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자 A는 자신감이 넘치는 인상을 가진 후보였다. 대기업 경력에 직무 관련 석사, 외국어 능력도 보통 이상이었으며 밝은 표정도 참 좋아 보였다. 나는 그녀를 본 순간 우리 팀에서 함께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이 짧게 느껴질 만큼 대화가 잘 통하는 면접이었다.
그런데 면접을 마무리하기 전에 한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유독 한 가지 그녀가 미처 자신감 있게 먼저 말하지 못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나 : 자기개발도 열심히 하시고 일에 대한 열정도 높은 것 같아요. 정말 열심히 삶을 사시는 분이네요.
후보자 A : (웃으면서) 네, 제가 너무 열심히 사니까 저희 남편은 좀 싫어하더라고요.
나 : 아, 결혼을 하셨군요.
후보자 A : 네, 딸이 둘 있어요. 아, 물론 일하는 데는 전혀 지장 없어요. 친정엄마가 근처에 사셔서 아이들을 돌봐주시거든요.
이력서에도 그녀의 가족관계는 적혀있지 않았고 나 역시 그녀의 가족관계를 확인해야 할 필요가 없었기에 굳이 먼저 묻지 않았었다. 하지만 먼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그녀의 말투가 약간 빨라지면서 어쩐지 모를 당혹감이 느껴졌다. 혹시나 자신이 워킹맘이라는 것 때문에 마이너스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순간 느껴진 것은 단순히 나의 착각이었을까. 묻지도 않은 말에 추가 설명을 붙여서 대답하는 그녀를 안심시켜주기 위해서 나도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여주었다.
"네, 저도 워킹맘이에요."
면접이 끝난 후 인사를 하고 나가는 그녀의 모습에서 복직 이후 첫 이직을 하던 때의 내가 떠올랐다. 워킹맘이기 때문에 서류통과 후에도 면접이 취소되거나, 헤드헌터로부터 '경단녀'는 뽑지 않는다는 모진 답변을 들으면서 한창 자존심이 상했던 시절이 있었다. 나의 능력은 엄마가 되기 전이나 후에나 큰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더 나아졌는데도 불구하고 워킹맘이라는 타이틀 하나 때문에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현실에 화가 나기도 했었다.
그래서 이력서와 함께 쓰는 자기소개서에는 항상 아이를 낳고 3주 만에 대학원을 다녔다거나 임신 중에도 회사 일과 학업을 동시에 소화했다 내용을 쓰는 등 나는 임신과 출산, 육아에도 절대 넘어지지 않는 슈퍼우먼이라는 이미지를 담으려 했다.
복직을 하고 나서도 2년 정도는 갑작스러운 야근이나 회식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려고 했고 잦은 출장도 나서서 하는 등 미혼일 때보다 더욱 열심히 회사생활에 매진했다. 하지만 그렇게 2년을 보내고 나니 이렇게 회사생활을 해도 특별히 남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은 나보다 외할머니에게 더 강한 애착을 갖고 있었고 회사에서는 여전히 '아줌마'라는 이미지는 지워지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이런 모습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내가 직장생활을 하는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언젠가는 사회생활을 하게 될 딸에게 일하는 여성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회사에서 후배들에게 본받고 싶은 롤모델이 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복직하고 2년 동안의 모습은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하지 못했다. 나는 워킹맘이라는 속성을 숨기거나 부정하는 모습을 회사에서 보여주고 있었고 이런 모습이 결국 결혼이나 출산을 앞둔 후배들에게 오히려 '워킹맘 티를 내지 않도록 살아야 해'라는 부담감만 안겨주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사회에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인정을 받으려 하기보다는 사회가 규정한 모습에 나를 깎아내리면서 맞추려 했던 것이었다.
지금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모습을 만들어 나가는 중이다.
"워킹맘이라는 것은 절대 단점이 아니다. 그저 개인의 한 가지 속성일 뿐이다."라는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당당하게 생활하는 중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회사에서 꼭 지키는 몇 가지가 있다.
일은 집중해서, 퇴근은 칼같이
근무 시간에는 집중해서 하되 퇴근 시간은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재택근무를 하는 경우에는 퇴근 시간이 되면 3분 이상 늦지 않고 PC를 덮는다. 당연히 근무 시간 내에 맡은 일은 차질 없이 처리하고 근무 시간 이후에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데 집중한다.
타인의 말을 들을 때는 엄마 같은 여유로움과 평정심을 유지하기
"OO님과 팀장님을 보면 엄마와 아들을 보는 느낌이에요."라고 얼마 전 후배가 이야기했다. 팀장은 종종 스트레스를 받거나 감정이 격해져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나의 태도가 굉장히 여유롭게 잘 받아주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엄마'의 장점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팀장도 얼마 전에 나에게 '우리 팀 힐러'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칭찬을 해 주었다. 나에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입사 초기에 '워킹맘 티가 나지 않게 일한다.'라는 칭찬(?)을 받았을 때는 마음이 오히려 찜찜했는데 '힐러'라는 별명은 내가 팀장에게 받은 최고의 칭찬이라는 생각이 든다.
회사에서 워킹맘에게 제공되는 혜택은 주저하지 않고 사용하기 & 주변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독려하기
현재 회사는 코로나19로 인해 전사적인 재택근무제를 시행하고 있다. 100%는 아니고 매일 절반 정도의 직원은 출근하도록 비율을 맞추고 있어서 주 5일 중에 3회는 출근을 하게 된다. 단, 집안에 어린아이 및 기저질환자, 고령의 노인이 있는 경우에는 '재택근무 권장 대상자'로 분류돼 필수 출근일 수와 관계없이 더 자유롭게 재택근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우리 팀에는 나만 유일하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입장이라 다소 눈치가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주저하지 않고 반드시 출근해야 하는 일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택근무를 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요구하여 일주일에 1~2회만 출근하는 생활을 몇 달 동안 하는 중이다.
그뿐만 아니라 '재택근무 권장 대상자'는 무제한으로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제도가 잘 지켜지지 않는 팀이 있어서 회사 노무사에게 건의하여 공식적으로 각 팀의 리더들에게 구체적으로 공지하도록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내가 눈치를 보면 내 후배들도 눈치를 보게 된다. 내가 좀 눈치를 받더라도 먼저 나서서 행동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길을 닦아놓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초반에는 이런 내 행동으로 인해서 나에 대한 평가가 깎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회사생활을 하는 이유를 생각하면서 나는 회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거나 더 높은 직책을 차지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적절한 선을 지키면서 꾸준히 행동한 덕분에 지금은 오히려 나의 행동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이로 인해서 내 업무의 성과에 영향이 없음을 팀장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확실히 인식시켜 두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을 실천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의 핸디캡을 숨기기 위하여 에너지를 쏟는 것보다는 내 특성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인생의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