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두나 Sep 15. 2021

아이의 영어 동화책을 고르며 고민에 빠졌다

"5,6세 시기는 아이들의 언어적 재능이 폭발할 때에요. 이때 아이들에게 다양한 어휘 자극을 주면 정말 스펀지처럼 잘 빨아들여요."


"우리 아이도 3~4살 때 영어책을 꾸준히 읽어줬더니 요즘 혼자 놀면서 예전에 책에서 읽었던 표현을 종종 말해요."


"얼마 전에 유치원에서 한 영어 골든벨 문제를 한 달 동안 연습했어요. 매일 조금씩이라도 연습하니까 며칠 만에 아이 실력이 쑥 늘어나는 게 눈에 보이더라고요."


한 달에 한 번, 휴일에 하는 아이의 숲 체험 시간에 함께 모이는 아이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혼란에 빠졌다. 내가 아이를 너무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이라도 당장 영어책을 사서 읽어줘야 하나. 우리 아이는 아직 한글도 완전히 못 뗐는데...




6살인 우리 아이는 영어유치원에 다니고 있다. 영어를 엄청 잘하면 좋겠다는 큰 기대가 있어서는 아니다. 아이들의 수에 비해서 일반 유치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신도시에서 유치원 추첨에 2년 동안 내리 떨어지고 보낼 곳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 내린 결정이었다. 아이는 3월부터 지금까지 친구들과 선생님들을 굉장히 좋아하며 즐겁게 영어유치원을 다니고 있다. 그리고 이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 숲 체험 그룹에서 함께 만난 엄마들의 열정은 달랐다. 사실 숲 체험을 함께 하는 그룹은 영어유치원의 같은 반 친구들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아이들이 숲 체험을 하는 약 90분의 시간 동안 엄마들은 카페에 모여 유치원 수업이나 학습방법에 관한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나는 그저 아이가 재미있고 행복하게 유치원을 다니면서 다양한 활동을 하다가 거기서 영어에도 좀 익숙해지고 초등학교 이후부터 영어 시간에 최소한 주눅 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아이 엄마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내가 너무 안일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아이에게 하원 이후 집에서도 좀 더 학습적인 측면을 챙겨주지 못한 것에 대한 안일함이 아니었다. 나의 마음속에서 문들 떠오른 생각은 '워킹맘이라는 핑계로 그저 돈이나 간단한 시도로 해결할 수 있는 몇 가지만 해 놓고 내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였었다.


집에 돌아와서 밤에 아이를 재운 후 몇 가지 영어책을 검색해 보았다. 몇 종류의 책을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를 하려는 순간 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또 돈으로 때우려 하는군... 영어책 몇 번 읽어주면 뭐하나, 내가 꾸준히 옆에서 함께 해 주지 않으면 그냥 짐만 또 늘어나는 꼴인데...'


사실 내가 엄마들과의 대화에서 마음에 조금 불편했던 것은 단순히 아이의 학습에 더 좋은 교재나 교구를 구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더 좋은 학습 환경을 위해, 아이들이 더 성취감을 느끼게 해 주기 위해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보고 '계속해서 시도해보는 엄마들의 에너지'가 부러웠던 것이다. 


아이와 몇 차례 과제나 학습을 해 보니 함께 놀아주는 것보다 더 많은 인내심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옆에서 동화책 몇 번 읽어주고, 함께 종이 접기나 인형놀이를 하며 노는 것은 아이가 좋아하는 활동이니 엄마가 옆에서 호응만 잘해 주면 된다. 하지만 학습은 달랐다. 얼마 전부터 유치원에서 단어 10회 쓰기 과제를 매일 내주는데 아이를 잘 달래 가며 공부가 아닌 놀이처럼 재미있게 느껴지도록 과제를 완수하게 하는 것은 일반적인 놀이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혹자는 말한다.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것보다 짧은 시간이라도 함께 재미있게 놀아주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그리고 그런 말에 위안을 얻으면서 아이와 매일 보내는 시간이 많지 않음에, 간단히 할 수 있는 놀이 말고 좀 더 고민하고 집중적으로 아이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지 않음에 대해서 스스로 면죄부를 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A는 다섯 살 아이의 손을 잡고 <똑똑한 엄마가 골라주는 그림책>이라는 제목의 책을 꺼내 들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책을 골라 읽혀야 한다는'생각조차 못했던 A는 주변 지인의 권유로 그림책 전집을 사는 것으로 충분히 엄마 역할을 한 줄 알았다. 하지만 "엄마의 꼼꼼한 그림책 선택이 아이의 정교한 어휘력을 결정한다"라는 부제의 책을 보며 A는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 지금까지 뭐 했지?'라는 자괴감과 '나는 앞으로 이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


그런데 읽어줘야 할 책을 까다롭게 고르는 것은 그저 '극성 엄마들이나 그렇지'라고 치부하기 어렵다. '유럽 엄마들이 실천하는 생각하는 책 읽기의 모든 것'이 책에 담겨있단다. A는 어린이집 종일반을 보내면서 아이의 '사고력'을 키워줄 교육까지 요구할 순 없었다. 사실 그런 단어를 고민조차 한 적 없다. (중략)


집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피곤에 찌든 몸으로 상상력이 넘쳐나는 엄마와 아이의 소중한 시간을 만들어내긴 어렵다. 하지만 누구 엄마는 아이 감성을 자극한다는 지구 반대편의 '스칸디나비아 육아법'을 실천하기 위해 책을 선별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A 같은 워킹맘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조차 사교육에 의지하는 거다.


(오찬호 作,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201~202쪽)




A가 느끼는 혼란과 고민은 지금 딱 나의 상황과 같다. 문득 결혼하기 전에 옆 자리에 앉았던 과장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맞벌이를 하다 보니 아이랑 같이 하는 시간이 부족해서 돈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꽤 있는 것 같아. 아무래도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 보니 장난감이든 사교육이든 더 돈을 쓰는데 너그러워지는 거지."


아이에게 더 질 높은 관심과 에너지를 쏟는 대신 영어유치원이나 문화센터 몇 강좌 등록해 놓고 나는 충분히 교육을 위한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다며 위안 삼았던 것은 아닌지. 사교육으로 채울 수 없는 엄마의 역할이 있다는데 창의적인 엄마표 학습 환경이나 기발한 엄마표 놀이로 아이에게 질 높은 자극을 주는 엄마들에 비해 나는 회사를 핑계로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일하는 것에서 느끼는 자부심으로 나를 포장하고 정작 아이의 자신감을 키워주는 것에는 얼마나 애를 썼는지에 대한 자괴감. 사실 직장을 다니면서 종종 나에게 드리워지는 그늘이다. 


일과 육아의 두 마리를 토끼를 어떻게든 잡고 싶은 욕심이 지금의 사회에서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아이에게 직접 질 좋은 놀이나 학습 환경을 만들어주는 엄마들의 모습은 점점 더 부각되고, 워킹맘은 일도 하면서 아이도 훌륭하게 성장시켜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 이 정도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며 스스로를 위로 하기에는 아이를 위해 직접 무언가를 해 주는 엄마들의 모습이 자꾸만 주변 이야기를 통해서 매스컴이나 SNS를 통해서 들어온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위해 시간을 투자하려는 것도 아니다. 사실, 일을 그만두면 하루하루를 어떤 것을 하면서 보내야 할지에 대한 그림도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 


얼마나 더 멘탈이 강해져야 할까. 얼마나 더 굳은 의지로 지금의 나로서도 괜찮다고 다독여야 할까. 그런데 지금의 모습으로도 괜찮다고 하는 것은 정말 괜찮은 것일까. 그저 불안감을 덮어놓기 위해서 잠시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에 그치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워킹맘이란 게 어때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