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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ontypist Sep 16. 2021

버질 아블로 <여기에 복잡한 제목을 넣을 것> 1/2

버질 아블로(Virgil Abloh)의 하버드디자인대학원 강연

이 글은 2017년 하버드대학교 디자인대학원에서 있었던 버질 아블로(Virgil Abloh)의 강연 <여기에 복잡한 제목을 넣을 것(Insert Complicated Title Here)>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내용이 짧지 않기 때문에 두 편으로 나눠 올립니다.



디자인과 패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버질 아블로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겠지만, 좀 더 친절하게 소개하고 넘어가자면, 이 강연을 기록한 동명의 책에 실린 그의 소개를 번역, 인용해 볼 수 있겠습니다.


“1980년 일리노이주 락포드에서 태어난 버질 아블로는 아티스트이자 건축가, 공학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디자이너다. 그는 위스콘신-매디슨대학교에서 도시공학 학위를 취득한 뒤, 일리노이공대에서 건축 석사과정을 마쳤는데, 그곳에서 디자인 이론만이 아니라 협업의 개념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다. 버질 아블로의 브랜드 오프-화이트 c/o 버질 아블로™는 2012년 파이렉스 비전(PYREX VISION)이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시작되었다. 2013년, 이 브랜드는 시즌별 남성/여성 패션 레이블을 출시했고 가구 제작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아블로는 자신의 작품 전시를 큐레이팅하는데, 2019년에는 시카고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가질 예정이다. 2018년에 아블로는 루이 뷔통 남성복 컬렉션의 아티스틱 디렉터를 맡게 되었다.”



이 강연에서 버질 아블로는 자신의 디자인 작품들을 쇼케이스 형식으로 소개하기보다는, 지난 10여 년간 다양한 영역에서 맹활약한 디자이너로서, 곧 디자인 분야에 뛰어들게 될 이들에게 어떤 태도와 생각을 하고, 어떤 방식으로 활동하면서 발전해 올 수 있었는지에 관한 조언을 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학생이었을 때 누군가 약간의 조언을 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이를테면 ‘너의 남은 사회생활은 고된 싸움이 될 거야.’ 대신에 ‘네가 택할 수 있는 이런 지름길들이 있어.’ 같은. 이 발표는 전반적으로 그런 것에 관한 얘기입니다.”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몇 가지 조언들은 이런 빨간 슬라이드로 강조되는데요. 그는 이걸 “치트 코드”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가 제시한 첫 번째 치트 코드는 바로 이것, “당신의 시그니처는 무엇인가?”입니다. 


“저는 자기고양적인 방식으로 과열된 상태로 일합니다. 그저 제 시그니처를 찾기 위해서요. 제 DNA가 뭐냐고요? 제가 존경하는 건축가, 디자이너, 미술가에게는 모두 회화든 건물이든 자신의 작업을 관통하는 선을 지니는 시기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여러분이 처음으로 자신의 옷장을 정리했던 방식이나 가장 좋아했던 색상들처럼, 너무 많이 배우기 전에 여러분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되짚어 보세요. 그게 여러분 DNA의 출발점이에요.” 


개인적인 시그니처를 묻는 이 질문에 대한 일종의 예시처럼 버질 아블로는 자신의 “개인적 디자인 언어”를 소개했는데요. 이건 아마도 이 자리에 모인 관객들이 그에 대해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부분이었을 겁니다. 이 강연의 핵심이라고 할 수도 있고요. 그는 자신의 디자인 언어를 다음의 일곱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1. 레디메이드 (인간적인 감정, 아이러니 같은 인식 가능한 부분들에 기반하는 새로운 아이디어)

“저는 뒤샹에, 레디메이드에 엄청나게 사로잡혀 있는데요. (...) 여러분은 새로운 어떤 것을 발명하려 애쓰고, 또 아방가르드가 되고자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그건 불가능합니다. 이건 일을 하는 동안 알게 된 것들인데요. 디자이너이자 예술가로서 우리는 우리 이전의 많은 반복의 결과로 존재하고, 이 집단은 같은 방향을 향해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장 강조하는 첫 번째는 “레디메이드(기성품)” 개념입니다. 그리고 그 개념을 100년 전에 제안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는데요. 적어도 1960년대 이후의 창작자들이라면 더 이상 완전하게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특별하게 여기진 않겠지만, 여기서 굳이 뒤샹과 레디메이드를 언급하는 건, 그가 일반적으로 공유된 개념 이상으로 뒤샹의 레디메이드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그것을 또 적극적으로 자신의 디자인에 반영하고 있다는 얘기겠죠. 사실, 버질 아블로의 몇몇 디자인은 뒤샹에게 영향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뒤샹이 디자인한 것처럼 보일 정도인데요. 모르긴 해도 그가 디자인할 때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요? “뒤샹이 후드티를, 핸드백을 디자인한다면 이렇게 하지 않을까?” 이건 2번과 연결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2. “비유적 표현” 또는 “인용”

“2번은 제게는 좀 지겨워지고 있지만 계속 사용 중이기에 익숙한 그런 건데요. 인용해서 말하는 것 말이에요. 이건 기본적으로 유머죠. 많은 사람이 웃는, 그리고 대화를 통해 인간성을 부여하기 위한 핵심 도구입니다. 또 대중적인 트렌디 아이템보다 빈티지가 더 쿨하게 여겨지는 우리 분야는 분명히 아이러니한데요. 놈코어, 케이홀, 아메리칸 어페럴이 아주 적절한 근거죠. (...) 가장 뒤샹적인 버전으로 아이러니하게 하고자 하는 제 방식은 인용을 통해 말하는 거예요. 그게 제가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할 수 있으면서도, 비유적이고 엄밀해질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키보드로 디자인할 수 있어요. 포토샵이나 다른 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뭐 그렇다는 거예요.”  


오프화이트 하면 떠오르는 디자인 특징 중 하나는 “Air”, “Sculpture”처럼 인용 부호 속에 들어 있는 자기지시적인 단어들인데요. 두 번째로 언급하는 내용이 그런 아이디어에 관한 겁니다. 이런 방식은 조지프 코수스(Joseph Kosuth) 같은 초기 개념미술가들의 좀 순진해 보이는 작품들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죠. 물론 이쪽은 농담의 뉘앙스가 뚜렷하다는 차이가 있지만요. 키보드만으로도 디자인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너스레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런 방식은 미술 작가적인 제스처를 굳이 남기지 않고 언어적인 미술 창작을 시도했던 1960~70년대 개념미술가들의 접근법을 따른다면 누구든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되는 선택에 가깝습니다. 버질 아블로가 뛰어난 점은 누구나 현대미술사 교재에서 볼 수 있는 이런 개념과 방식을 2010년대의 동시대 패션/디자인에 적용할 생각을 했다는 거겠죠. 그것도 미묘하게 녹여내는 게 아니라, 그 순수함을 그대로 가져와서 일종의 레트로로서 트렌디하게 활용했던 것이 절묘했습니다.


3. 3% 접근법

“저는 3% 접근법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은 원본 형태로부터 3%의 뭔가를 수정하는 것에만 흥미가 있어요. 전 피곤합니다. 너무 늙었나 봐요. 저는 살짝 수정되었을 때 흥미로운 어떤 것들을 발견합니다. 이 신발들처럼 말이죠. (연단에 나이키 신발들을 올려 둠.) (...) 이건 새로운 것이지만 저는 자신을 억제하고 딱 3%만 수정하는 데에 관심이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를 원치 않기 때문이에요. 제가 이미 봤던 신발을 인식시키는 뭔가를 보고 싶습니다.”


일곱 가지 항목 중 가장 인상적으로 보이는 이  “3% 접근법”도 결국은 앞의 두 항목과 같은 맥락에 속하는 얘기죠. 완전히 새로운 뭔가를 만드는 게 아니라 기성품의 형태를 3%만 바꾸는 것. 이런 종류의 디자인은 최종 결과물의 독립적인 시각적 매력 이상으로, 그 창작의 배경이 되는 원본과의 차이나 관계를 인식하는 데서 오는 개념적 매력이 강력합니다. 개념적 성격이 강한 미술 작품의 감상에서 그렇듯, 레퍼런스에 대한 인지 여부가 영향을 미치게 되겠죠.


4. 두 가지 유사하거나 다른 뚜렷한 개념 사이의 절충

“오프화이트는 기본적으로 필명처럼 약칭 같은 건데요. 제가 항상 두 가지가 전혀 다른지를 비교해 본다는 걸 상기시킵니다. 럭셔리와 스트리트웨어 같은 것 사이를 말하는 약칭이랄까요. 그게 어떤 드레스가 완성됐는지 아닌지, 티셔츠 그래픽 작업을 마친 건지 아닌지 제가 결정하는 방식입니다. 측정 막대 같은 내부 장치죠.”


사실  이 네 번째 항목은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기 때문에 설명이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의 디자인이 서로 다른 어떤 두 가지의 관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어떤 지점을 찾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이패션과 스트리트웨어 사이의 어딘가에 자리하는 옷, 실용적인 가구와 개념적인 미술 오브제 사이의 어딘가, 이런 식의 조율을 하고 있는 거죠.


5. “재공품”의 표식들 - 다시 인간 상호작용

“저는 재공품을 좋아합니다. 하나의 인간적인 요소니까요. 완벽주의자가 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 저는 갑자기 한꺼번에 백만 가지 것들을 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밤에는 자러 갑니다. 이게 중요해요. 완벽주의자가 되려 한다면 전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을 겁니다. 자신의 손과 머리를 믿고, 완료했다는 걸 자신에게 알려주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서 합리화를 할 수 있겠죠.”


‘재공품’은 생산 공정이 마무리되지 않은 미완성 제품을 말하는 건데요. 여기서는 완벽주의에 반하는 개념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건 제작에 대한 태도라기보다는 미학적인 태도라고 보는 게 맞겠죠. 디자이너로서 대량생산이 가능하도록 완성될 제품을 작업하면서 만듦새가 떨어지도록 둔다는 얘기가 아니라, 기계적으로 매끈하게 마무리된 일반적인 결과물의 형태와 차별하기 위해, 불완전한 상태의 낯설고 ‘인간적인’ 뉘앙스를 부여하도록 의도한다는 겁니다. 네 번째 항목을 참고한다면, 재공품 역시 과정과 결과의 사이에서 그러한 매력을 발휘할 절묘한 지점을 찾고, 이를 위해 정상적인 제작 과정 중 의도된 단계에서 멈추는 것을 뜻하는 걸로 이해할 수 있겠네요.  


6. 사회적 언급 - 이제 빠져나갈 이유를 갖는

“6번은 ‘우리에게 또 다른 신발이 더 필요한가? 뭐든 다른 게 더 필요한가?’라는 질문들로 다시 돌아가는데요. 모든 결과물은 존재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쓰레기통과 재활용 쓰레기통을 가지고 있는 이유죠. 과소비는 전혀 괜찮지 않습니다. 디자이너로서 우리는 사상가예요. 우리는 이 모든 세대 결정들에 도전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 항목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지만 그건 미학적 관점에 가깝고, 이건 사회적 맥락이죠. 이미 기본적인 필요가 충족되는 세상에서 환경에 해를 끼치면서까지 어떤 제품을 더 내놓을 필요가 있는가 하는 고민인데요. 특히 기본적인 생활 이상의 소비를 유발하는 트렌디한 제품에 관여하는 디자이너라면 더 의식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기본적으로 패션 분야에 중점을 두는 디자이너임을 생각하면 그냥 ‘이런 문제를 생각은 하고 있다.’ 이상의 의미를 둘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7. 관광객과 순수주의자 양쪽 모두에게 말하기

“이건 관광객과 순수주의자가 어딘가에서 만나는 그런 것과도 같은데요. 제가 대학가에 가는 걸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보스턴에 얼마나 다양한 지식이 있을지 생각해 봐요. (...) 하지만 세상에는 좋은 영향을 미치는 실제 인물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과 교류하지 않는다면 결국 디자인은 자급자족이 될 거예요. 이건 제 작업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대학에서 전공으로서 공부하며 체득하게 되는 디자인 개념과 인식, 태도 등에 갇히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인 듯합니다. 대학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디자이너일수록 상업 문화의 실무 현장에 적응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죠. 문화 지향적이고 비평적인 아카데믹한 디자인과, 상업적이고 현실적인 기업의 실무 디자인의 간격은 상당하니까요. 고급이지만 고도로 상업화된 종류의 디자인을 주로 해오고 있는 버질 아블로는, 이 둘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완전히 치우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현실과 거리를 둔 채 디자인 자체에 대한 비평에 집중하는 자기지시적인 디자인에만 머무는 것과, 주류 상업 문화에서의 흐름에 비판 없이 따르는 것, 이 모두를 경계한다는 것이죠.


버질 아블로가 소개한 이 “개인적 디자인 언어”는 그의 디자인 관점과 태도를 파악하는 데에 유용한데요. 강연에서 그는 디자이너라면 이렇게 자신의 디자인 언어를 정리해 보라고 권하기도 합니다. 물론 갑자기 책상 앞에 앉아서 “이런 걸 하겠어!”하고 선언할 수는 없겠죠. 일정 수준 이상의 경험이 쌓이고 나서 자신이 각각의 과업들에 어떻게 대처해왔는지를 돌이켜 볼 때 발견되고 정리될 수 있을 겁니다.


** 다음 포스팅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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