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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슬기 Oct 13. 2019

카페의 시간

그 어느 때 보다 커피 소비가 활발한 때가 없었다고 느껴지는 요즘이다. 

번화가에 어김없이 보이는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부터 번화가를 피해 상상하지도 못 할 정도로 후미진 곳에 

존재하는 카페까지 우리의 일상에서 커피를 내리는 장소, 카페는 아주 가까이 있다. 

카페에서 커피, 즉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시작했던 것은 7년 전 정도. 

그때만 해도 남자가 카페를 간다는 일은 이례적인 일로 생각되었다.(어디까지나 제 주변의 공기가 그랬습니다.) 그런 어색함을 뚫고 아무런 의미가 느껴지지 않던 쓴 맛의 커피를 마시기 위해 왜 그리도 카페를 다녔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회사, 집과 같이 기분전환과는 거리가 있는 공간과 분리되는 카페라는

공간에 있으면 짧은 시간이라도 '쉬었다'라는 체감이 확실히 됐었던 것 같다. 

그리고 카페마다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는 인테리어를 즐기는 것도 포함. 

그다음으로는 카페의 꽃 바리스타가 커피를 대하는 자세, 나는 유독 그것이 카페를 찾는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일과 진지하게 마주하는 자세, 이것은 화려하고 개성 있는 인테리어 조차도 

바리스타에게서 눈을 떼어 놓을 수는 없었다. 

매 번 새롭게 내리는 커피 한 잔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그것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 나가는 삶을 보고 있자면 

동경하는 마음이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누군가 그랬다. 자영업은, 창업은 장난이 아니라고. 

주변에만 보아도 쉽사리 장래에 카페 창업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었고, 

또 내가 알지 못하는 이들은 그 순간에도 창업을 했고, 문을 닫기도 했다. 

개업을 하는 카페의 숫자와 폐업을 하는 카페의 숫자가 서로 경쟁하듯 수치가 치솟았다. 

반복되는 회사 업무에 내 삶에 대한 대한 탄식이 이어지던 시절, 애정 하는 카페의 바리스타는 

그 존재만으로도 꽉 막힌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존재였다. 

그림. 홍슬기

개업과 폐업의 소용돌이 속에서 커피 주전자를

손에서 놓게 되는 바리스타들이 속출했다. 

마음이 아팠다. 

나의 즐거움이 사라지는데서 오는 감정이 아니었다. 

나로선  동경해 마지않을 삶을 살고 있는 바리스타들의 삶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짓궂은 장난에서 그치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장난도, 농담도 전혀 아니었다. 

커피 주전자를 들었던 많은 바리스타들이 

가슴에 상처를 매만지며 각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이른바 '신상 카페' 들의 개업은 

멈추지 않았다. 물론 폐업도 멈추지 않았다. 

며칠 전 지하철 막차도 끊겨있는 시간이었다. 

아파트 단지가 밀집해 있는 지역, 새롭게 조성된 

폐철길 공원의 한편에 상자를 연상시키는

네모난 커피 트럭이 밝은 빛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어둑한 냇가에서 반딧불이를 향해 발걸음이 옮겨지듯 커피 트럭으로 다가갔다. 

한눈에 보기에도 협소한 공간에 커피를 내리기 위한 요소가 꽉 들어찼다. 

보여야 할 바리스타는 자리에 없었다. 

1분 정도 지났을까 멀리서 다급한 걸음으로 나에게 인사를 하며 주문을 받았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연한 갈색의 원두 봉투의 상단을 가위로 잘라내 1인분의 원두를 덜어냈다. 

원두가 그라인더에 갈렸고, 머신을 통해 에스프레소가 내려져 금세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내 손에 들어왔다. 

가격은 2천 원이었다. 

한 모금 마신 아메리카노에서는 아무런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슬픔만이 가슴을 죄여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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