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이란 때가 되면 이루어질 것은 이루어지고 끝날 것은 끝나는 것을 말한다.
반백년을 살아오며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으며 그저 스쳐가는 인연이 있었는가 하면 물 흐르듯이 지금까지 이어져온 인연도 있다.
그중 학창 시절에 만나 있는 둥 없는 둥 하며 지내다 수십 년이 지나 다시 만나 친구가 있었다.
친구들이 다 함께 결혼을 하여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닐 무렵 나는 갓 결혼을 하여 아이 하나를 기르고 있을 때 평소에 알고 지내는 k는 그녀와 함께 우리 집으로 놀러 왔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먹일 음식 준비로 나는 쌀을 씻어 밥솥에 안치고 멸치를 다듬어 국을 끓이면서 마음이 분주하였는데 시금치를 다듬어 샐러드를 준비하려던 중 어른들이 한눈을 파는 사이 k가 포대기에 업고 온 아이가 밥솥이 뿜어내는 뜨거운 김에 손을 데어 소리를 질렀다.
나와 K는 깜짝 놀라 찬물을 대야에 받아 얼음을 띄우고 한달음에 달려갔는데 손을 물에 담아 응급처치를 한 후에 엄마와 아이를 택시에 함께 태워 병원으로 보냈다.
나는 한숨을 돌리고 마저 요리를 하여 그녀와 함께 마주 앉았는데 아이 걱정에 목으로 밥이 넘어가는지 정신없는 나와 달리 멀리 불구경이라도 났는지 멀뚱히 보고만 있던 그녀는 태연하게 음식을 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는 다행히 별 탈이 없었다. 나는 이후로도 가끔 그녀와 만났으며 항상 짧은 반바지가 인상적이었던 그녀와 오랫동안 소원하다 우리는 동창회에서 다시 재회를 하였다.
그녀를 만났을 때 나는 다소 서먹함을 느꼈다. 모임에서 헤어지고도 가끔 그녀는 내게 전화를 하여 친구 아들 결혼식에 함께 갈 것인지 물어보곤 하였는데 퇴근을 한 저녁이면 사업을 한 남편이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어려웠던 신혼시절의 일이며 명절에 손위동서가 시댁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불만 그리고 최근에는 다니는 직장의 회사 사모가 신천지 회원이라 부부관계가 나쁘다는 등등 내가 물어보지 않은 일까지 세세하게 고하였다.
남의 일에 무관심하였던 나는 맞장구를 치긴 하였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한편으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접하고 찾아와 준 그녀가 고마워서 인사치레 겸 전화를 하였는데 연결이 안 되어 잘 지내느냐는 문자를 보내며 안부를 물었다.
나는 그녀뿐 아니라 장례식에 참석한 친구 모두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힘내라는 친구들의 응원의 메시지가 올 때까지도 읽지도 않은 채 그녀에게 보낸 문자는 그대로였다.
법정스님은 생전에 함부로 인연을 맺지 마라 하였고 아인슈타인 같은 거장들의 인생을 변화시킨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생수업에서 많은 것을 가질수록 의무가 많아 괴로워진다며 나이 들수록 타인과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혼자서도 잘 지낼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장성한 아들들이 이제 자리를 잡기 시작하여 지금부터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그녀가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 지만 그녀에게 아무 일 없기를 나는 지금 기도하는 중이다.
시인 나태주 님은 꽃이라는 시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하였는데 오래 볼 시간도 여유도 없음이 안타까우면서 지금까지 아무 연락이 없는 그녀는 어쩌면 한때 나의 시절인연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