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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재 Aug 16. 2023

“그럼 저도 소중해요?”

글과 삶

 글을 적었다. 목적 없는 글도, 목적 있는 글도 있었다. 그리 오랜 기간 적지는 않았지만 글쓰기는 내 삶에 등장해 최근 몇 년 사이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직장 생활을 하며 빈 화면에 두서없이 글을 적다 기자가 되었고 기자를 그만두고는 학원에서 글을 가르치는 강사가 되었다. 돌아보면 꿈같은 일이 일어난 것만 같다. 당장 경제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이루진 못했지만 일터로 나가는 마음가짐이나 일을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좋은 글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앞으로 알 수 있을지 장담하지도 못한다. 다만 사람은 절박한 순간에 글을 적게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돈을 빌려야 하는 사람도, 모든 걸 잃은 사람도, 죽음을 택한 사람도 글을 적는다. 모든 행위가 그렇듯 글쓰기라는 행위에도 무언가를 바라는 절박한 마음이 들어 있다. 절박하기 때문에 한 편의 글에 적힌 단어 대부분은 글쓴이가 곱씹고 곱씹어서 선택한 것들이다. 신중한 선택을 짧은 순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종이에 적힌 내용은 진실에 다가선다.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과 삶도 신중하게 마주하게 되며 나아가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의 입장을 헤아릴 수 없다. 삶을 소중하게 가꾸는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든 누군가의 행복과 생명을 앗아가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자기가 소중하듯 남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을 쓰는 사람은 나와 타인을, 세계를 이해하려 한다.


 학원에서 일하며 많은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에게는 글쓰기가 ‘손에 펜을 쥐고 종이에 무언가를 적는 행위’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글쓰기를 ‘하기 싫은 공부’쯤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관념적인 글짓기 교육의 반복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생각했다. 학원에 아이를 보내고 비용을 지불하는 학부모의 목적, 학원을 창립하고 운영하는 운영자의 목적, 학원에 오는 아이들의 목적, 그리고 아이들을 만나 글을 가르치는 나의 목적이 매번 같을 수는 없었다. 여러 뜻이 부딪치며 혼란을 겪고 있는 시기에 한 아이를 만났다. 열세 살 꼬마 아이는 관찰 수업에 활용하는 개구리알을 보면서 내게 물었다.

    

“여기에 손 집어넣고 막 휘저어도 돼요?”

“아니.”

“왜요?”

“생명은 소중하니까 짜식아.”

“… 그럼 저도 소중해요?”

“그럼 소중하지.”

“헤헤.”     


 아이는 싱글벙글 웃으며 학원 문을 나섰다. 그 아이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도 모르지만 아마 아무 생각 없이 한 소리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맑게 웃으며 “그럼 저도 소중해요?”라고 무심하게 건네온 꼬마의 질문은 지금도 메아리처럼 귓가에 울려온다. 이후로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글쓰기를 하는 목적도, 가르치는 목적도 결국 삶을 소중하게 가꾸기 위함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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