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간 뉴욕에 방문했던 동생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동생이 떠난 쓸쓸한 마음자리를 메꾸기도 전에, 유성애자들의 "상냥한 공격"이 침범해 들어왔다. 그들의 공격은 나를 진심으로 염려하며 나의 쓸쓸함을 이해해준다는 점에서 "상냥"하다. 다만 그들이 제안해주는 대안, 즉 이성애 규범적 결속은 진정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내게 도움이 되는 조언은 아니다. 더욱이, 그들의 제안은 나의 불안을 다독이기는커녕 증폭시키는 오싹한 힘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그들의 상냥한 조언이 "상냥한 공격"으로 변모하는 이유는 내가 나로 인식하는 나를 갉아먹어 들어가기 때문이다. 무성애자로 정체화한 지 몇 년이 지나 스스로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가는 단계를 거쳤다고 생각이 드는 나지만, 그들의 조언(혹은 공격)은 나에 대한 불확신, 혼자 남겨지는 두려움, 죽음에 대한 불안만을 안겨주고야 만다. 그들이 원하는 '나'가 나는 될 수 없기에. 이성과 상호 배타적 성애 관계를 맺고 아이를 낳고 이성애 규범의 질서 속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내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나라고 상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타카하시의 워딩을 빌리자면) 이런 "모야모야"한 감정을 안고 동생의 흔적을 한바탕 지워낸 뒤, 밀렸던 <코이세누> 마지막 두 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성애자들의 상냥한 공격에 치인 나에게 무성애자를 위한 판타지 드라마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치 로맨틱 코미디가 이성애-유성애자들의 판타지듯이!)
<코이세누>가 판타지로 느껴지는 지점은 나와의 애매한 거리감에 있다. 1화에서는 정말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났다!"라는 강렬한 감정을 느꼈다. 인간관계에서의 거리감을 유성애적 감각으로 생각하지 않아서 겪는 오해, 금방금방 파투 나는 연애사, 나를 아껴주는 주변인의 "상냥한 공격들"... 무엇보다 타카하시와 사쿠코의 외로움에 대한 절절한 고백이 큰 울림으로 다가웠다. 연애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마 혼자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일 텐데, 앞으로 쭉 혼자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이 쓸쓸해진다고 털어놓는 사쿠코나, 나를 키워준 사람과의 이별은 각오했지만, 그래도 혼자 남아서 정말 쓸쓸하다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담담히 대답하는 타카하시에게서 나 스스로를 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정말 타카하시 같은 사람을, 혹은 사쿠코 같은 사람을 만나서 저렇게 서로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너무나 완벽해 보이는 그림이 아닌가? 마치 로맨스 드라마가 정말 "드라마 같은" 사랑을 그리듯, 나에게 <코이세누>는 정말 부럽게도 늘 갈망해오던 그림 같은 가능성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고민하는 것들을 이미 고민하는 주인공들, 그 고민을 서로 보듬으며 헤쳐나가는 모습. 우연으로 다져진 세심한 모형 같은 관계 안에는 현실의 위험과 실질적 어려움은 한편에 치워진 채 드러나지 않는다. 정말 가깝지만 너무나 먼 거리감. 그 판타지에서 충족되는 당사자성은 만족스러웠지만 동시에 한 구석에선 아쉬움도 남았다. 이게 유성애자들이 롬콤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일까?
뿐만 아니라, 사실 이 <코이세누>라는 드라마를 얼마간 잊고 지냈던 것은 (동생이 와서 시간이 없었던 걸 떠나서) 너무나 에이섹슈얼 입문서 같은 내용에 당사자로서 아쉬움을 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무성애를 다룬다는 소식에 정말 고대하던 드라마인 만큼 나는 이 드라마에 꽤나 목말라 있었지만, 1화에서 느낀 감정을 이후의 회차에서는 느끼기 어려웠었다. 무성애자들에게 고난을 주기 위해 설정된 것 같은 유성애자 캐릭터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안 좋은 시나리오들... 마치 <더체어>에서 사립대학 영문학과장이 된 아시아계 여성 싱글맘 지윤을 덮치는 모든 연쇄적 이벤트들처럼, <코이세누>에서도 내가 그런 얼개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에이섹슈얼리티에 대해 잘 모르는 시청자들을 위한 입문서처럼 인물들의 입을 빌려 교조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같이 본 다른 비-무성애자 친구들은 그렇게 교조적이라 못 느꼈다는 걸 보면 이건 내가 평소에 자주 고민하던 지점이라 더 그렇게 느꼈을 수 있겠단 생각은 든다.)
다만 <코이세누>는 중반 이후로 갈수록, 정말 있었을 법한 일, 있을 법한 고민들을 그리는 드라마라는 생각이 들어 새삼 고마운 드라마다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마지막화는 무성애를 이렇게 퀴어하게 그리는 드라마가 그간 있었나 싶을 정도다. (사실 무성애 자체가 메인 주제인 드라마를 내 식견으론 거의 못 보긴 했지만...) 무성애적 관계를 이렇게 고정되지 않은 열린 가능성으로 그리는 서사가 있었나? 이 서사는 첫 화에서부터 느껴지듯, 일견 타카하시가 아직 정체화하지 않은 베이비 퀴어 사쿠코를 이끌어주는 내용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게 이 드라마를 더욱 무성애 입문서 같이 느껴지게 한다.) 이런 나의 예상은 무너지고, 마지막 화는 닫힌 가능성, 과거와 외로움에 갇혀있던 타카하시를 사쿠코가 데리고 함께 걸어 나오는 서사로 마무리된다. 타카하시는 할머니의 유골을 납골당에 올리고 애도한다. 사쿠코는 홀로 집을 돌보며 자전거에 올라타 회사로 박차고 나아간다. 집의 망령에 붙들리지 않고 새 가능성을 움틔우는 땅으로 옮겨가는 타카하시. 외로움을 소화하고 홀로, 하지만 함께 살아가는 법을 찾아낸 사쿠코. 가족의 끈은 유연하게 타카하시와 사쿠코를 잇는다.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가 보면, 나는 오늘 아침에도 내 주변 사람들이 모두 죽고 사라지면 나는 홀로 남아 쓸쓸하게 꾸역꾸역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나는 여전히 관계의 변화가 서운하고, 저변 유성애자 친구들의 성장이 어렵게 느껴지고, 소중한 이들의 죽음을 생각하면 버려진 듯 막막하다. 요새는 진실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의 외로움을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한다. <코이세누>를 다 본 지금,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닐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