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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나책장 Oct 03. 2023

순수하게 지속하는 헌신

<장인의 아틀리에>, <브람스 인터메초_백건우 연주>


연휴 마지막 날이다.

연휴 첫날엔 자정까지 내가 맡은 프로젝트 고객사에 보고할 중간보고서를 정리했고, 마지막 날인 오늘도 오후엔 들어가서 일을 해야 한다.

명절에 본가에 가서 푹 쉬고 왔다. 두 달 만에 집밥을 먹으며 문자 그대로 '힐링'이 되었는데 비로소 내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 인지했다. 그건 '일상'이었다.

말씀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간 받은 인사이트를 갈무리해 영상을 제작하고, 산책을 하고, 무지개다리 건넌 반려 고양이 테오를 뿌려준 호수에 가서 인사하고, 밥을 지어먹고, 집을 단정하게 청소하며 음악을 듣던 시간. 그 일상이 나를 단단하게 하고 나아가게 했던 것이다.


회사에 적응하는 두 달은 말로 할 수 없게 고통스러웠다. 5년 동안 개인 작업자로 일하며 조직의 물이 다 빠져있기도 했고, PM으로 내가 맡은 30종의 프로젝트를 장악하고 끌고 가기엔 내 체력은 턱없이 모자랐으니까.


두 달은 일상을 꾸려갔다기보단 버틴 시간이었고 나는 이 생활이 주는 장점이 안정적인 월급 외에 도대체 무언가 의문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그런 내게 긴 연휴는 단비 같았다. 사실 긴 연휴가 아니다. 앞자락과 뒷자락은 업무로 채웠으니...

하지만 카페에 가서 책을 읽고 브람스와 드보르작을 들으며 두 달 동안 미뤄두었던 집을 정리하며 나는 내 작은 일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

카페에서 <장인의 아틀리에>를 읽으며 건우쌤이 연주한 브람스의 인터메초를 들었다.

이 책의 첫 챕터에는 하프시코드를 만드는 장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클래식 마니아인 내가 유난히 아끼는 두 악기가 있으니 하나는 첼로, 하나는 하프시코드이다.

책을 읽으며 '발견'했다. 내가 일과 공부를 통해 찾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써 내려가고 싶었던 건지.

그건 바로 '순수하게 지속하는 헌신'이었다. 물질적인 대가가 따르지 않아도 사랑하나로 계속 지속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내가 원하는 삶의 밀도를 만들어갈 수 있으니까. 나란 사람은 그런 유형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이제 아니까.


도서관에 신청도서로 주문한 이 책이 너무 좋아 나는 읽다 말고 주문했다. 밑줄 그으며 자주 들춰보고 싶은 책이었다. 글도, 사진도, 그 속에 담긴 장인들의 삶도 무척 아름다웠다.


입사 두 달 차인 나는 이제 안다.

문학과 예술에 뿌리를 가진 내가 교육회사의 PM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여전히 문학과 예술을 짝사랑하며 그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본심이 마음의 밑바닥에서 찰랑거리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의 일상이 일로 가득 채웠어도, 내가 하고 싶은 연구와 작업을 건드릴 시간이 없어도, 내 일상을 가꿀 시간이 없는 것 같아도 이 일은 나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다.

일과 삶은 서로를 보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일로서 나는 기획자의 마지막 관문인 PM으로서의 역량을 기르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그리고 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다시 일상을 회복해 갈 생각이다. 식탁을 회복하고, 책과 옷과 음반과 도록이 점령한 내 집을 정리하면서. 그리고 우선은 이번 주의 중간보고를 잘 마무리하는 것.

내 30종의 프로젝트들을 잘 꾸려서 엮어내는 것.


휴일. 장인의 아틀리에, 브람스의 인터메초는 내게 말을 건넸다.

"그건 서로를 보완하는 거지 방해하는 게 아니야. 너의 삶은 일과 일상이 합쳐져 아름답게 어우러질 거야. 너는 자라고, 잘 해낼 거고, 지금의 네가 통과한 시간을 통해 또 하나의 이야기를 가지게 될 거야."


고통스러웠던 두 달의 시간을 건너가며 나는 지금의 나의 일상들을 갈무리한다. 일상이란 말속에 문학과 예술, 일과 사랑이 있다는 거에 감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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