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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슬기 Nov 16. 2020

고양이 손님 2

그날따라 유통기한이 충분히 남아있는 우유와 우유가 없어서 묵혀두고 있던 시리얼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아침식사로 해결할 생각을 하니 밀린 숙제를 해결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우유가 없지만 우유를 사놓지 않았던 게으름 때문에 묵히게 된 시리얼에 대한 미안함 마음이랄까. 

컴퓨터 책상에 앉아 시리얼을 한 입 떠먹는 순간 마당에서 우당탕 소리와 고양이들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감귤이네 가족을 생각하고 몸을 움직였다.

 

오로지 마당으로 뛰어나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몸을 움직이다 보니 나 스스로 지렛대가 되어 오랜만에 우유와 만난 시리얼은 방바닥을 널리 덮게 되었다. 당장은 우유와 시리얼의 안타까운 사연을 읊을 때가 아니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니 감귤이네 가족을 위해 놓아둔 밥그릇과 물그릇은 내방 안의 우유와 시리얼의 사정과 닮아있었고, 이어서 눈이 닿은 곳에는 마당 한가운데에 살기를 뿜고 있는 두 마리의 고양이였다. 

한 마리는 새끼들의 어미 감귤이었고, 다른 한 마리는 덩치가 아주 커다란 검은 고양이였다. 

이 검은 고양이는 어미인 감귤이의 두배쯤 되는 체구를 갖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매일 같이 내놓는 감귤이네  밥그릇의 존재를 알고 왔는데 마침 맞닥뜨리게 된 모양이다. 

감귤이는 새끼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체구보다 두배나 큰 검은 고양이를 상대로 바싹 털을 세우고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반면 검은 고양이는 나를 의식하고는 멀찌감치 떨어져 감귤이는 무시한 채 나의 움직임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 그 검은 고양이가 묵직한 고양이 석상 정도로 느껴졌다. 

그만큼 체구나 눈빛에서 보통 녀석이 아님을 직감했다.(개인적인 체험이지만 아주 가끔 눈빛과 움직임 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아우라는 보여주는 고양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녀석을 그림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나는 감귤이를 뒤로하고 그림자를 향해 다가가 말해도 

통하지 않을 입 소리와 손짓으로 쫓아냈다. 

그제야 그림자는 "오늘은 이 정도로 하지"의 뉘앙스를 풍기며 사라졌다. 

그림자가 사라지고 내 손목을 보니 약간의 소름이 돋아났다가 이내 사그라들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감귤이와 새끼들도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본체가 사라지니 그림자도 사라진 것처럼. 

남은 것은 엎어진 밥그릇과 물그릇, 그것들의 주변을 장식하고 있는 듯한 갈색 사료 알갱이뿐. 

널브러진 사료를 쓸어 담아 버리고 새로운 사료와 물을 채워놓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마당으로 뛰어나오면서 엎지른 시리얼과 우유는 원래 이랬다는 듯 책상과 의자 그리고 바닥에 고루 널려있었다. 상큼한 시리얼과 섞인 우유의 맛은 이래서 우유를 계속 사들였었지 하는 생각이 들게끔 만들었지만 

먹을거리가 전혀 되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는 우유란 일단 냄새부터 견디기 힘들다. 


나는 걸레를 들고 와서 해파리처럼 흐물흐물한 시리얼과 우유의 파편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청소라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이런 식이라면 영내 키지 않는다. 뭔가 내가 한 게 아닌데 억지로 치우는 기분이랄까. 나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지독히도 꼬여있는 그런 것이다. 


청소를 하면서 감귤이네 가족이 다시 돌아와서 무사히 밥을 먹는 모습을 떠올렸다. 이어서 그림자를 생각했다. 굉장히 큰 고양이다. 인터넷 이미지나 유튜브에서 보았던 정말 거대한 고양이들을 제외하고는 실물로 본 고양이중에는 가장 큰 고양이다. 게다가 검은색 고양이. 큰 고양이는 검은색이어야만 한다라는 룰이라도 있는 걸까. 밤이나 고구마처럼 잘 익은 샴고양이라면, 백설기 같은 하얀 털을 가진 고양이(게다가 짧은 털)라면 안 되는 걸까. 만약 아까 감귤이와 싸우던 고양이가 샴고양이에 마찬가지로 덩치가 컸다면 나는 그 녀석을 무엇이라고 

부르기로 했을까. 장작? 군고구마? 밤만쥬?

별 실익 없는 생각을 하다가 커다란 기억의 조각 하나가 방바닥을 적시고 있던 흰 우유 위로 떨어졌다. 

"그래! 아까 그 그림자, 만난 적이 있어"


-다음 편에서 계속-

그림. 홍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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