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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Dec 24. 2023

책을 덮고 판단을 미루고 성탄을 맞으라

상상농담 35. 알브레히트 뒤러 <율법학자들과 있는 예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백색의 계엄령'이 선포된 겨울 한복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구도 어두운 그늘로는 눈길 한번 줄 수 없는 희고 맑은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화폐와 지위가 주 재료가 된 삶의 시간에 태양처럼 고르고 빠짐없는 은총을 받고 싶습니다. 보다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 산타할아버지가 달려와야 하니까요.


   산타할아버지의 썰매는 대기권에 진입하는 우주탐사선 같이 눈 깜짝할 사이, 저의 집 창문을 두드리겠지요. 그럼 조심스레 문을 열며 한 해 동안 착한 아이였다고 말해야겠지요. 아마 우물쭈물하게 될 거예요. 금방, 단박에, 산타할아버지는 눈치채고 말 것입니다. 제가 그리 착한 아이는 아니었다는 걸. 그래도 선물을 받고 싶다고 하면 이 그림을 보여 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율법학자들과 있는 예수, 1506년)입니다.


알브레히트 뒤러 <율법학자들과 있는 예수, 1506>


  회화적 공간에 조형적으로 생각을 드러내었습니다. 구도는 간명하고 의심할 여지없이 단정합니다. 보세요. 꽉 찬 공간의 중심에 영성체를 상징하는 듯한 둥그런 손놀림을! 


  손의 주인공은 탁하고 그늘진 여섯 명의 율법학자들에게 둘러싸인 맑고 어린 소년 예수입니다. 저는 어린 예수가 성전에서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들과 함께 계시는데 "듣는 사람이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는 누가복음 2장의 내용을 그린 것인지,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라고 했던 요한복음 8장의 내용을 그린 것인지, 또는 다른 성경 속 내용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소년의 눈은 율법에 얽매인 노인들의 시야를 벗어나 깊은 곳을 봅니다. 입은 닫혀 있으나 소년의 손은 무언가를 말하고 있군요. 


  소년 예수의 손에 대답이라도 하듯 노인의 크고 두툼한 손이 보입니다. 그의 빠진 이와 굽은 콧잔등, 튀어나온 턱에서 탐욕과 고집을 봅니다. 그의 눈에 초점이 없는 걸 보니 그는 앞이 보이지 않는 이 같습니다. 아마도 그는 육체의 눈은 닫혔으나 영혼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고 하겠지요. 그 뒤로는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소년을 훔쳐보는 이가 있습니다. 오른쪽 앞엔 혼란스러운 듯 책을 펴 들고 있는 율법학자도 있네요. 왼쪽 위에는 어둠에 숨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이와 소년 예수의 말을 책에서 찾으려는 듯 책을 펼치고 있는 학자도 보입니다. 각자 마음의 표정이 작은 몸짓에 생생히 드러납니다. 

  



  심지어 색조차 말을 합니다. 어두운 배경에 초록색, 푸른색, 붉은색, 흰색, 오렌지색, 노란색 등이 소용돌이칩니다. 뺨이 발그레한 소년 예수는 혼란과 불신의 소용돌이 속에서 홀로 고요합니다. 한 번도 세속의 것을 쥐어본 적이 없는 손으로 말합니다. "생명을 키우는 건 율법이 아니라 사랑이에요."라는 말이 들려옵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모두 책을 펼쳐 드는 와중, 그윽이 예수를 바라보는 학자가 있습니다. 그의 눈은 놀라움과 경외감으로 빛나고 그의 손은 책을 덮고 있습니다. 마치 책에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다는 듯.




  뒤러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던 걸까요? 그는 이 섬세하고 의미 있는 책갈피 사이에 사인을 했습니다. '1506, 알브레히트 뒤러'라고 말입니다. 'Dürer'는 '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사인이 대문 형상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설명이 되겠지요. 그가 책을 덮고 마음의 문을 열어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사랑에 귀 기울였던 걸까요?


  이 그림을 보여주신 산타할아버지는 제게 이렇게 말하실 것 같습니다. 

  "올해도 잘 자라 주었구나. 이 선물 받으렴. 축복한다. 내가 네게 했던 것처럼 누구에게도 충고나 조언이나 평가나 판단을 하지 말고 그저 사랑하라!"



PS : 매년 안산 예술의 전당 프로그램 '아침 음악 살롱'을 일 년 치 사전 예약하고 관람을 갑니다. 요번 12월 송년회 특집으로 피아니스트 송영민, 바이올리니스트 김덕우, 첼리스트 박건우 님이 연주했습니다. 뜨거운 열기에 대한 답례로 크리스마스 캐럴을 앙코르곡으로 들려주셨습니다.(앙코르곡은 동영상 촬영 허락하셨기에 이곳에 올립니다.) 20초 정도 지나면 연주곡 시작합니다. 들어보세요. 행복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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