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노라 Feb 26. 2024

그대를 꽃 벙에 초대합니다

상상농담 41. 프레데릭 워커 <봄>

  몸에서 떨어져 자꾸 엎어지는 그림자를 부득불 의자 위에 앉혀 놓고 꼬박꼬박 책을 읽습니다. 베개로 쓰기 딱 알맞은 벽돌 사이즈에다 그림이라고는 한 점도 없이 일관성 있게 지루합니다. 기합이 빡 든 글자들은 매스게임하듯 나란히 줄을 맞춘 차렷 자세로 어떻게 해야 돈을 효율적으로, 현대적으로 버는지를 자근자근 웅변합니다. 10포인트 함초롱바탕체가 단정하기 그지없습니다. 


  문제는 돈은 좋아하는데 돈을 버는 방법을 배우는 건 지루해하는 저의 이중성입니다. 일 초씩 건너뛰며 커피를 마셨다 강정을 깨물었다 급기야 냉동실 초콜릿까지 손에 넣었습니다. 아~ 낮에는 에드가 앨런 포우의 소설을 읽고 밤에는 보들레르의 시와 와인 한 잔에 취하는 날들과 돈이 서로 친할 수는 없는 걸까요? 돈의 갑옷을 입고 돈키호테의 말을 타고 툴루즈 로트렉의 물랭루주로 돌진할 수는 없는 걸까요? 돈은 시와 그림과 술과 낭만을 좋아하지 않는 걸까요? 이렇게 원초적 욕망을 지하에 쑤셔 넣으면 부풀고 끓어올라 급기야 지진이나 화재가 난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요?


  소중하고 귀한 우리의 소방대원을 부르는 참사를 일으키기 전, 단호히 책을 덮었습니다. 휴우~ 마음이 놓입니다. 이왕 버린 밤, 창문 가득 달이 싣고 와 나누어 주는 봄을 잠옷 주머니 가득 넣기로 합니다. 잠옷에 달린 주머니가 딱 두 개뿐이라는 건 다행입니다. 욕심 사나운 제가 주머니 열 개 달린 잠옷을 샀다면 봄을 만나는 이는 제 주위에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아하, 주머니 없어 앞치마를 들고 봄을 마중 나온 소녀가 있네요. 고전적이고 우아한 여신의 모습이 아닌 앳되고 수줍은 꼬마 소녀입니다. 이른 죽음으로 친구들을 슬프게 했던 영국 화가 프레데릭 워커(Frederick Walker, 1840~1875)의 <봄, 1864>입니다. 


 

프레데릭 워커 <봄, 1864>


  풍성하고 넘실거리는 보드라운 봄이 아닙니다. 마르고 스산한 황무지라 봄이 한참을 머뭇대다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살짝 발꼬락만 디딘 것 같습니다. 징검다리 마냥 연두와 노랑이 퐁. 당. 퐁. 당. 물들었습니다. 수채화의 맑은 색조가 바람과 나무, 가시덤불에게 저마다 다른 촉감을 선사합니다. 화면은 촉촉하게 젖었고 웃지 않는 미인의 얼굴처럼 환하지 않습니다. 본처에게 구박받는 후처의 손수건 같지요. 떠나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흘겨보는 매운 겨울 덕에 여린 잎들이 풀 죽었습니다. 아마도 영국 화가인 프레데릭 워커가 바람 세고 구름 많은 자신의 고향을 캔버스에 담았을 것입니다. 그는 잠깐의 여행 중에도 향수병이 유난했다고 하니까요. 


  소녀의 어둡고 두터워보이는 옷은 검소와 정절을 모토로 삼았던 빅토리아 시대의 소박함과 순수함을 드러냅니다. 볼이 발그레한 소녀는 오른손으로 앞치마를 움켜쥐고 왼손으로는 노란 꽃 한 움큼을 높이 들었습니다. 오므린 앞치마에 봄을 담고 있는 것이겠지요. 소녀 앞 버드나무에는 새잎이 돋았습니다. 소녀는 주의를 기울여 버드나무 아래 핀 노란 꽃에 다가갈 모양입니다. 소녀의 뒤쪽엔 어린 소년이 보입니다. 프레데릭은 소년과 소녀를 사선으로 배치함으로 화면에 깊이를 더했습니다. 공간은 한참 뒤로 물러납니다. 소년은 가시덤불을 피해 조심스레 야생화를 꺾고 있습니다. 소년 모르게 소년의 좁은 등 위로 유년의 아침과 저녁, 그늘과 고요가 지나갑니다. 소년과 소녀의 꽃이 오래도록 시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봄이란, 유년이란, 시간에 속수무책이니까요. 


  프레데릭 워커의 작품엔 스치듯 '애수'가 흐릅니다. 세상을 향하는 시선에 눈물이 많았던 탓이겠지요. 홀로 된 어머니의 오랜 뒷바라지, 넉넉지 않은 경제, 자유롭지 못한 창작 환경, 자신을 포함한 가족 대부분의 허약한 건강, 다정하고 소심한 성격 등은 그의 작품에 안개처럼 스며들었습니다. 그는 작가들의 글이나 잡지에 삽화를 그려 넣는 일을 했기에 대부분 유화가 아닌 수채화로 그렸고 목판 작업도 많습니다. 유화작업을 하려는 시도가 빈번했지만 서른다섯이라는 나이에 결핵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돈과 가깝지 않았고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소소한 풍경사진'의 밴드장님이 남평문씨 세거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한 달 전, 오랜 벗이자 형에게 막걸리를 주문했습니다. 꽃이 피면 벗들을 불러 봄꽃 아래에서 시를 읊을 요량으로 말입니다. 전통 주법으로 빚어진 수제 막걸리가 어떤 봄밤을 선물할지 설레입니다. 독한 꽃샘추위를 이기고 망울망울 꽃이 피기를 바라는 이른 봄 늦은 밤, '돈'을 꽃 벙에 초대합니다.


  "그대, 나와 함께 매화 아래에서 막걸리 마시지 않겠소."


PS : 행복한 봄 밤에 춤이 빠질 수 없지요. ㅎㅎ



작가의 이전글 둑을 쌓을까 익사할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