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질 아블로(Virgil Abloh)의 하버드디자인대학원 강연
이 글은 2017년 하버드대학교 디자인대학원에서 있었던 버질 아블로(Virgil Abloh)의 강연 <여기에 복잡한 제목을 넣을 것(Insert Complicated Title Here)>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내용이 짧지 않기 때문에 두 편으로 나눠 올립니다.
** 이전 포스팅에서 계속
강연에서 그는 자신의 구체적인 작업에 관한 얘기도 들려줍니다. 먼저 이케아(IKEA)와의 협업이 소개되는데요. 그는 저렴하고 보편적인 디자인 제품을 양산하는 이케아 브랜드에 자신의 사고방식을 결합해 일종의 저렴한 예술품(혹은 예술적인 디자인) 같은 걸 만들어 보려고 시도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백만장자만큼이나 대학생도 탐낼 뭔가를 이케아에서 만들고 싶어. 예술을 보편적인 어떤 것에 포함시키고 싶다고.’ 그게 깨진 거울이었죠.”
강연에서 두 번째로 등장한 “치트 코드”는 예술의 역사입니다.
1. 르네상스
2. 르네상스에서 신고전주의까지
3. 낭만주의
4. 낭만주의에서 현대주의 미술까지
5. 현대주의 미술
6. 동시대 미술
6a. “스트리트웨어”
이렇게 르네상스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예술의 흐름을 몇 단계로 구분해 나열하는데, 마지막에는 “스트리트웨어”가 동시대 예술과 함께 적혀 있습니다. 앞서 그는 스트리트웨어를 건축이나 예술에서의 어떤 운동과 같은 것으로 상상하는 이야기를 잠시 하기도 했었는데요. 그가 스트리트웨어를 대하는 시각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술의 다른 시기에 대해 안다면 여러분이 뭘 하고 있는지, 특정한 아이디어에 도달하게 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세계는 특정한 방식으로 진화했고, 그건 제게 맥락을 제공하죠. 전 달라지려고 싸운 게 아니었어요. 저는 그저 저 자신의 목소리를 갖기 위해 작업해왔던 겁니다.”
버질 아블로는 미술의 역사를 이해함으로써 자신이 하려는 창작이 어떤 흐름 속에 놓이고 어떤 의미가 있게 될지 가늠할 수 있다는 맥락의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남다른 디자인을 하려면 자기 분야의 뛰어난 디자인을 뒤적일 것이 아니라, 미술에서 영감을 얻고 그걸 자기 분야 디자인에 적용하는 것이 좋다는 조언이 있죠. 이런 조언은 흔히 들어볼 법한 것이지만, 막상 제대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드문데요. 그는 이걸 과감한 방식으로 실행에 옮긴 디자이너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좋아하는 카라바지오(Caravaggio)의 회화 작품을 후드티에 프린트하거나, 뒤샹의 창작 방식을 디자인 작업에 끌어오거나 하는 식으로 그의 디자인에서는 과거 미술의 영향이 노골적으로 발견되죠. 하지만 미술에 연구적으로 깊이 들어가는 느낌은 아니고, 미술 애호가로서 미술을 자신의 디자인에 활용할 이미지나 개념 재료 정도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세 번째 치트 코드는 멘토에 관한 겁니다.
“당신의 멘토에게 질문하라”
강연에서 버질 아블로가 언급한 멘토는 팩토리레코드의 음반 디자인 등으로 유명한 그래픽 디자이너 피터 새빌(Peter Saville)과, 모더니스트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미니멀리즘 예술가 도널드 저드(Donald Judd)였는데요. 이케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는 르 코르뷔지에의 “집은 주거를 위한 기계이다.”라는 말을 떠올렸다고 하고, 도널드 저드의 말 중에서는 “디자인은 작동해야 하고, 예술은 아니다.”라는 말을 인용해서 소개했습니다.
“또 여러분은 멘토를 가져야 해요. 죽은 사람이든 살아있는 사람이든 말이죠. 여러분은 작품 혹은 어떤 사상과 미학을 공식화한 누군가와 연결되어야 하고, 그들에 근거해 자신의 것을 구축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여러분에게 해주지 않을 말은, 당신이 우러러보는 그 사람이 자신을 발명해낸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일단 하나의 사상 과정을 배우면, 여러분은 실제로 그 속에서 자신을 보고 그것에 더할 수 있게 됩니다. 제게는 르 코르뷔지에가 그런 인물이었어요.”
“도널드 저드는 제게 아주 중요한 또 한 명의 인물입니다. 특히 형태적 측면에서요. 저 자신의 미학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사물이 취하는 전반적인 형태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선호하는 사고 과정과 미학을 확실하게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일단 자신이 어떤 미학을 사랑하는 이유의 정신을 알게 되면, 더 깊이 파고들게 될 거예요. 제가 이것저것을 참조하곤 하는 이유가 그겁니다. 저는 앞서 있었던 위대한 순간들을 알아보는 게 부끄럽지 않습니다. 하지만 뭐든 2017년으로 가져온다면 그건 달라야 해요. 집단으로서 동의할 만해야 합니다.”
멘토에게 어떤 종류의 질문을 하느냐는 물음에는 이렇게 답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여러분의 작품을 편집하게 하는 거예요. 디자인에 틀린 답은 없지만, 올바른 편집 방법은 있습니다. 거친 방식으로 편집하는 걸 생각하진 마세요. 커뮤니케이션 예술 연습으로 보는 거예요. 본질적으로 디자인은 그런 겁니다. 제가 머릿속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으면, 저는 그것을 이 무생물 사물에 집어넣습니다. 그걸 연습으로 삼고 말이죠.”
많은 디자이너가 다른 누군가의 훼방 없이 온전히 자신의 의도대로 디자인이 구현되기를 원하지만, 버질 아블로는 적절한 피드백과 그에 대한 반응까지를 디자인의 자연스러운, 나아가 본질적인 과정으로 봅니다. 그리고 디자인 과정에서의 커뮤니케이션 연습을 중시하죠. 그는 이런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에 매우 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드디어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나이키 <더 텐> 프로젝트에 대한 소개가 나오는데요. 몇 가지 재미있는 언급이 있습니다.
“나이키는 10개의 아이콘에 대해 새롭게 접근하는 작업을 제게 위임했습니다. 저는 거의 학생처럼 어떻게 해서 신발 모델을 만들지 생각했어요. 나이키의 제품들은 전자레인지에서 나온 것 같은 느낌인데 그게 정말 좋아요. 너무나 완벽하게 짜여 있죠.”
“이건 첫 번째 일러스트레이션인데요. 저는 이랬습니다. ‘이런 느낌이지만 뭔가 최신의 어떤 것이었으면 좋겠어.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저는 나이키가 제게 자신들의 아이콘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부탁한 것에 큰 책임감을 느꼈어요. 여러분들이 나이키를 생각할 때 바로 ‘에어’라고 말하는데요. 그건 전반적인 정신이 바탕을 두는 큰 부분입니다. 그리고 저는 순진한 질문을 했어요. 신발 하나를 손에 쥐고 이렇게 말했죠. ‘이 에어 조던에 에어 포켓이 있나요?’ 그게 그렇다고 말을 해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볼 수도 없었고요. (...) 그래서 커터 칼을 들고 그 바닥에 꽂고 이렇게 말했죠. ‘저는 제 언어로 “에어”라고 써서 그 정신을 강화할 겁니다.’ 이런 공정 중 접근법으로 우리는 절반만 완성된 신발을 만들어냈습니다.”
“저는 법무 부서를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불가능한 제품을 만드는 걸 좋아합니다.”
“그때 이렇게 말했어요. ‘제게 신발은 신발이 아닙니다. 그걸 신발로 보고 접근하고 있지 않아요.’ 그게 제가 작은 열린 공간을 발견한 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신발을 하나의 사물로 보고 있었어요. (...) 이 신발들이 갖게 되는 순간 이미 사용된 느낌이길 바랬습니다.”
꼼꼼한 아카이빙으로 유명한 버질 아블로는 2018년에 나이키 <더 텐> 프로젝트를 종료하고 나서 그 모든 과정을 기록한 258페이지 분량의 pdf를 공개했습니다. <더 텐> 프로젝트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한 분들은 이 텍스트북을 체크하는 것도 좋겠네요. (링크를 방문하면 무료 다운로드가 가능합니다.)
강연에서 그는 자신의 작업 방식을 이렇게 소개하기도 합니다.
“지그재그 접근법은 새로운 공간을 찾는다. 선형적인 생각은 지난 제품들의 카피를 야기한다.”
“이게 제가 작업하는 방식이에요. 선형적으로 작업하면 여러분은 여력을 지닐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하세요. (...) 그 사이의 공간이 여러분이 문제 해결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을 제공합니다. 그래서 제가 한 번에 그렇게 많은 것들을 작업하는 거예요. 저는 허구한 날 그냥 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건 건강에 좋지 않아요.”
한 번에 한 프로젝트에만 집중하고 그게 완료되고 나면 다음 프로젝트로 넘어가는 방식이 아니라, 여러 프로젝트를 오가며 어떤 한 프로젝트에 관한 생각이나 과정이 다른 프로젝트에 영감과 영향을 주는 방식인데요. 이 방식이 누구에게나 효과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버질 아블로처럼 왕성한 창작욕을 지닌 디자이너라면 결과에서 큰 차이를 야기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케아와 나이키에 이어서 오프화이트의 2018 S/S 시즌 여성복 컬렉션이 소개되는데요. 이 컬렉션은 다이애나 왕세자비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죠. 파파라치가 촬영할 때 방해받도록 파파라치를 고용하는 황색 언론사들의 로고 모양을 한 지갑을 만드는 아이러니한 아이디어 같은 건 흥미롭습니다.
“오프화이트에 관해 얘기해 보자면, 저는 전통 패션을 모르기 때문에 그걸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카라바지오 이미지가 들어 있는 후드티의 파이렉스로 시작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잘 이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후드티와 티셔츠에 제약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건 헌정 쇼였어요. (...) 그녀는 지구 상에서 가장 많이 사진 찍힌 여성 중 한 명이고, 현대적 복장의 뮤즈였죠. 당시엔 인스타그램이 없었습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살아있는 신데렐라였죠. (...) 뉴스 타블로이드를 가져다가 어떤 버전의 그래픽 티셔츠를 만든 겁니다. 로고는 지갑이고요. 이 사고 과정은 저의 가장 진보된 개인적 패션 콘셉트 중 하나였어요. 파파라치 잡지가 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면 뭘까요? 경쟁사 홍보하기죠. 그게 이 핸드백들의 전반적인 정신이었어요.”
“이건 스트리트웨어. 뭔가 진보된 것으로서 주장하려고 하는 저의 예술 운동이죠. 이 아이디어는 제품이 당신을 웃게 만드는 거예요. 약간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를 스트리트웨어 1.0에 한정시키지 않기도 할 거고요.”
마지막으로 두 가지 치트 코드 슬라이드가 등장하지만, 이건 간단하게만 발췌해 보고 넘어가도 될 것 같습니다.
유사성을 밝히고 그게 작동하는지 볼 것
“여러분의 사고 과정은 여러분들이 생각지도 못한 것들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 제가 깨달은 건, 심지어 대화에서조차도 유추는 디자인적인 의미에서 우리에게 효과가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동일한 도구를 다른 재료들에 사용할 수 있고, 다른 결과물에 도달할 수 있어요. 명심하세요.”
“당신 자신을 여기에 넣어 보세요”
“마지막으로, 제 입장이 되어 보세요. 이런 조명이 제게 주어지다니 정말 이상해요. 전 그렇게 특별하지 않거든요. 여러분들은 풍부한 자원이 있습니다. (...) 여러분의 목표에 대한 내부 척도가 뭔지 저는 모르지만, 여러분은 아주 끝내주고 훌륭한 시대에 태어났어요. 제 생각에 지금은 르네상스입니다. 모든 게 형편없고, 세상은 끝장날 거야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마세요.”
끝으로, 강연 후 이어진 짧은 질의응답 중에 나온 답변 두 가지를 발췌해 보면 이렇습니다.
“연습 일과는 어떻게 되나요?”
“저는 창의력을 기르기 위해 눈을 훈련했어요. 인용구를 가지고 제가 지금 하는 게 바로 그거예요. 여러분의 눈이 평소에 볼 수 없을 것들을 억지로 보게 하는 무작위 활동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저는 한 번에 13가지 것들을 반복할 수 있고, 빠르게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디자이너로서 당신의 결정적인 순간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어요?”
“사실 ‘아하’하는 순간은 없습니다. 저를 가장 화나게 한 게 그거예요. 오늘날까지도 저는 저 자신을 디자이너라고 부르는 걸 꺼리는데요. 항상 디자이너는 저 같은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에요. 그건 제 가장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이건 제가 전하고 싶은 중요한 메시지인데요. 대부분의 장애물은 스스로 자초한 거예요. 그건 정말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실패란 건 없어요.”
“‘잠깐, 난 그냥 작품을 내보내 버릴 수 있어. 그게 좋으면 효과가 있을 거고, 나쁘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더 잘할 수 있겠네.’ 그러고는 어떤 친구나 브랜드와 만나면 이러죠. ‘이봐, 내가 아이디어가 떠올랐어.’ 이게 현실입니다. 저는 여기로 날아와서 그저 몇 마디만 하고 싶었어요. 바라건대 여러분들이 이것들을 활용하길 바랍니다.”
2018년 시점에 버질 아블로는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앤트워프왕립예술학교나 센트럴세인트마틴스 같은 패션 엘리트 코스를 밟고 성공한 디자이너도 아니고, 아예 제도권 교육 경험이 없는 아웃사이더 아티스트 형 디자이너도 아닌 특이한 케이스이니까요. 대학에서는 건축을 전공하고, 이후에는 현대미술의 개념을 가져다가 스트리트웨어에 적용하면서 21세기 스트리트웨어의 아이콘이 되고, 결국에는 유러피언 하이패션 브랜드에 아티스틱 디렉터로 입성하기까지 한 자취는 확실히 남다른 구석이 있습니다. 이 강연은 버질 아블로라는 이 독특한 캐릭터의 디자이너가 어떤 식으로 창의력을 발휘하고 활약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볼 유용한 기회였는데요.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적어도 창작을 위한 에너지는 전해주는 인상적인 강연이었습니다. 많은 분이 자신의 디자인 언어는 무엇인지 새삼 정리해 보게 할 것 같기도 하네요.
P.S.
관심이 있는 분들은 이 강연을 기록한 영상을 유튜브에서 찾아보시거나, 책을 읽어 보시면 좀 더 완전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또, 이 강연에선 간략하게만 소개됐지만 엄청난 작업량을 자랑하는 그의 작품들을 알아보고 싶은 분들이라면 2019년 시카고현대미술관에서 열릴 전시나 그 도록을 기대해 볼 수 있겠고요.
이 글은 2017년 하버드디자인대학원에서 있었던 버질 아블로의 강연 <Insert Complicated Title Here>을 녹화한 영상과, 2018년 스턴버그 프레스와 하버드디자인대학원이 공동 발행한 동명의 책을 참고했습니다. (상당히 거친 아마추어 번역이므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한 경우 원문을 대조해 보시길 권합니다.)
원문 작성: 2018년 10월 티스토리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