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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두나 Jun 10. 2020

직장에서 워킹맘 롤모델 찾기

자기 주도적 삶을 살고 있는 워킹맘 선배들을 존경합니다.

"과장님이 제 롤모델이에요."


H대리와 함께 지방 출장을 간 날이었다. 하루의 일정을 모두 마무리하고 숙소에서 둘이 술 한 잔 하던 중 H대리가 이야기했다.


"과장님을 보면 제 5년 정도 후의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요."


나보다 4살 어린 H대리는 내가 참 아끼는 후배다. 경력이나 나이에 비해서 업무 지식도 많고 생각하는 것도 깊다.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칭찬도 잘하고 일을 할 때도 의사소통을 잘해서 소위 말해 회사 내에 적을 만들지 않는 타입이었다. 항상 날이 뾰족하게 서 있던 당시의 나에게는 오히려 내가 더 닮고 싶은 면이 있는 그런 후배였다.


그런 후배에게 내가 롤모델이자 앞으로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선배라는 말을 들으니 어깨가 으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궁금했다.


내가 그녀의 롤모델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제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했는데 과장님을 보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결혼을 앞두고 있던 H대리는 결혼 후의 삶이 잘 그려지지 않았는데 나를 보면서 앞으로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꾸준히 커리어를 이어가고 싶은 상황에서 결혼 후 육아와 일을 병행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친한 친구들 중 결혼한 친구들은 모두 전업주부의 길을 택했고 회사생활에서는 유사한 경력을 가진 워킹맘을 찾아보기 힘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회사에 워킹맘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직종의 특성 때문인지 여성 직원의 비율이 절반 정도의 비율을 차지하는 회사였지만 대부분은 현장에서 근무하는 서비스 직종에 치중되어 있었고 경영지원, 특히 HR분야에서 워킹맘은 찾아보기 힘든 구조였다. 생각해보면 내가 다녔던 많은 회사들이 그랬다. 재직했던 회사들은 대부분 여성 직원의 비율이 결코 낮지 않았다. 하지만 직급이나 재직기간이 올라갈수록, 그리고 경영지원직군으로 갈수록 여성의 비율은 낮아졌다.


H대리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이 당장 어떤 경험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 어려운 고위직 임원이나 해외파에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사람을 본인의 커리어에 대입해 보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보다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고 경력이나 나이 차이가 크지 않으며 살아왔던 환경이 비슷한(어쩌면 이것이 핵심일지도?) 내가 롤모델로 적합해 보였을 것이다. 


H대리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나에게는 직장생활의 목표가 하나 생겼다. 바로 함께 일하는 여성 후배들이 롤모델로 삼을 수 있는 선배가 되는 것이다. 엄청난 스펙이나 일에 모든 것을 걸고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은 아닐지라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일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차근차근 성장해 나가는 그런 롤모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우선 좋은 롤모델이 되기 위해서는 나 역시도 롤모델로 삼을 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나와 멀리 떨어져서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유명인을 꼽는 것보다는 함께 일하는 조직 내에서 만날 수 있고 필요한 경우에는 편하게 미팅도 할 수 있는 그런 선배이자 롤모델이 있기를 바랐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 조금 더 관심 있게 조직 내 사람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워킹맘의 롤모델은 어떤 사람일까


지금 재직 중인 회사뿐 아니라 이전에 다녔던 회사에서 만난 선배들을 떠올리면서 그들의 어떤 부분을 내가 본받을 수 있는지, 본받아야 할지를 생각했다. 흔히 롤모델이라고 하면 책이나 기사 등을 통해서 접할만한 유명인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롤모델상은 유명인보다는 가까이서 직접 의사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좋은 부분만 쏙쏙 뽑아서 적어놓은 글로 접하는 사람보다는 가까이서 일하는 모습을 관찰하거나 함께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 좀 더 깊이 있는 내용을 파악하고 싶었다.


열심히 살펴보니 몇몇 선배들 중 닮고 싶은 모습을 가진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유사한 부분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우선은 버텨야 한다


나는 만 13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으니 선배들은 최소 15년 이상 직장생활을 한 사람이다. 워킹맘이 15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일을 그만두고 싶게 만드는 많은 고비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남편이 경제활동을 잘하고 있으면 일을 그만둘 수 있는 여건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회사에 남아있는 것을 선택했기에 후배들에게 본받고 싶은 모습을 보여줄 기회가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워킹맘이 버티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단순히 그 자리에 앉아있거나 타성에 젖어 출퇴근하는 것이 아니라 워킹맘에게 끊임없이 가해지는 정신적 스트레스, 신체적인 고단함, 물리적인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한다. 이처럼 계속해서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고 해법을 찾아내며 조직생활을 유지하는 워킹맘들을 보면 겉으로는 온화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그 이면에는 소위 말하는 '악바리'기질을 갖고 있는 듯하다. 


장기근속자가 많은 한 회사에서 팀장들을 대상으로 DISC 유형 검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DISC 유형 검사는 사람들의 성격 행동유형을 D(주도형), I(사교형), S(안정형), C(신중형)으로 구분하는 검사다. 검사 결과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했는데 남성 팀장들은 S(안정형)이 가장 많았고 여성 팀장들은 D(주도형) 유형이 가장 많았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조직생활을 길게 하고 관리자의 자리까지 가는 여성들은 자신의 삶이나 일하는 방식에 대해서 주도적으로 부딪히고 해결하는 성향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를 악물고 내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스스로라는 믿음으로 끝까지 버티는 것이 바로 워킹맘 롤모델의 1순위 조건이 아닐까 싶다. 버티는 자가 이기는 것이고, 어쨌든 살아남아야만 더 나은 성과를 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테슬라의 CEO 앨론 머스크가 언급한 성공의 법칙 중 제1번도 "Never Give up"이다.


주변 자원을 최대한 활용한다


안타까운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사회생활을 왕성하게 해 온 워킹맘 선배들은 대부분 가족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거나 받고 있다. MBA에서 만난 한 선배는 50대의 나이로 외국계 리서치 회사에서 본부장을 하고 있는데 이미 장성한 두 자녀를 키우면서도 단 1년도 회사생활을 쉰 적이 없었다. 일을 할 당시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그녀에게 육아에 대해서 물어보면 '사실 친정어머니께서 키워주시다 보니 육아가 힘들다는 생각은 많이 하지 않았던 것 같다'라는 대답을 한다.


굳이 그녀의 사례만이 아니더라도 지속적으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원동력에는 부모님이나 남편의 전폭적인 지원이 기반이 되는 경우가 많다. 풀타임 직장을 계속해서 다니기 위해서는 가족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워킹맘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어려운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멀티팩터-노력으로 성공했다는 거짓말>이라는 도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현실에서는 다양한 요소들이 성공에 영향을 주며 운이 결과를 만든다. 노력도, 실력도, 혹은 재능도, 자본과 인적 네트워크, 외모 등도 모두 경쟁에 필요한 자원이다. 노력 만능주의가 나쁜 것은 다른 요소를 배제한 환상에 빠지게 하여 결과적으로 성공에서 더욱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경쟁은 총력전이다. 가진 자원을 모두 활용해야만 성과를 내고 성공에 가까워질 수 있다. 

이 말은 성공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노력만이 아니라 재능이나 운 등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므로 주변의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여 경쟁우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뜻이다. 


워킹맘으로 버티는 것이 워킹맘의 롤모델이 되기 위한 방법이긴 하지만 버티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버틸 수 있는 환경(그것이 재력이거나 든든한 부모 및 남편이거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때는 부모님의 도움을 받는 것에 많은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든든한 도움과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지금의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 가지 바라는 점이 있다면 소위 말해 '운'이나 '환경'의 영향으로 많은 워킹맘들이 버틸 수 있는지 여부가 대부분 결정되는 현실이 좀 더 개선됐으면 하는 점이다. 최소한 국가에서 실시하는 많은 모성보호제도를 모든 기업에서 눈치 보지 않고 당연히 사용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운'보다는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직장생활을 꾸준히 할 수 있는 사례가 더욱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성장을 추구한다


얼마 전 회사에 새로 여성 임원 한 분이 입사했다. 40대 후반의 그녀는 고등학생 자녀가 있는 워킹맘으로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의 상당 부분을 직접 실천해서 누리고(?) 있는 분이었다. 20년 이상 근무하면서 해당 업계에서는 꽤 실력 있는 사람으로 자리 잡았고 스스로 리더십 역량을 향상하기 위해 비즈니스 코치 과정을 이수했으며 대학원에서 조직심리 공부를 했다. 잠깐 동안 현업을 떠나 전문 코치로 활동하다가 전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지금의 CEO의 요청으로 새로운 직장에 입사하여 신규 비즈니스 론칭을 담당하고 있다. 


나 역시 앞으로 조직심리나 코칭 분야를 공부하고 싶어 하는 상황이라서 이 임원의 경력에 상당히 관심이 생겼다. 사내 카페에서 한 시간 정도 개인적인 미팅을 가졌는데 에너지 넘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제 겨우 30대 후반의 나도 지금의 생활에 잠시 지쳐 자기개발을 멈추고 있는 상황인데 여전히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배우는 것에 목말라하는 그녀를 보니 이런 모습이야말로 내가 찾던 워킹맘의 롤모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뿐 아니라 내가 본받고 싶은 몇몇 선배들을 보면 모두 자기 분야의 전문성을 쌓거나 새로운 분야로 도전하기 위한 성장을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다양한 책을 찾아서 읽고 교육이나 세미나 등을 스스로 찾아다니며 필요한 경우 대학원을 진학하는 등의 공부를 한다. 


계속해서 자신을 성장시키는 사람은 굳이 워킹맘이 아니더라도 매력적이다. 육아를 하다 알게 된 지인이 있는데, 전업맘으로 5살 아이를 키우면서 심리상담을 받다가 심리학에 관심을 갖게 돼 사이버대학에 진학하여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다. 살아가면서 생기는 지적 호기심을 그냥 무시하지 않고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게 된 지인의 생기 넘치는 모습을 보면 끊임없이 배우려는 사람의 매력이 듬뿍 느껴진다.


성장 중에서도 가장 멋진 것은 그것이 어떤 단기적인 목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성장이나 배움 자체를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지위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하는 공부는 그 목표를 달성하면 끝나게 된다. 하지만 계속해서 배움을 즐기는 사람은 눈 앞의 목표가 아니라 자신의 커리어를 장기적으로 보고 당장 아웃풋이 나지 않더라도 공부를 멈추지 않는다. 


버티는 것, 지속적으로 배우고 성장하려 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삶이나 커리어를 단편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계속 유지해야 할 인생의 한 부분으로 보는 태도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한 때는 워킹맘으로서의 생활에 지쳐서 '꼭 자기개발을 해야 하나, 그냥 회사나 다니면 되지'라는 생각을 갖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주변에 노력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고 다시 한번 생각을 다잡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좋은 롤모델을 주변에서 찾고 지켜보는 것은 가장 큰 효과가 아닐까.


나 역시 몇 년 후가 되어도 여전히 H대리가 "롤모델"이라고 했던 그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모습을 유지하고 싶다. 임신과 출산, 육아로 고민하는 H대리에게 "워킹맘의 삶은 살만 해. 평범한 나도 이렇게 잘 살고 있는걸." 이라면서 당당하게 이야기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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