선을 다한다. 그조차 실패하자 그는 몰락하기 시작한다. 모두로부터 사랑받고자 했으나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외톨이가 되고 만다. 그의 최종적인 몰락은 그의 욕망이 워낙 컸기에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인다. 만약 메인 캐릭터인 케인의 욕망이 그저 주어진 삶을 소박하게 사는 것이었다면, 그리고 주어진 환경에 자족하는 성자 같은 인물이라면 이 영화의 장대한 비극은 성립할 수 없다.
주인공의 욕망이 최종적으로 해결되거나 좌절되면 영화는 끝난다. <쇼생크 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 1994)에서 주인공의 욕망은 누명을 벗고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다. 비록 그가 누명은 벗지 못하지만, 탈옥을 통해 자유를 되찾고 자신을 괴롭힌 교도소장에게 통쾌한 복수를 하며 영화는 끝난다. <말아톤>은 초원이 자신의 욕망인 마라톤 완주를 성공하면서 스토리가 끝난다.
‘성격묘사의 핵심은 캐릭터의 내면세계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관객은 목표추구를 위한 그들의 행동을 바라보면서 캐릭터와 내면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캐릭터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은밀한 욕망까지 완전히 이해하고 있어야만 그들을 움직이는 행동의 원인을 묘사할 수 있고, 그들을 있을법한 인물로 만들 수 있으며 그들의 행동을 자연스럽고 일관되게 그릴 수 있는 것이다.’
대개 욕망 뒤에는 동기가 놓여있다. 케인의 경우, 영화를 끌고 가는 중요한 모티프인 ‘로즈버드’가 그의 욕망 뒤에 숨은 동기를 대변한다. 그의 심리 저변에는 로즈버드라는 썰매를 가지고 놀던 어린 시절의 행복을 그리워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것 대신 끝없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으로 그러한 과거를 애써 지우려 한 것이다. 그의 욕망의 근원은 잃어버린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일 수 있다. 하지만 로버트 맥기의 주장처럼 사실 인간의 행동은 결정적인 설명이 불가능할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작가가 인물의 행동 동기를 지나치게 특정한 원인에 고정시키려 하면 할수록 관객의 머릿속에서 그 인물은 더 축소되거나 한정적일 수 있다. 그러기에 맥기는 동기에 대해 확고한 이해에 이를 때까지 충분히 생각하되 동시에 그 원인의 주변에 약간의 미스터리를 남기는 게 좋다고 얘기한다. <시민 케인>의 경우도 그런 예에 속한다. 케인의 욕망의 동기를 ’로즈버드‘라는 썰매 하나로 한정시키는 것도 무리가 따른다. 그것은 원인 중 하나일 뿐일 것이다. 케인의 캐릭터는 우리 인간의 때론 이해할 수 없는 성격처럼 일종의 미스테리가 있기에 매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캐릭터들은 우리가 그들의 특성을 나타내고 그들 고유의 자질, 한계, 특권을 부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직업적인 야심들과, 개인 상호 간의 욕망(사랑, 우정 등)뿐만 아니라 내적인 욕구와 목표를 갖는다. 그러나 캐릭터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과 그의 진정한 심층 구조적 현실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너무 확실한 것들은 우리를 상투적인 것에 빠지게 하는 위험이 있다. 그렇다고 너무 불분명한 것들은 정반대로 지루함이나 혼돈을 야기 시킬 수 있으니 확실한 주의가 필요하다.”
2)장애물- 딜레마에서 내린 선택이 캐릭터를 심화시킨다.
시나리오에서 본격적인 스토리는 주인공이 장애물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일정한 욕망을 추구하는 주인공에게 반드시 장애물이 있어야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딜레마에 빠진다. 딜레마(dilemma)란 몇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이르는 말로 진퇴양난, 궁지에 빠진 상황을 의미한다. 시나리오에선 주로 한 인물이 선택 앞에서 심각하게 갈등하는 상황을 말한다. 로버트 맥기는 '진정한 성격은 딜레마에서 내리는 선택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 부담스런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선택하느냐가 곧 그의 사람됨이다. 부담이 클수록 그 선택은 인물을 더 깊고 참되게 보여준다.'라고 말한다.
가령 <다크 나이트>(2008)에서 배트맨인 부르스 웨인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은 조커다. 그는 조커로 인해 여러 번 딜레마에 빠진다. 시민을 구하느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느냐,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 레이첼과 정의로운 검사 하비 덴트 중 누구를 구할 것인지 등, 그러한 딜레마로 인해 그의 캐릭터는 자신이 영웅인가 악당인가 혼란을 느끼며 점점 더 존재론적인 위기에 사로잡힌다. 마지막에 그는 투 페이스 하비 덴트가 저지른 살인의 책임을 스스로 뒤집어쓰고 경찰에 쫒기는 편을 선택함으로써, 비로소 배트맨은 현대판 슈퍼히어로 ‘어둠의 기사(Dark knight)’된다.
<시민 케인>에서 케인의 가장 큰 장애물은 외형상 정적 게티스다. 그에 의해 수잔 알렉산더와의 불륜이 들키면서 탄탄대로가 막힌다. 케인은 게티스의 주지사를 사퇴하라는 충고를 무시하고 정면승부를 선택했다가 정치적 생명 뿐 아니라 아내까지 잃고 친구와도 소원해진다. 그는 딜레마에 빠질 때마다 정면 승부를 택하거나 자기중심적인 판단을 따른다. 그런 그의 선택은 그의 이기적이고 비타협적인 캐릭터를 강화시키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고립시켜 캐릭터를 분명하게 만들어 간다. 케인에게는 오손 웰스가 그만큼 좋아했던 수많은 셰익스피어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파멸을 초래하는 심연의 유혹, 즉 근원에 대한 유혹이 있다. 이런 딜레마는 그것을 배치하고 선택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의 철학을 드러낼 수 있기에 주제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선택의 결과는 주인공의 철학이자 주제와 바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케인에게 있어 장애물은 사실상 여러 번 반복된다. 첫 장애물은 어린 시절 가족과의 이별이다. 그로인해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못 받고 자라 애정결핍증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두 번째는 정적 게티스의 불륜 폭로다. 그로 인해 그의 정치적인 꿈이 좌절된다. 세 번째는 친구 리런드와 수잔 오페라에 대한 악평으로 인한 의절, 네 번째는 수잔의 떠남이다. 결국 그런 장애물을 극복하거나 화해하지 못한 케인은 혼자 남게 되면서 외롭게 여생을 마무리한다. 일반적으로 장애물은 한 두 개로 지속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할리우드 액션 스릴러 영화들처럼 수많은 장애물을 배치해 이야기의 재미를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경우도 많다. 이야기속의 주인공은 반드시 극적 행동을 주도해야 한다는 점도 중요하다. 딜레마에서 내린 선택 역시 메인 캐릭터인 그가 해야 할 일이다.
3)대립되는 인물과 조력자- 적대자가 강할수록 메인 캐릭터도 강화된다.
<택시 드라이버>(1976)나 <파리 텍사스>처럼 개인의 내면 심리를 중심으로 끌고 가는 영화가 아닌 할리우드적인 내러티브 스타일의 영화는 주인공의 캐릭터를 강화시키기 위해서 그와 대립되는 인물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살인의 추억>에서 박형사(송강호)의 시골형사 캐릭터는 서울에서 온 도시적인 캐릭터인 서형사(김상경)와 대립구도 속에서 상호 강화된다. [LA 컨피덴셜](L.A. Confidential, 1997)에서 과격한 형사 버드(러셀 크로우)와 원칙주의자 에디(가이 피어스)의 대립구도 역시 유사하게 활용된다. 물론 그들 공동의 적대자 또한 존재한다.
특히 그 주인공의 행위가 영웅적이 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적대자(Antagonist)를 필요로 한다. 대립되는 적대자가 강하면 강할수록 주인공의 행위는 그만큼 영웅적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크다. <쇼생크 탈출>을 본 관객이 주인공에 공감하고 그의 탈옥에 동조하는 이유는 교도소장의 잔혹한 캐릭터 때문이다. 주인공은 진범을 알고 있는 죄수를 만나게 되어 자신의 살인누명을 벗기고자 소장에게 말하지만, 소장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범을 알고 있는 죄수를 탈옥 누명을 씌워 죽이고, 주인공을 옭아맨다. 그러자 그는 오랜 준비 끝에 탈옥하면서 그의 비리를 낱낱이 폭로한다. 그런 주인공의 행위가 영웅적으로 보이는 것은 강력한 적대자인 워든 노튼 교도소장 덕분이다. <다이 하드>(1988, 감독: 존 맥티아난)에서 주인공 존 맥크레인(John McClane: 브루스 윌리스)은 테러리스트 악당 한스 그루버라는 잔인한 적대자가 있기에 영웅적인 행동이 강화된다. 때론 그 적대자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괴물>(2006)의 한강 속 괴생물체나 <에일리언>에서 외계생명체, <엑소시트스>의 악령이 그런 예에 속한다.
특히 범죄 스릴러 영화에선 적대자 캐릭터가 강할수록 주인공뿐 아니라 스토리가 강력해진다. 적대자에 대한 성격화는 주인공의 성취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때로는 오히려 적대자가 주인공보다 더 복잡하고 심오하게 묘사됨으로써 돋보이는 경우도 있는데,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 박사나 <세븐>의 살인마 존 도우, <다크 나이트>의 조커가 그런 예에 속한다. 그런 경우 영화의 주인공은 사실상 적대자에게 캐릭터의 주도권을 뺏기기도 하지만, 작품의 주제나 스토리를 강화시키는 데는 오히려 긍정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시민 케인>의 경우 범죄 스릴러나 흔한 할리우드 장르가 아니기에 그 적대자가 그렇게 강력하진 않지만, 케인과 대립하는 인물은 한명이 아닌 여럿이다. 그의 후견인인 대처(Walter Parks Thatcher)와 정적 짐 게티스(Jim W. Gettys), 그리고 동료인 리런드(Jedediah Leland)가 그들이다. 무표정하고 인간미 없는 사람으로 그려지는 대처는 케인의 신문사 운영방식과 기사 논조를 두고 사사건건 대립한다. 그는 돈을 최고 가치로 믿는 은행가이다. 감독은 그를 통해 자본주의 시스템을 비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주지사를 놓고 대립하던 정적 짐 케티스는 케인에게 몰락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 된다. 케인의 주장에 의하면 그는 부패한 기성 정치인을 대변한다. 리런드는 그의 친한 동료로서 조력자인 동시에 나중에 적대자가 되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흔히 그려지는 배신자는 아니라, 주인공의 잘못된 점을 고치기 위해 직언하다가 적대자가 된 케이스다. 그는 사실상 케인의 도덕적인 양심을 상징한다.
<다크 나이트>와 같은 몇몇 특별한 영화를 제외하고, 적대자는 대개 메인 캐릭터에 대응하는 마이너 캐릭터(Minor character)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마이너 캐릭터는 그 나름의 존재이유를 갖고, 메인 캐릭터를 보조하며 확장하고 탐색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그래서 그들은 중심 내러티브를 풍요롭게 하고 복합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마이너 캐릭터들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매신저, 중재자, 방해자가 그것이다. 그들은 관객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거나 중심캐릭터를 돕거나 메인 캐릭터를 어렵게 만든다.
<시민 케인>에서 집사 베른스타인(Bernstein)이 매신저라면, 친구 리런드와 두 번째 부인 수잔 알렉산더는 중재자, 대처(써쳐)와 게티스는 방해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케인의 가장 큰 조력자인 베른스타인은 케인 신문사의 총지배인이다. 그는 수시로 직언을 하며 따지는 리런드와 달리 사심 없이 헌신적으로 케인의 의견을 따르고 협조한다.
조력자, 또는 적대자로 통칭되는 마이너 캐릭터를 만들 때 주의할 점이 세 가지가 있다. 마이너 캐릭터를 너무 잘 그려서 주인공을 잠식하지 않도록 할 것과 너무 많은 마이너 캐릭터를 만들지 않도록 하는 것, 그리고 한 명의 캐릭터가 할 수 있는 일을 두 명의 캐릭터에게 시키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시민 케인>의 경우, 케인 역을 잠식할 정도의 막강한 마이너 캐릭터는 없다. 구성 특성상 주인공의 캐릭터를 다양한 관점에서 보여주고자 하기에 여러 사람이 등장하지만, 그렇게 많은 숫자도 아니다. 그리고 그 작품에서 모든 마이너 캐릭터들은 각자 다른 개성을 갖고 등장하기에 겹치는 부분도 없다. 그런 점에서 <시민 케인>의 마이너 캐릭터들을 적절하게 잘 그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로버트 맥기는 주인공 캐릭터를 구체화하기 위해 마이너 캐릭터인 조력자들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절한 비유로 설명을 하고 있다.
“이런 주인공이 있다고 가정하자. 재미있고, 낙천적이면서도 때론 침울하고 냉소적인 남자다. 동정이 많은가 하면 잔인하고, 두려움이 없는가 하면 겁이 많다. 이 4차원적인 인물을 만들려면 그의 모순을 묘사해줄 다른 배역들이 주위에 필요하다. 장소별, 시간별로 각기 다르게 그와 상호작용할 인물들이 있어야 한다. 이런 조역들이 주인공을 온전하게 만들어 줘야 주인공의 복잡성이 일관되고 신뢰할만하다. 가령 인물1이 주인공의 슬픔과 냉소를 자극하는 반면 인물2는 그의 재치 있고 희망적인 면을 불러낸다. 인물3은 그의 다정하고 용감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반면 인물4는 처음에는 그를 두려움에 떨게 하다가 나중에는 분통을 터뜨리게 만든다.”
4) 에피소드- 캐릭터를 돋보이게 하는 강력한 장면의 배치
한 인물의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해선 말보다는 그의 성격을 극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적절하고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L.A. 컨피덴셜>은 성격이 거칠고 급한 버드(러셀 크로우)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효과적인 에피소드로 시작된다. 그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한 주택가 집안에서 출소한 지 얼마 안 된 남자를 감시하다가 그가 집에서 자신의 아내를 폭행하는 것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달려가 그를 무자비하게 때려눕힌다. 그 에피소드는 버드가 급하고 거칠다는 것과 여자를 폭행하는 남자들만 보면 특히 더 흥분한다는 성격을 보여주기 위한 장면이다. 그것을 통해 이미 관객들은 버드 성격이 어떻다는 것을 쉽게 체험하고 들어간다. <다크 나이트>의 도입부에서 은행을 터는 장면은 조커의 악랄한 캐릭터를 보여주는 강력한 에피소드이다. 그 장면으로 인해 그 이후 조커가 등장할 때마다 긴장감을 갖게 된다.
<시민 케인>에서 케인의 캐릭터는 많은 에피소드를 통해 구체화된다. 수잔과의 불륜 관계를 게티스에게 들켰으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시인 않고 게티스와 아내에게 오히려 큰소리치는 장면, 수잔의 오페라 공연에 대해 악평을 쓰려다 괴로워하며 술을 마시고 잠이 든 친구 리런드를 보고 자기가 대신해서 친구 의도대로 악평을 마무리해서 쓰는 장면, 수잔에게 노래를 가르치던 선생이 노래를 절대 잘할 수 없다고 소리치자 뒤에서 나타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를 계속 교습시키라고 강요하는 장면 등이 그런 예에 속한다.
5)과거- 인물의 현재는 과거의 경험과 사건이 축적된 결과다
사람은 누구나 그 현재는 바로 과거로부터 축적되어 쌓여온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현재의 캐릭터는 어린 시절부터 겪어온 그의 경험과 사건, 그리고 부모로부터의 유전 등과 같은 과거와 상관관계가 있다. 그러기에 하나의 캐릭터를 심화시키고자 한다면 그의 과거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도 영화 <세 얼간이>(Three idiots, 2009)의 주인공 란쵸는 명문 공대생이지만 누구보다도 자유분방하고 자신의 전공을 즐길 줄 안다. 그래서 몇몇 친구들에게 큰 영향을 주며 대학생활을 한다. 자칫 단순해질 법한 그런 그의 캐릭터는 그가 과거에 가난한 운전기사의 아들이었고, 부잣집 아들 이름으로 대신 대학에 들어갔고, 현재 그의 이름도 본인 것이 아닌 그 부잣집 아들의 것이라는 과거가 밝혀지면서 심화된다. 롭 라이너의 <미저리>(Misery,1990)에서 애니 윌크스는 우연히 사고로 부상당한 유명작가 폴을 구해주게 되고, 그를 외딴 곳에 위치한 자기 집으로 데려와 간병한다. 그녀는 자기가 애독하는 폴의 소설 시리즈 원고를 보더니 결말이 맘에 안 든다며 강제로 수정하게 만든다. 졸지에 그녀의 인질 신세가 된 폴은 그녀가 외출한 사이 그녀의 방을 뒤지다 신문기사 스크랩을 발견하고 놀란다. 그녀가 과거 간호사로 근무한 병원에서 많은 아이들이 원인 모르게 죽어나간 사실들을 알았기 때문이다. 폴은 애니의 과거의 행적을 감지하게 되면서, 보다 공포의 대상으로 느끼게 된다. 단순히 광적인 독자로 생각되던 애니는 과거 전력의 노출로 인해 사이코 살인마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제공해 공포감을 심화시킨다.
한 시대를 풍미한 언론재벌 케인의 야심과 사랑을 다루고 있는 <시민 케인>은 그야말로 그의 과거가 성인시절의 캐릭터를 형성하는 결정적인 단서다. 중요한 극적 모티프인 ‘로즈버드’가 어린 시절에 그가 가지고 놀던 썰매 이름이었다는 설정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영화 전반을 통해 케인은 엄청난 부와 권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과거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할 때의 행복감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과거의 추억이 현재의 캐릭터의 트라우마가 된 경우다. 만약 그가 어린 시절 가난하지 않고, 실존 모델인 허스트처럼, 애초부터 부자로 자라 계속 부모의 사랑을 꾸준히 받아왔다면 현재와 같이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갈구하다 파멸하는 ‘시민 케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캐릭터로서의 매력도 훨씬 떨어졌을 것이다.
한 인물에 대한 과거 활용은 자칫 잘못 사용하면 지나치게 설명적이어서 상상력을 제한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으나, 작품에 따라 현재의 인물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하거나 또 다른 차원으로 한 단계 상승시키는 효과를 주는 경우가 많다.
6)대사 및 경구 활용
캐릭터는 구체적인 상황 외에도 그 인물이 내뱉는 대사를 통해서도 잘 형상화할 수 있다. 물론 그 대사는 너무 장황해선 곤란하고, 그 성격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절제된 대사여야 한다. <대부>에서 중요한 대사의 모티프인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 것이다’(I'm going to make him an offer he can't refuse)라는 대사는 비토와 마이클의 마피아 보스로서의 캐릭터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다.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의 캐릭터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핵심 대사는 그가 범죄 집단과 나누기로 한 돈더미를 불로 태워버릴 때 나온다.“...돈이 중요한 게 아냐. 메시지가 필요하지. 모든 건 불에 탄다는”(...It's not about money. It's about sending a message: Everything burns) 그런 조커의 행동과 대사는 그가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나름 철학이 있는 캐릭터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런 식으로 캐릭터를 설명하는 대사는 <시민 케인>에서도 많다. 케인이 처음 인콰이어러지를 인수하자마자, 스캔들 기사를 크게 내도록 지시하면서 말하는 ‘헤드라인이 크면 그만큼 뉴스가 커진다.’는 대사는 그의 언론관을 보여준다. 그리고 수잔과의 스캔들로 인해 아내 에밀리와 대립할 때 말한‘앞으로 내가 뭘 할지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한 사람뿐이오’라는 대사나 수잔 알렉산더가 자신이 출연한 오페라가 악평을 받자 자살을 시도했다가다 살아난 후 더 이상 노래를 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좋아. 더 이상 부르지 않아도 돼. 그들만 손해를 본 거야’라는 식의 대사는 그의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보여준다.
일반적인 대사 이외에도 주인공이 반복해서 사용하는 멋진 경구나 속담도 캐릭터 강화에 도움이 된다. <올드 보이>(2003)에 나오는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라는 19세기 미국 시인 엘라 휠러 윌콕스의 [고독]이라는 시의 첫 구절은 오대수의 캐릭터의 일면을 설명하는 장치로 반복되어 사용된다. 인도 영화 <세 얼간이>(2009)에서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All is well)'같은 경구 같은 대사도 주인공 란쵸의 낙천적인 캐릭터를 설명하는 중요한 말로 반복되어 사용된다.
7)모티프 활용- 캐릭터와 주제를 강화시키는 역할
시나리오에서 모티프(motif)는 어떤 특정한 소도구나 단어, 심리적 요인, 음악 등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캐릭터나 주제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영화‘본 시리즈’의 주요 모티프는 ‘기억 상실증’으로 제이슨 본(맷 데이먼)이라는 주인공의 캐릭터를 규정하고 심화시키는 주요장치로 활용된다. <타이타닉>(1997)에서는 두 남녀 주인공의 캐릭터를 심화시키는 소도구 모티프로 ‘다이아몬드 목걸이’와‘로즈의 누드 초상화’가 사용된다.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상류층 로즈(케이트 윈슬렛)을 상징하고, 로즈의 누드 초상화는 가난한 화가 잭(디카프리오)을 대변하면서 두 사람의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암시한다.
<시민 케인> 초반에 주인공 케인은 죽기 직전‘로즈버드’라는 말과 함께 손에 들고 있던 유리 공을 떨어뜨린다. 그가 유언으로 남긴 단어와 소도구는 영화에서 케인이라는 캐릭터를 설명하는 중요한 모티프로 사용된다. 히치콕식의 매커핀인 듯 사용되다가 점차 정말 그와 달리 주제를 드러내는 핵심 모티프가 된‘로즈버드’라는 단어는 특히 중요하다. 그 속에 케인의 캐릭터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영화는 한 기자가 찰스 포스터 케인이라는 인물의 삶을 통해 그가 진정 누구인가를 추적해가는 중요 단서로 ‘로즈버드’의 의미를 캐는 식으로 전개해 간다. 그 의미를 추적해 가던 기자는 ‘로즈버드는 못 가졌거나 잃어버린 것일 수도 있어요. 어느 쪽으로든 설명 할 수 없겠죠. 어떤 말로도 사람의 인생을 설명할 순 없어요. 그건 아마 오래전에 잃어버린 아끼는 물건이었을 겁니다.’라고 추측한다.
영화는 에필로그에서 그것은 케인이 어린 시절, 부자가 되기 전, 시골집에서 가지고 놀던 썰매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그 단어를 통해 감독은 부와 권력의 허무함을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엄청난 돈과 권력을 소유했지만 그러한 것은 가난한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평범한 썰매보다 그에게 행복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처럼 보인다. 로즈버드는 케인이 평생 되찾고 싶어 했던 유년기의 안정감과 소망, 순수함을 상징한다. ‘유리 공’은‘로즈버드’와 연계되어 케인을 설명하는 중요한 장치로 사용되었다. 그 공속에 든 눈 덮인 시골집 모형은 케인의 고향집을 상징하고, 그가 항상 그곳을 그리워했음을 알 수 있는 일종의 ‘소우주’같은 것이다.
캐릭터를 위한 모티프로 히치 콕는 주로 강박증이나 심리적인 트라우마를 사용한다. '고소공포증'을 가진 형사를 주인공으로 한 <현기증, Vertigo>(1958), '도벽'을 가진 여주인공을 내세운 <마니, Marnie>(1964), 어머니에 대한 집착으로 다중 캐릭터를 지닌 정신병자가 주인공인 <사이코, Psycho>(1960)가 그런 예에 속한다. <시민 케인>의 케인의 캐릭터는 히치콕의 주인공들만큼 외관상 심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나름대로 심리적인 강박증 모티프가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다. 케인이 주변 사람들 모두가 항상 자기를 사랑해 주길 바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애정결핍증과 세계 곳곳에서 값 비싼 조각품을 광적으로 모으는 수집벽이 바로 그것이다.
8)아이러니-인물의 내면에 깃든 심리적인 양면성과 이중성을 표현
아이러니(Irony)는 원래 의미는 겉으로 드러난 것과 실제 사이의 괴리를 말한다. 좀 더 세부적으로 구분하자면 극적, 음악, 소도구, 인물, 대사 등 여러 종류의 아이러니가 있지만, 그 중 인물의 아이러니는 캐릭터를 강화시키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인물의 아이러니는 극중 인물이 그 자신의 내면에 강한 심리적인 양면성을 소유하고 있거나, 겉과 속이 다르게 대조되는 행동을 할 때 발생한다. 평상시에는 수줍은 청년 같지만 어느 순간에 질투에 가득 찬 여인으로 변신해 살인도 마다않는 <사이코>의 주인공 노만 베이츠나 외모는 항상 광대처럼 미소를 띠고 있지만 실제는 무서운 악당인 <다크 나이트>의 조커가 그런 아이러니를 이용한 극단적인 캐릭터에 속한다. 하층민인 어릿광대가 졸지에 왕의 대역이 되었다가 오히려 실제 왕보다는 더 선정을 베푼다는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나 평범한 직업소개소를 운영하던 남자가 우연히 대통령 대역을 하게 되면서 오히려 실제 대통령보다 더 좋은 정치를 하게 된다는 <데이브>(1993)같은 영화는 그야말로 캐릭터의 아이러니를 중심 컨셉트(concept)으로 출발해서 성공한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시민 케인>의 케인은 선과 악, 진보와 보수, 그리고 감성적이면서도 냉정한 면이 공존한 양면적인 캐릭터다. 또한 정직한 사람처럼 행동하다가도 쉽게 거짓말 한다. 처음엔 후견인 대처에게 언론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하겠다고 큰 소리 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리고 케인은 초기에 인콰이어러지를 인수해서 발행할 때 정직하고 올바른 기사를 싣고 서민의 이익을 위한 신문을 발행하겠다고 약속하며 원칙 선언문까지 발표한다. 하지만 나중에 그는 신문을 많이 팔기 위해 거짓된 정보와 자극적인 기사를 쓰고,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도구로 활용한다. 그래서 케인은 훌륭한 시민으로 행세하다가 파시즘 신봉자로 비판받고, 민주투사로 앞장서다가 공산주의자로 몰리기도 한다. 그리고 1889년엔 간섭주의자였던 그는 1919에는 불간섭주의자가 되는 식으로 상황에 따라 정반대의 입장을 오간다. 물질적으로 엄청난 부자이지만, 정신적으로는 가난해서 사랑을 갈구하는 인물이라는 것도 일종의 아이러니로 작용한다. 케인의 캐릭터는 환경이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는지를 보여주는 도구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엄청난 부를 물려받지 않았다면 자신의 권력에 의해 도덕적으로 타락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9)유머(Humor)-캐릭터에 유머감각을 부여하라
앤드류 호튼은 캐릭터 중심의 시나리오 쓸 때 필요한 중요 요소 중 하나가 ‘가장 심각한 상황에서도 유머와 코미디가 갖는 많은 미덕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장르나 영화의 성격에 따라 코미디가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유머는 캐릭터에 활력을 주는 요소로 자주 활용된다. 존 포드의 서부영화나 구로사와 아끼라의 사무라이 영화를 보면 코미디 장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나 마이너 캐릭터들에게 항상 유머 감각을 부여하곤 한다. 일곱 명의 사무라이들이 농부들을 도와 산적을 물리친다는 이야기인 구로사와 아끼라의 <7인의 사무라이>를 보면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기쿠시요(미후네 도시로)가 그런 역할을 한다. 그는 농부 출신의 사무라이로 반쪽 사무라이 취급을 받지만, 가장 인간적인 캐릭터로 수시로 웃음을 선사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 웃음은 상황보다는 그의 캐릭터에서 주로 나온다. 구로사와의 사무라이 영화는 <요진보>, <쯔바키 산주로>에 이르러서는 유머가 넘쳐흘러 코믹 사무라이 영화라고 불리기까지 할 정도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나 <괴물>도 마찬가지다. 그의 영화는 전형적인 범죄 스릴러나 괴수영화와 달리 유머로 가득 찬 캐릭터들(주로 송강호)로 인해 코미디 못지않은 활기와 극적인 재미를 선사한다. <괴물>에서는 괴물이 시민들을 뒤쫓는 심각한 상황에서 조차, 괴물을 미끄러져 넘어지게 함으로써 웃음을 유발한다.
<시민 케인>에서 그러한 유머는 주로 케인 자신의 캐릭터에 의해 발생한다. 케인은 수잔 알렉산더를 처음 만난 날 치통으로 아픈 그녀를 위해 마술도 보여주고 자신의 귀를 움직이는 특별한 재주로 그녀를 웃긴다. 나중에 주지사 선거에 패배하고 그녀와 재혼하면서 기자들이 그에게 ‘이제 정치 안할 거냐?’ 고 묻자, ‘정치 안하냐고? 이젠 반대로 할 거야. 우린 오페라 스타가 될 걸세’하고 유쾌하게 받아친다. 기자가 메트로폴리탄에서 공연할 거냐고 묻자 수잔은 ‘찰리가 오페라 하우스를 지어준다고 했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케인은 ‘그럴 필요까진 없을 거야’하고 큰소리치지만, 다음 장면은 이미 오페라 하우스를 지었다는 신문기사가 대문짝만하게 나온다. 케인은 또한 기자가 자신을 인터뷰할 때 느리게 하자, 케인은‘내가 기자일 적엔 자네보다 빨리 질문했다네.’하고 소리치며 농담하기도 한다.
또한 케인은 크로니클 신문사의 편집진들을 자신의 신문사로 영입해 그들과 기념촬영을 하면서 ‘지난 6년 전 저 위대한 임원들의 사진을 보아왔습니다. 마치 사탕가게 앞에 선 꼬마의 심정이었죠. 하지만 6년이 지난 오늘 밤, 난 드디어 사탕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인콰이어러에 오신 걸 환영 합니다’라고 농담을 한 뒤 환영파티를 시작한다. 그때 베른스타인이 유럽에서 엄청난 그림과 조각품을 사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어야 한다고 말하자, 케인은 ‘ 그들은 2000년 동안 만들었고, 난 겨우 5년 만에 구입했잖소.’라고 말해 사람들을 웃긴다. 약속을 지키라고 다그치자, 알았다고 하면서 이내 ‘베른스타인, 설마 내가 그 약속을 지키리라 믿지 않겠죠?’라고 답해서 다시 폭소를 터뜨리게 한다. 이 파티에서 케인은 무희들과 춤도 하는데, 영화 전반에 걸쳐 가장 유쾌하고 유머가 만발한 장면으로 꼽힌다. 오죽하면 로버트 캐린저가 작가 멘키위츠의 초고와 오손 웰스 각본의 가장 큰 차이가 ‘유머와 위트’의 있고 없음이라고 했겠는가. 그에 의하면 맨키위츠의 초고는 지루하고 답답했다고 한다.
10)습관과 외모의 특징
시나리오 보다는 실제 영화를 찍을 때 더 중요하게 고려되는 사항이지만, 인물의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서 그 인물의 습관과 외모의 특징을 살리는 것도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캐릭터를 묘사할 때 사용되는 몇 가지 외면적인 특성들은 어휘, 말하는 태도, 옷차림새, 독특한 습관, 육체적 조건, 버릇 등을 들 수 있다.
오우삼의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의 캐릭터는 바바리코트와 선글라스 차림과 습관적으로 입에 문 성냥개비로 이미지화되어 당대에 많은 젊은이들이 따라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물론 그 설정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요진보>에서 미후네 도시로 캐릭터에서 따온 것이지만, 그런 습관과 외양은 앞에서 열거한 다양한 요소들과 별도로 캐릭터에 큰 힘을 보태는 역할을 한다. 송능한의 <넘버 3>(1997)에서 어설픈 건달 조필(송강호)은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부하들 앞에서 장광설을 늘어놓다가도 흥분하기만 하면 더듬거리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기존의 전형적인 조폭 캐릭터와는 다른 조필의 그런 독특한 습관 덕에 캐릭터가 매력적이 될 수 있었다. <시민 케인>에서 케인은 그 습관이나 외모가 아주 특별하게 설정되어있지는 않다. 대신 오손 웰스가 직접 연기하는 그 케인은 그야말로 언론 재벌로서의 카리스마가 매우 잘 살아 있다고 볼 수 있다. 항상 당당한 제스처와 유머가 돋보이는 명쾌한 언변이 그의 특징을 대변하기도 한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대머리가 되고 살이 찌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고집스럽고 오만한 노인네의 이미지를 강화시킨다. 오손 웰스는 찰스 포스터 케인의 20대 젊은 시절부터 노역까지 자연스러운 분장과 연기로 극적으로 잘 표현해냈다.
11) 변화-일관성을 유지하되 메인 캐릭터의 처음과 끝은 달라야 한다.
영화에서 캐릭터는 나름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매사에 수줍어하던 인물이 갑자기 어느 순간에 당당하고 용기 있는 행동을 한다면 일관성을 잃은 것이다. 음식에서 양파를 지극히 싫어하던 주인공은 끝까지 그렇게 가야한다. 단지 그런 취향의 변화가 중요해서 양파가 든 음식도 먹게 된다면 그 이유를 설명해줘야 한다. 그러나 마이너 캐릭터들은 몰라도 적어도 스토리를 끌고 가는 주인공은 대부분 일련의 사건을 통해 변화된 모습이 필요하다. 주인공의 변화를 통해 주제를 드러내는 영화가 많다. 성장영화의 경우가 그렇다. 그런 영화의 경우 주인공은 시작과 끝에서 동일하지 않다. 인물이 변하는 과정에서 물론 타인의 영향을 받을 순 있지만 최종적으로 본인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듯한 인상을 줘야 한다. 그래야 그의 캐릭터가 살아난다. 시나리오가 등장인물을 떠맡아서는 안 되고 등장인물은 자신의 정해진 성격에 따른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
<대부>에서 마이클(알 파치노)은 마피아 패밀리에 관여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초반에 가족 일에 무관심한 순수하고 바른 군인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큰형이 암살당하고 아버지가 피격을 받아 죽을 위기를 갖자, 어쩔 수 없이 마피아 일에 개입하게 되며 변한다. 결국에 그는 아버지 보다 더 잔혹한 마피아 보스가 되면서 영화가 끝난다. 그 영화는 철저히 마이클의 성장과정을 보여준다. <추격자>(2007)에서 전직 형사 출신으로 출장 안마 보도방을 운영하는 중호(김윤석)는 그야말로 나쁜 남자다. 하지만 연쇄살인을 일삼는 더 나쁜 남자 영민(하정우)으로부터 여자를 구하려는 과정에서 점차 인간성을 회복해 간다. 영화에서 살인마 영민은 변하지 않지만 주인공 중호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가 끝난다. 그런 영화들의 서브 장르는 바로 성장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캐릭터의 근본까지 변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하나의 사건을 겪으면서 세상이나 타인을 대하는 태도나 관점이 어느 정도 변하는 것을 보여줘야 관객 입장에서 그 변화된 주인공을 통해 주제에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시민 케인>에서 케인은 한 남자의 일생을 보여주는 영화다. 어린 시절 썰매를 가지고 놀던 순진한 시골 소년이 운 좋게 부자 청년이 되어 엄청난 부와 권력을 누리다가 두 번의 결혼을 모두 실패하고 노년을 쓸쓸하게 혼자 살다가 죽는다. 젊은 시절 처음 신문사 운영을 시작할 때는 가난한 서민을 위해 정직한 언론을 만들고자 하지만, 점차 그는 발행부수를 위해 점점 타락해 간다. 죽기 직전에 그는 부와 권력에 대한 집착보다는 가난한 어린 시절의 순수함(로즈버드로 대변되는)을 그리워하는 인물로 변한다. <시민 케인>의 원래 제목이 <미국인>(American)인데서 알 수 있듯이, 케인의 캐릭터는 스케일의 차이는 있지만 보편적인 미국인(American)을 상징한다.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미국인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찰스 포스터 케인’이라는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게 감독의 의도인 셈이다.
5, 마무리하며
지금까지 영화에서 메인 캐릭터인 주인공을 효과적으로 구축하기(construct) 위해서 어떤 요소들이 필요한지 분석하고 정리해 보았다. 그 결과 욕망, 대립되는 인물과 조력자, 장애물, 과거, 에피소드, 아이러니, 모티프, 대사 및 경구, 유머, 습관과 외모, 변화 등 모두 11 가지 요소가 있음을 밝혀내었다. 그리고 그러한 각각의 요소가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과 국내외 주요 영화들을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여기서 캐릭터 구축 요소는 역으로 보면 구축 원리다. 즉 여기서 추출한 11 가지 요소는 절대적일 순 없지만 시나리오를 쓸 때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캐릭터의 구축 원리라는 걸 알 수 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원리는 역시 메인 캐릭터가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성취 하려는가 하는 욕망에서 나온다. 캐릭터의 나머지 부차적인 측면들은 모두 이 핵심적 요소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며, 어느 정도까지는, 배우가 그 역할을 어떻게 해석해내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도 하다.
시나리오 작가 루이스 허먼(Lewis Herman)은 미국영화가 행동을 부각하는 반면 유럽영화는 오히려 인물에 대한 분석에 매진하는데, 이상적인 것은 두 가지 측면을 대등하게 다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캐릭터와 사건이 불가분 관계가 있다는 의미지만, 확실히 영화의 스타일에 따라 무엇이 더 중요하게 부각되어야 하는지는 분명히 존재한다. 할리우드 장르영화들은 욕망이나 인물 대립구도, 딜레마와 장애물, 모티프 등 본문에서 언급한 캐릭터를 구축하기위해 필요한 11 가지 원리가 대부분 효과적으로 사용되지만, 로베르 브레송이나 홍상수, 오즈 야스히로, 에릭 로메르 등과 같은 작가주의 감독들의 영화에선 그러한 요소는 부분적인 선택사항일 수 있다. 그들 영화에서는 강력하게 대립되는 인물이나 캐릭터의 극적인 변화, 또는 과거가 오히려 스타일을 해치는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주요 텍스트로 언급한 오손 웰스의 걸작 <시민 케인>은 그야말로 ‘찰스 포스터 케인’이라는 캐릭터가 핵심인 영화다. 한 인물의 복잡한 일생을 짧은 시간에 보여줘야 하기에 연대기적으로 보여주기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 작품은 다양한 주변 인물들의 시각을 통해 회상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구성방식이었지만 캐릭터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요약하는 데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래서 평론가 로라 멀비는 그 점에 대해‘오손 웰스는 <시민 케인>에서 관객들이 자기 앞에 있는 이미지와 암시된 메시지를 스스로 해독하도록 권유하는 영화 스타일과 서사 스타일을 개발했다’고 평가한다. 그것은 캐릭터를 최종적으로 완성하기 위해선 지금까지 추출한 캐릭터 구축 원리에, 한정적이긴 하지만 내용에 따라서, 구성(plot)도 선택적으로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시민 케인>과 유사한 구성방식으로 시한부 암에 걸린 한 시청 공무원을 다룬 구로사와 아끼라의 영화 <이키루>(1952)를 들 수 있는데, 그 작품 역시 <시민 케인>의 구성 방식을 부분적으로 도입함으로서 주인공의 캐릭터를 보다 심도 있게 묘사하고 있다.
본 논고는 영화에서 메인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한 다양한 요소를 언급하고 있지만, 주로 시나리오 창작 단계에서 참조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시나리오 창작 과정에서 미진했던 요소들은 촬영과 연출 과정에서 배우와 감독에 의해 계속 보완하고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최종적인 캐릭터는 결국 시나리오에서 묘사된 캐릭터를 누가 연기하고, 감독이 그 연기를 어떻게 연출하고, 또한 최종적으로 어떻게 편집할 것인가에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의 주인공 비토 콜레오네를 말론 브란도가 아닌 캐스팅 초기에 후보였던 로렌스 올리비에나 어네스트 보그나인이었다면, <시민 케인>의 주인공이 오손 웰스가 아닌 당대에 유명한 스타배우 중 한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물론 다른 느낌의 영화로 만들어 질 수는 있겠지만, 지금까지의 명성처럼 그 캐릭터가 유지되진 못했을 것이다.
<시민 케인>이 영화사적으로 최고의 평가를 받게 된 것은 결과적으로 그러한 모든 부분에서 최상으로 작업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이나 할리우드 어디서간에 상업영화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나리오와 메인 캐릭터(주연) 캐스팅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어떤 경우엔 시나리오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낮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톱스타를 캐스팅하기만 해도 투자를 받아 제작에 돌입할 수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대부분의 관록 있는 뛰어난 연기자들은 물론 제작 여건이나 감독의 지명도를 보기도 하지만 시나리오를 가장 우선으로 본다. 그것도 주인공의 캐릭터가 과연 그 자신에게 공감이 되고, 매력이 있느냐가 특히 중요한 선택 요건이 된다. 그런 상황에서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구축하고자 하는 방법론을 분석하고 그 원리 추출해 실제로 응용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모두 영화가 마찬가지이기에 본 논문이 현장에서 작업하는 영화작가들에게 부족하나마 실용적인 가이드가 될 수 있길 기대한다. (본 글은 2013년 학술등재지인 '한국영화학회지'에 실린 논문입니다)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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