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와 픽사의 걸작, <소울>이 남긴 soul에 관하여
* 본 포스팅은 영화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영화를 볼 계획이 있으신 분은 읽지 않으시기를 권장합니다.
사실 <소울>은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본 영화다. 그저 명절에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의무적으로 보러 간 영화였고, 습관적으로 노트와 펜을 챙겨갔을 뿐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쯤 내 노트에 무언가가 빼곡히 적혀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기야, <코코>도 무진장 좋아했던 영화 중 하나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코코>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소울>은 삶을 시작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을 남기고 있으니 일맥상통할 수밖에.
일단, 간단한 줄거리는 알아야 이야기를 풀어가기 편할 것 같아 간략한 영화 소개 겸 줄거리를 들고 왔다. 물론, 내가 아니라 네이버 영화에서. 칸 안에 글을 누르면 자동으로 영화 소개 페이지로 이동한다. 링크 걸어뒀다.
나는 어떻게 ‘나’로 태어나게 되었을까?
지구에 오기 전 영혼들이 머무는 ‘태어나기 전 세상’이 있다면?
뉴욕에서 음악 선생님으로 일하던 ‘조’는 꿈에 그리던 최고의 밴드와 재즈 클럽에서 연주하게 된 그 날, 예기치 못한 사고로 영혼이 되어 ‘태어나기 전 세상’에 떨어진다.
탄생 전 영혼들이 멘토와 함께 자신의 관심사를 발견하면 지구 통행증을 발급하는 ‘태어나기 전 세상’
조는 그 곳에서 유일하게 지구에 가고 싶어하지 않는 시니컬한 영혼 ‘22’의 멘토가 된다.
링컨, 간디, 테레사 수녀도 멘토되길 포기한 영혼 ‘22’
꿈의 무대에 서려면 ‘22’의 지구 통행증이 필요한 ‘조’
그는 다시 지구로 돌아가 꿈의 무대에 설 수 있을까?
습관처럼 챙겨간 노트에 와닿은 구절이나 느낀 점, 파생되어 생각나는 것들을 중구난방으로 적어둔 덕분에 이 영화가 내게 남긴 soul을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제작자가 의도한 것과 일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창작물을 해석하는 건 소비자의 자유니까 부담없이 적어본다.
영화가 마음에 안 들면 노래 들으며 잠이라도 잘 심산으로 이어폰까지 챙겨간 나를 집중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영혼이 '머나먼 저 세계'로 향하는 장면부터였다. '저게 죽음이에요?'라고 묻는 조의 시선 끝에는 눈이 부시도록 흰빛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영혼들은 차례대로 그 빛을 향해 날아가며 점차 흰빛으로 변하며 거대한 흰빛의 일환이 되더라. 물론 조는 주인공답게 죽기 싫다며 도망치다 계단에서 떨어져 사후세계가 아닌 태어나기 전 세계로 진입하게 되지만.
이 부분이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인간의 영혼이 별이 되어 우주의 일부로 자리 잡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조그맣고 하얀 영혼들이 모여 만든 거대한 흰 빛이 하나의 우주 같기도, 행성 같기도 하더라. 검은 빛이 아닌 것도 퍽 마음에 들었다. 통상 죽음은 검은색과 연결 짓기 마련이니까. 조가 계단 아래로 떨어져 태어나기 전 세계에 도착할 때까지의 공간이 변화하는 과정에서도 우주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였다. 뭔가 다중우주론이나 멀티버스가 생각나기도 하고. 여러모로 인간과 우주를 연결 지으려는 시도가 눈에 보여서 좋았다.
사실 '태어나기 전 세계'는 인간이 그려내기 어려운 세계다. 상상이야 자유라지만, 경험해보지도 못한 것을 어떻게 그려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일까, '태어나기 전 세계'를 관리하는 제리(들)는 피카소가 그린 듯한 2차원의 선으로 그려진다. 그것도 형상을 자유자재로 변형할 수 있는 오묘한 색으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존재를 이만큼 잘 표현해낼 수도 없겠다,하는 생각에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딘가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모양새.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우주였겠지. 끝까지 적지 못해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제리가 조에게 '우주의 양자화된~' 라는 말로 '태어나기 전 세계'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는 걸 보니 <소울>에 우주가 조금은 포함되지 않았을까.
나는 '영혼'과 '인간'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 본 적이 없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고양이>나 <죽음>을 읽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테다. 형상을 지니고 움직이며 삶을 영위하는 인간에게 영혼은 너무나도 당연한 존재라고 생각했으니까. 마치 숨 쉬는 데 공기가 필요한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구통행권을 얻지 못한 22번은 조와 함께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지구로 향하고 22번은 조의 몸에, 조는 고양이의 몸에 들어가게 된다. 그 어떤 것을 보고 경험해도 살고 싶지 않은 22번과 우울해도 살고 싶어 하는 조의 아이러니한 동행은 여러 생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달관한 태도의 영혼이지만 육체는 없고, 별생각 없는 영혼이지만 육체는 있다. 이들 중 우리는 누구를 인간이라 칭할 수 있을까.
조의 몸에 들어간 22번이 조와 친했던 이발사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조는 늘 그와 재즈에 대해서만 얘기를 나눴다고 말해주지만 22번은 자연스럽게 인생에 대한 얘기를 시작한다. 정확히는 자신이 찾지 못했던, 삶을 살아가야 하는 목적에 대해서 말이다. 22번이 배운대로라면, 영혼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갖고 싶은 직업'이 있었다. 하지만 이발사는 원래부터 이발사가 꿈이 아니었다. 그냥 살다 보니, 상황과 현실에 타협하다 보니 이발사가 되었다더라. 그를 안타깝게 여기는 22번에게 이발사는 동정은 필요 없다며, 자신은 지금 충분히 행복하다고 얘기한다. 이때부터 22번은 정해진 인생이란 없다는 걸 알게 되지 않았을까. 이 대사도 참 인상적이었다. 정확한 대사는 아니니 뤼앙스만 느껴주길.
<22번> : 그런데 왜 여태 자네 인생 이야기는 안 했지?
<이발사> : 그야,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자네와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되어 정말 기쁘다네.
사실 영화를 보면서 의아했던 점 중 하나가 '태어나기 전 영혼들의 성격을 미리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게 가능하다고 해도, 실제 삶에서는 유지되기 쉽지 않을 텐데. 이기적이거나 이타적인 사람은 그냥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것인가? 자라면서 변화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이 계속 남았는데 이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던 부분이 아닌가 싶다. 인생이란 기나긴 길에 정해진 건 없고, (이미 형성되었다고 가정하는) 목적에 맞춰 삶을 살아갈 필요도 없다. 제리의 말처럼 지구통행권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삶의 목적이 아닌, 살고자 하는 의지일 테니.
2번의 고민을 거듭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인생은 무엇일까'하는 질문이 떠오른다. 이름 붙인 영혼의 숫자가 1,000억을 넘어가는 걸 고려하면, 22번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지구로 갈 자격'을 얻지 못했다. 말로는 가고 싶지 않아서 가지 않는 것뿐이라고, 자신은 태어나기 전 세계에 만족한다고 말하지만 22번은 사실 두려워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지구에 대해 이미 다 아는데, 별로 가고 싶지 않아.'
영화 설정에 따르면, 태어나기 전 세계에서 영혼은 지구에서 겪을 수 있는 것들을 모두 경험해 볼 수 있다. 그것이 직업이든, 취미든 무엇이든 간에. 22번은 그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링컨, 마더 테레사, 간디 등 수많은 위인이 22번의 멘토를 맡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오히려 22번의 마음을 움직인 건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 있는 두 다리, 맛있는 피자 한 조각, 아이들을 위해 마련된 조그만 사탕 하나, 나무에서 떨어지는 조그만 단풍잎 하나였다. 거창하기는커녕 아주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 그런 것들 말이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고, 네 주변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다는 뻔하지만 우리가 늘 잊고 사는 사실을 알려줌과 동시에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음을 알려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링컨이나 마더 테레사처럼 대단하고 위대한 업적을 남기며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 되는 것도 좋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이름 석 자 정도는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천천히 자신의 속도에 맞춰 세상을 바라봐도 괜찮다는 위로를 전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여러 장면이 마음에 들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게 봤던 부분은 바로 영혼의 변화다. 흔히 몰입이라고 하던가, 자신의 일 또는 취미에 몰두하여 무아지경의 경지에 이르는 인간이 있다. 육체는 현실 세계인 지구에 있지만, 영혼은 잠시 몽롱하고도 찬란한 어떠한 경지로 향하는 것. 그것이 무아지경에 빠진 영혼이다. 이들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오로라처럼 푸르게 하늘을 장식한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일 또는 취미에서 오는 불안과 좌절을 잊지 못해서 길 잃은 영혼이 된다. 좋아하고 잘하고 있다고 믿는 일에서 비롯되는 불안과 좌절. 누구보다 열심히 살지만 그만큼 불행한 영혼. 이들의 모습은 하나의 진흙 덩어리처럼 검게 변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다.
<소울>에서는 무아지경에 빠진 영혼과 길을 잃은 영혼을 같은 선상에 놓고 바라본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어찌 보면 행복과 불안은 한 끗 차이일 테니까. 본인이 가진 가치관, 목적, 방향성에 따라 같은 일을 같은 수준으로 수행하더라도 누군가는 행복을 느끼고 누군가는 불안을 느끼겠지. 전자의 경우에 속하는 사람이 최근 내게 '자신의 행복을 1순위에 놓고 살라'고 말했다. 본인은 늘 그러하다며. 만약 이 글을 읽는다면, 이 사람이 나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면, 정신적/신체적 피로 역시 행복의 조건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걸 고려해줬으면 좋겠다. 많은 짐을 떠안고 있는 건 생각보다 많이 힘든 일이니까. 물론,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알아서 잘하고 있으리라 믿지만.
본래 눈물이 많은 편에 속하긴 하지만, 가장 울컥했던 주제이지 않았나 싶다. 우리네 인생은 과연 누가 어떻게 결정하고 있는가. 조의 몸에 들어간 영혼 22는 조의 꿈을 반대하던 (안정적인 직장을 갖기를 원하던) 어머니에게 '두려워요, 만약 오늘 죽는다면 무의미한 인생일까 봐.'라고 말한다. 그 말에, 화를 낼 거라 생각했던 어머니는 네 아버지였어도 그렇게 말했을 거라며 조에게 아버지의 양복을 꺼내준다.
어찌어찌 꿈의 무대를 마치게 된 조는, 생각보다 허무한 기분에 혼란스러워한다. 이런 조에게 꿈의 무대를 만들어 준 밴드 단장은 이런 말을 한다. 이 역시 정확한 대사는 아님을 기억해주길.
어린 물고기가 나이 든 물고기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물어봤지.
"저는 바다라는 엄청난 것을 찾고 있어요. 바다는 어디에 있나요?"
"바다?" 나이 든 물고기가 말했다.
"그건 지금 네가 있는 곳이야. 여기가 바다라고."
그러자 어린 물고기는 다시 물었지.
"여기는 그냥 물이에요. 내가 원하는 곳은 바다라고요."
조는 다시 태어나기 전 세계로 돌아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길 잃은 영혼이 된 22번을 정화(?)하여 지구통행권을 돌려준다. 자신은 이미 살아봤으니, 너도 한번 삶을 살아보라며 말이다. 그 후 머나먼 저 세계로 향하는 조에게 영감을 받은 제리는 예외적으로 다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선물해준다. 지구로 다시 돌아가려는 조에게 제리는 '이제 뭘 할 건가요, 인생을 어떻게 보낼 거죠?'라고 묻는다. 이에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매 순간을 즐길 거에요.'라는 조의 답변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우리는, 아니 나는 외부적 시선에 늘 갇혀있었다. 그 시선이 타인이든, 사회든, 혹은 허구의 것이든 '그래도 저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하는 불안감이 떠나지 않았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들이 이런 시선 혹은 흐름에 역행한다면 나도 모르게 눈치를 보고, 자책하기를 반복했다. 물론 패기인지 용기인지 모르겠다만 꾸역꾸역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살고 있지만, 내가 무아지경의 영혼이 아닌 길 잃은 영혼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는 확신을 가질 수 없더라. 그럼에도 '누가', '어떻게' 삶을 규정하는지는 한 사람의 인생에 정말 중요한 이정표라는 사실은 확실하겠지. 내게도 연습이 필요한 문제다, 꼭 풀어야만 하는 숙제 같은 문제.
개인적으로 상당히 흥미롭게 지켜본 영화다. 앞서 다룬 다섯 가지 주제 외에도 22번이 가지고 있던 자괴감(혹은 열등감)도 꽤 인상적인 주제였다. 남 일 같지 않아서인가. '목적도 없는 건 네 잘못이야, 시간 낭비에 불과해, 남들은 다 채우는 불꽃을 못채우는 건 네게 문제가 있는 거야.' 아마 22번이 기나긴 시간 동안 들어왔을 얘기들. 자괴감이 영혼을 얼마나 갉아먹는 존재인지 알고 있으니까, 아무리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외부적 요소나 열등감이 주는 고통을 견뎌내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아니까. 그런 과정이 너무 쉽게 치유된 것 같아 아쉽기도 했지만,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 영화였다.
한 가지 고백하자면, 나는 영상에 집중하는 걸 꽤 힘들어하는 사람 중 하나다. 짧은 클립 영상이면 몰라도 호흡이 긴 영상을 볼 때는 그 화려한 그래픽과 사운드에 휘말려 극도로 피곤해진달까. 정말 관심 있는 분야를 다뤘다던가 영상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환경(ex.강의실, 영화관 등)이 조성된 게 아니고서야 도통 집중해서 보기가 쉽지 않다. 텍스트에 익숙해진 탓인지, 그냥 집중력이 부족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꽤 재밌게 봤던 '신세계'도 이틀에 나눠서 본 기억이 난다. 아무튼, 이 정도로 낮은 집중력의 소유자가 이 정도의 집중을 할 수 있었으니 누구든 즐겁고 의미 있게 즐길 수 있을 영화이지 않을까 싶다. 각자 나름의 삶의 이유를 정립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조심스레 바라본다.
* 본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영화 <소울>의 스틸컷을 활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