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를 시청하고
'이퀄리즘 같은 소리 하네.' 1화를 틀자마자 들었던 생각이었다.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에서는 시작부터 참가자 각자의 정치적 성향을 네 가지 지표로 드러내고 있다는 설명과 함께 좌파/우파, 페미니즘/이퀄리즘, 서민/부유, 개방/전통을 그 척도로 보여줬다. 그 순간 들었던 회의감이란. 내가 이 따위 말을 현실에서 혹은 인터넷에서 접해온 것으로도 모자라서 여가시간에 티브이로까지 봐야 하나? 짝꿍은 나를 달랬다. 이게 모두가 보기 '불편'하지 않은 언어를 만들기 위해서 고심을 한 결과일 거야. 아니, 고심한 것은 알겠는데, 그걸 내가 왜 봐야 해?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실 이 프로그램의 구석구석에 담겨 있었다.
이 글에는*『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다. 감상할 예정인 분들은 글을 읽는데 주의하시길 바란다.
제목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상검증구역이라니. 사상검증이라면 진절머리부터 난다. 일상생활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검증을 당하고 있는가? 불과 이번 여성의 날에도 나는 같이 일했던 동료로부터 "빨갱이 페미 단체에 왜 가셨어요. 선생님은 '페미'가 아니잖아요."라는 말을 들었다. 무언가 모를 그의 '사상검증'을 내가 통과한 모양이지만 그 사실이 전혀 기쁘지 않다. 제가 왜 '페미'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거 참. 갑자기 삶을 반성하게 되고 막 그런다. 사상검증이란 통과를 해도 통과를 하지 못해도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의 기분을 이렇게 황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밥벌이가 걸린 사상검증은 또 어떻단 말인가. 각설하고.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거절하기에는 단톡방에 있는 다른 친구들의 반응이 호의적인 것이 못내 걸렸다. 돌이켜보면 내 안에, 내 친구들의 '이념'이 어떻길래 이 프로그램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사상검증'을 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평소라면 절대 보지 않을 서바이벌 예능을 그렇게 보기 시작했다.
'이퀄리즘 같은 소리 하네.' 1화를 틀자마자 들었던 생각이었다.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에서는 시작부터 참가자 각자의 정치적 성향을 네 가지 지표로 드러내고 있다는 설명과 함께 좌파/우파, 페미니즘/이퀄리즘, 서민/부유, 개방/전통을 그 척도로 보여줬다. 그 순간 들었던 회의감이란. 내가 이 따위 말을 현실에서 혹은 인터넷에서 접해온 것으로도 모자라서 여가시간에 티브이로까지 봐야 하나? 짝꿍은 나를 달랬다. 이게 모두가 보기 '불편'하지 않은 언어를 만들기 위해서 고심을 한 결과일 거야. 아니, 고심한 것은 알겠는데, 그걸 내가 왜 봐야 해?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실 이 프로그램의 구석구석에 담겨 있었다.
기실, 다양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대화를 시킨다는 포맷 자체가 신선하니 나도 보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 아닌가? 어떤 개판이 벌어질지, 혹은 얼마나 세련된 토론이 오갈지 궁금해서. 그런 우리들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논란이 될만한 주제를 던져주고 밤중에는 익명 채팅까지 시킨다. 그야말로 사회, 국가, 혹은 어떤 공동체의 탄생을 함께하는 느낌이었다.
서로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쨌든 붙어 앉아서 이야기를 하게 되지 않나? 방금 전까지 머리 맞대고 이야기한 사람을 적대시할 수 있나? 그러기는 쉽지 않다. 이런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슈퍼맨이 <혼자서 볼링 하기: 미국 커뮤니티의 몰락과 부활>이라는 책에 대해서 언급한다. 미국에서는 볼링장에서 함께 볼링을 치며 어쨌든 사람들이 섞여서 대화를 하고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왔는데, 그게 사라지게 되었다고.
우리는 지금 굉장히 파편화된 세계에 살고 있다. 가족 단위로 쪼개지고, 알고리즘으로 개인화되어서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법을 점점 잊어버리고 있는 그런 세상인 것이다. '평화적인 대화'를 위한 약속이라며 '정치와 종교처럼 민감한 주제는 빼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예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우리의 일상에서 중요한 축을 차지하는 신념을 제외한 대화가 우리의 무엇을 드러낼 수 있을까? 조금 어렵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신념을 드러낼 수 있도록 연습하는 것이 더 건강한 커뮤니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을까?
물론, 이 프로그램에서도 직접적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며 말하는 장면은 드물게 나온다. 타인과의 대화장면보다는 안전한 제작진과의 인터뷰장면에서 훨씬 많이 드러나는 편이다. 하지만 교차적으로 편집이 되는 인터뷰 장면들을 통해서 우리는 출연자 한 명 한 명의 행동과 마음에 대해서 이해하게 된다. 나와는 다른 정치적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해하게 만드는 그 지점의 출발선은 역시 개개인의 생각을 드러내는 발화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끝까지 다 본 뒤에 사람들이 남긴 코멘트를 찾아서 한참 읽어봤는데, 그런 말이 기억에 남았다. 나와 정치색이 같은 사람들만 지지하게 될 줄 알았는데, 끝나고 나니 정치색이 전혀 다른 사람들의 팬이 되어있었다고. 나 역시 그랬다. 어떤 사람 개인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데에는 정치색이 그렇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나에게 '빨갱이 페미 단체 간 것 보고 앞으로 연락 안 하려 했어요.'라고 하시는 선생님도 어쨌든 내가 놀러 갈 때마다 따뜻하게 환대해 주시는 것은 우리가 쌓아온 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튼튼한 관계가 쌓였을 때 각자 자신의 정치색을 또렷하게 빛낼 수 있는 튼튼한 민주주의 커뮤니티가 성립될 수 있다는 생각은 이 예능을 본 뒤에 더 강해졌다.
이 프로그램은 전반에 걸쳐서 미니 정치를 다뤄낸다. 세금과 공무원, 국책사업, 작은 정부와 큰 정부, 선거, 이주민 문제, 언론과 정치, 재판(보다는 법과 감정?)과 같은 문제들이 어렵지 않게 녹아들어있어서 재미있게 보여준다. 어느 정도냐면, 나하고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싸움이 나는 내 동생조차도 이 예능은 재미있게 봤다는 평을 남길 정도였다.
사실 정치 이야기는 일상에서 떼려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내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라는 단어만 들어도 알레르기 같은 반응을 일으킨다. 그런 어려운 건 난 몰라, 난 관심 없어. 그거 맨날 싸우고 그러는 거 아니야? 너 또 어려운 소리 하려고 그러지? 그래도 나는 투표는 해.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 일상에서 수많은 결정을 내리는 것들이 사실은 다 정치라고 재미있게 알려주는 듯한 예능이었다.
나는 사람은 재미를 쫓는 존재라는 호모 루덴스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나 자신도 나를 정의할 때 한 축을 보드게이머라고 놓기도 할 정도다.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희에서 찾는 시대가 도래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를 유희를 통해 알려주려는 이런 시도도 정말 값진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내 감탄했다.
특히, 초반에 나왔던 페르미 추정 게임 중에서 여성에 대한 강력범죄의 개수를 추정하는 문제에 대해서 정말 놀랐다. 여성문제를 토론하면서 이 통계를 들고 나오게 되면 정말 별의별 대꾸를 다 접하게 된다. 이미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 통계가 정말 믿을 수 있는 게 맞는지부터 시작해서, 이 통계가 가진 의미가 그래서 무엇이냐는 질문 같이 쓸데없는 대화에 진을 엄청 빼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게임 속에서 이 통계를 녹여냈을 때 사람들은 이 통계를 맞추고 정답을 알기 위해서만 심혈을 기울이게 되지, 그 외의 정보값에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정보가 공개되었을 때에는 순수하게 와, 정말 큰 문제구나. 하는 감정만 남게 되는 것이다. 게임을 이용해 사람의 마음에 정보를 자리 잡게 하는 고도의 트릭이 아닐 수 없다.
세금 문제도, 이주민 문제도 내가 감정 이입을 하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입장에서 '상금'을 벌어가고 싶다는 게임성을 가지고 생각을 하게 되니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감각은 옅어지고 재미있게 체험해 볼 수 있었던 측면이 정말 좋았다. 나중에 내가 아이를 키우게 되었을 때 정치에 대한 것을 알려준다면 같이 보고 이야기 나누고 싶어지는 그런 고전 명작 예능으로 남지 않을까라는 상상도 해보았다. (웨이브가 그때까지 살아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외에 흥미진진한 전개를 전부 쓸 수는 없지만, 10회에서 있었던 출연자들의 15분짜리 인생스피치가 가장 인상 깊었다. 나와 내 짝꿍 둘 다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며 한껏 감정이입을 하면서 보았다. 이미 떨어져서 인생스피치를 듣지 못한 출연자들에 대한 아쉬움이 조금 남기도 했다. 특히 하마님이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어떤 인생스피치를 들려주었을지 궁금했다.
인생 스피치에서는 각 개인의 '사유하기'가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각 키워드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생각해 보았는가, 그것을 자신의 인생과 얼마나 연결 지을 수 있었는가. 나는 최근 피스모모 평화교육 진행자 공부모임에서 한나 아렌트를 일부 읽었는데, 거기서 '사유하기'에 대한 글을 작성했다. 그리고 함께 공부모임을 하는 톨님으로부터 '진선님의 글에는 경험이 사유와 연결되어 있어서 좋았어요. 우리의 교육에서 사유가 사실 이렇게 연결되어야 하는데, 자신의 경험과 연결 짓지 못하는 경우가 흔한 것 같아서 아쉽네요.'라는 말씀을 들어서 굉장히 기분이 좋았던 것이 떠올랐다. 어떤 출연자의 인생스피치는 기억에 오래 남고, 어떤 출연자의 인생스피치는 겉도는 말로 끝나는 것 같았던 것은 그런 지점이었을 거다. 내 것을 가지고 와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낼 수 있었는가 아닌가.
우리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꺼리거나, 좀 물질적인 것으로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자기소개를 할 때에도 이름과 직업, 어디에 사는지, 국적은 무엇인지와 같은 것으로 드러내는 식이다. 사상검증구역: 더커뮤니티 10화를 보면서 사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이고, 어떤 것을 원하는 사람인지를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한참 생각해 보았다. 이것은 사람을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혀 모르는 타인과의 연대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주는 발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스모모에서 하고 있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는 일단 한 반에 있는 참여자 전체가 어떤 식으로든 대화를 전부 해보게 유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일단 한번 대화를 해서 서로 '알고' 나면 서로 대화를 하기 이전으로, 서로를 몰랐던 때로, 완전히 남이었던 때로는 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이해한 상대를 완전히 타자화 하고 악마화해서 괴롭히기 어렵다. 그 원리를 이용해서 학교폭력예방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서로 눈을 맞추고, 대화를 나누고, 알아간 다음에 우린 남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개개인이 늘어난 사회는 보다 안전한 사회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에서 계속 찾고 있었던 '모두가 안전한 사회'라는 유토피아가 당장에 오지는 않더라도, 차근차근 한 스텝씩 밟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서로 남이 아닌 사회 정도는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폭력들을 예방하다가 더 나아가서는 우리 모두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 이를테면 전쟁-을 막아낼 수 있는 세상이 100년, 아니면 1000년 뒤에라도 올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