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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전소 Jul 30. 2020

재판의 판결문을 본 적이 있나요?

사립학교 정교사로 살아남기 9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


10개월과 2년은 중요하지 않다. 학교의 관리자들과 가해자가 그렇게 부르짖던 결백함이 결국 거짓이었음을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인정해주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피해자는 성희롱을 당했다는데 관리자들은 성희롱을 당한 것이 맞냐는 식의 태도로 피해자를 궁지에 몰았다. 그들은 피해자를 돕는 나 또한 편파적이라는 프레임을 씌웠고 그러므로 내가 하는 말은 귀담아듣지도 않았다. 그런 그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공식화시키는 데만 들인 시간이 무려 747일이다. 





나는 이들을 싸잡아서 내 앞에 불러다 앉혀놓고 의기양양하게 외치고 싶었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그렇게 아니라고 발뺌하더니. 
꼴좋다!



재판 결과를 들었을 때, 선생님에게 친구의 나쁜 짓을 일러바친 꼬마처럼 순간 후련했지만 나는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시간이 많이 흘러 혹시 잊은 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이들은 우리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지하철에서 옆사람 발을 밟으면 사과를 한다. 마트에서 계산을 잘 못해도 사과를 한다. 어떤 형태로든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면 사과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들은 나는 물론 피해자에게조차 사과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피해자는 꼬박 747일 동안 고통을 참고 견뎠다. 끝이 보이지 않고 이길 가망도 없을 것 같은 암담함 속에서 그 긴 시간을 버텼는데 이들은 짧고 형식적인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판결문을
보물처럼 들고 와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감개무량한 가슴을 부여잡고 한 글자 한 글자 눈에 박히도록 읽어 내려갔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살면서 판결문을 읽어볼 기회가 흔치 않기에 생소한 단어나 어법이 거슬렸지만 정신을 다잡았다. 


평소 법정 스릴러물을 좋아하는 나는 검사와 변호사의 숨 막히는 법정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곤 했다. 거기엔 쪼잔해 보이기까지 하는 사소한 단서를 근거로 증언이 신빙성이 없음을 주장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나는 현실세계의 판결문을 읽어보고 그것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가해자 측에서 섭외한 증인들의 증언은 시작부터 답정너였는데, 검사는 그 정답을 믿을 수 없다는 근거를 하나하나 제시했다. 


가령 증인이 '가해자는 성추행을 하지 않았다'라고 대답을 했다면 바로 다음 질문에서 그럼 그때 증인은 무엇을 하고 있었냐, 혹은 피해자가 어때 보였냐 등 구체적인 상황을 물었다. 당연히 수개월 전에 있었던 상황이 제대로 기억나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본인과 관련이 없는 상황이니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증인은 그건 잘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다른 건 기억이 전부 모호한데 성추행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기억한다? 바로 여기서 자기모순이 생기고 증언은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다. 


재판은 이런 식으로 가해자 측의 증언을 하나씩 깨부수며 진행되었고 결국 가장 강력한 증거는 피해자의 진술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피해자는 자기가 당한 일이니 기억이 명확할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일관된 주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진술의 일관성'인 것 같았다. 판결문 곳곳에 '일관'이라는 단어가 등장했고 결국 승패를 가를 수 있었던 힘은 피해자의 일관된 진술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었다. 반대로 상대편의 진술은 오락가락이었고 이는 곧 신빙성이 부족한 것으로 비쳤다.



상대 변호사는
증언이 힘을 잃자
다른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업무상 지적을 받은 일로 앙심을 품었다며. 그 앙심으로 인해 별 일 아닌 일을 크게 만든 것이 바로 이 사건이라는 논리를 펼치면서 피해자를 다시 한번 흔들었다. 그러나 그 둘이 함께 근무를 한 기간은 채 2개월도 되지 않았다. 설령 그 사이에 업무상 실수가 있었다 해도 피해자는 수습기간이니 할 말이 있었다. 


그러나 해명을 하기도 전에 재판부에서는 상대의 조급함을 간파했다. 하다 하다 이런 것까지 끌어다 붙이냐는 의미를 행간에 숨긴 채 판결문은 점잖게 막을 내렸다.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는 가해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아직도 억울하다고 생각할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분노는 이쪽보다는 학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문제는 이쪽에서 제기한 것이 맞지만 일을 이렇게까지 크게 만든 것은 학교가 제대로 대처를 못했기 때문이다. 사안이 진행 중일 때도 그는 계속해서 합의를 원했고 원만하게 해결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학교의 관리자들 탓에 적절한 타이밍을 놓쳤고 오해는 커져버린 것이다.


나 또한 이미 오래전부터 가해자보다는 학교가 더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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